227. 부창부수
계표표가 두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두변, 같이 동창 천호소로 가자. 하지만 알아야 할 게 하나 있다. 난 주화입마 때문에 근맥과 내공이 자가치유도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됐다. 내 무공 수준이 기존의 절반에도 못 미치게 되어서 당신에게 별 도움이 안 될 거다.”
두변이 말했다.
“전 대녕 제국과 대녕 제국의 신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을 보고 함께하기로 결정한 거지, 당신의 무공을 보고 결정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난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무공 회복에 힘을 쓸 겁니다. 저도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에요.”
옆에서 이 광경을 보던 계청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지한 놈은 두려움도 모른다는 말이 떠오르는군.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주화입마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나 알고 하는 말이냐? 표표는 청룡회와 함께 해야만 치유할 희망이 있단 말이다! 표표, 저 환관 놈을 따라간다면 결국 네 모든 근맥과 내공은 파괴될 것이다.”
계표표가 계청주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두변에게 말했다.
“난 당신을 믿어.”
그리곤 두변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청주가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소목지, 안으로 들어오너라.”
소목지가 눈 깜빡할 사이에 고탑으로 돌아와서는, 막 나가려는 계표표 일행과 마주쳤다.
그는 무척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계표표를 본 뒤, 계청주를 향해 허리 숙여서 말했다.
“사숙, 표표 사제의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던데, 혹시 내상을 입은 건 아닌지요?”
계청주가 대답했다.
“승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았고, 주화입마 상태에 빠졌다. 근맥과 내공이 거의 손상돼서 앞으로 무공을 다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제 사부는 표영도(飄靈島)의 도주이십니다. 남해의 여러 왕국에서 숭배하는 무도 대종사이시기도 하고, 제일 연단사라는 명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사람들에게 의선(醫仙)이라고 불리시기도 하고요. 제가 표표 누이를 데리고 표영도로 가서 사부께 치료를 부탁해보겠습니다.”
소목지가 말한 남해 지역의 여러 왕국이란 현대 지구의 동남아 국가였다.
계청주가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표표, 들었느냐? 표영도주가 중원 사람은 아니지만 그분의 명성을 너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게다. 천하제일 의선이라면 네게 실질적인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지키지도 못할 허언으로 네게 약속을 하는 저 얍삽한 환관 두변이랑은 달라.”
계청주가 다른 사람 앞에서 두변의 실제 신분을 밝혀버리자 소목지가 두변을 쳐다보았다.
두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이제 앞으로 적어도 백색부에서는 운중사 행세를 더는 하지 못하게 된 셈이었다.
계표표가 두변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내 내상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했으니까, 당신을 믿어 보지.”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꼭 치료해줄게요. 절 믿어요.”
“치료하지 못하게 되어도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믿을 테니 괜찮다. 이제 가자. 당신의 동창 천호소로.”
계표표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곧장 고탑 밖으로 나갔다.
계청주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계표표의 뒷모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계표표, 집을 나갔으면 다신 돌아오지 말아라. 오늘부터 넌 내 딸이 아니다!”
계표표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영원한 제 아버지세요.”
계청주가 다시 소리쳤다.
“네가 나갔으니 청룡회 후계자 자격도 박탈하겠다. 오늘부터 소목지가 내 의자이고, 내 후계자가 될 것이야!”
소목지가 화들짝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사숙, 사숙의 의자가 된 건 너무도 감사할 일이지만, 전 청룡회주 자리에 한 치의 욕심도 없습니다. 그 자리는 영원히 표표 누이의 것입니다.”
계표표가 말했다.
“아버지, 여태 제가 청룡회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것과 청룡회를 위해 숱한 희생을 한 건 결코 청룡회 회주 자리에 앉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계표표가 뒷말을 삼키듯이 입술을 꾹 다물고 더욱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계청주가 고탑에 서서 큰소리로 선포했다.
“청룡회의 모든 사람은 듣거라. 오늘부터 소목지가 내 의자이고, 청룡회 회주의 후계인이다. 알겠느냐!”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기지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계청주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청룡회 사람들은 계표표를 무척 존경하고 잘 따랐기 때문에 그들 마음속의 회주 후계자는 계표표뿐이었다. 그리고 계표표가 청룡회를 위해 한 희생과 지금껏 쌓은 업적만 보아도, 그녀보다 더 후계자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너희도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계청주가 격노하면서 소리치자, 청룡회의 모든 제자가 일제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당장 무릎을 꿇고 청룡회의 소주인 소목지에게 인사를 올려라!”
계청주가 뒤이어 외쳤다.
계청주는 참 한결같이 극단적인 사람이다. 그해 과거 시험 때문에 대녕 제국과의 연을 끊은 것도 그렇고, 북명검파를 배반하고 나올 때도 그렇고, 지금 딸과의 연을 끊을 때도 말이다.
계청주의 명령을 들은 청룡회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외쳤다.
“소주인을 뵙습니다!”
계표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두변과 어느덧 따라온 혈관음을 데리고 대문 밖을 나섰다.
청룡회 사람들은 무척 아쉽고 속상한 표정으로 계표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표표는 대문을 나서는 그 순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서 고탑을 짧게 바라보았다.
“표표 누이, 원래 누이의 것인 건, 영원히 누이의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뺏어갈 수 없어요.”
두변의 말에 계표표가 시선을 거두고 두변에게 말했다.
“두변, 여기까진 청룡회에서 밖으로 나오는 길이었으니까 내가 너를 이끌고 온 것이다. 지금부터는 청룡회 밖이니까 네 지휘를 따른다. 네가 앞장서면, 우리가 뒤에서 따른다.”
잠시 뒤, 계표표가 혈관음을 슬쩍 쳐다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이기도 하고. 안 그래, 관음?”
혈관음이 깜짝 놀라서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어, 언니가 어떻게 그걸 알아? 내가 두변과 그런…….”
혈관음이 당황해하자, 계표표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오늘 우리가 대화할 때 네 분위기와 말투가 완전 다르던데. 처음에 두변을 향한 네 눈빛을 눈치채진 못했지만, 내가 아예 눈치 없는 바보는 아니잖아.”
혈관음이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관음, 난 네 사랑을 빼앗을 생각이 없어. 이따 천호소로 돌아가는 대로 두 사람의 혼례를 올려줄게. 내가 증인이 되어주고. 어때?”
혈관음이 두변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빛을 반짝였다.
“이왕 할 것 같이 해. 두변은 환관이니까, 우리가 올리는 혼례는 하나의 의식인 셈이잖아. 우리가 언제나 같은 편에 서서 든든한 전우가 되어주기로 약속하는 의식.”
계표표가 두변과 혈관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의식으로 우리 셋을 묶어두는 거지. 동창 천호소로 가자마자 의식을 치르자. 앞으로 우린 서로에게 의지하고 끝까지 곁을 지킬 전우가 되는 거야.”
두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두변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니, 사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두변이 독립적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겠다면서 꿈속 시스템의 보호를 내친 것과 계표표가 계청주를 떠나 완전히 독립한 것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앞으로 두 사람은 온전히 자신들만의 능력으로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백색부가 위험천만하고,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불행과 역경이 뭐일진 모르지만, 그래도 보란 듯이 백색부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시스템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계표표도 청룡회의 고탑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속삭였다.
아버지, 저는 두변과 함께 백색부에서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낼 겁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로 증명해드릴게요. 아버지께서 틀리셨다는 걸.
두변은 운중사 가면을 찢어내고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 후, 혈관음, 계표표와 함께 천호소로 향했다.
백색부 동창 천호소.
천호소 대문 앞에는 여전히 열댓 명의 거지가 앉아 있었다.
천호소 안은 며칠 전과 다를 바 없었고, 멀쩡한 침상이나 탁자, 심지어 의자조차 없었다.
두변이 돌아온 걸 보자, 임계연 등이 서둘러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이삼, 이사, 이위, 진평, 좌앙(전 계왕부 호위), 임계연, 그리고 장옥윤.
이들이 두변이 백색부에서 가지 전부였다.
이젠 여기에 계표표가 더해졌지만, 무공을 거의 쓸 수 없는 상태라서 당장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변에게 있는 힘이라곤 일곱 명이 다였지만,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수만 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지를 다지고, 자기만의 세상을 다지는 건 하늘을 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동창 천호소는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 없었다. 기존에 천호소에 있던 동창 사람들은 여전히 구걸하며 연명했고, 두변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건량에 의지해서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주인, 오셨습니까.”
임계연이 슬픈 표정으로 두변을 맞이했다.
두변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평이 없어졌다는 걸 발견하고 물었다.
“진평은 어디 갔습니까?”
임계연이 대답했다.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이젠 더 구걸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저희가 가진 건량을 그들에게 나눠줘야 하다 보니, 지금 남은 건량으로는 최대 이틀 버틸 수 있고, 이후에는 먹을 게 아예 동납니다.”
문 앞에 있던 늙은 거지 도 백호가 말했다.
“백색부를 떠나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요. 다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떠나거나, 우리처럼 비렁뱅이 처지가 되는 거라고.”
두변이 다시 한번 물었다.
“진평이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임계연이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진평은 환관이 아니다 보니, 은자를 가지고 쌀을 사러 밖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값을 열 배로 쳐주겠다는데도 상인들이 팔지 않았고, 그 점포의 점원들이 진평에게 환관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라며 그의 바지를 벗겨버렸습니다. 진평이 치욕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반격했는데, 그놈들이 진평의 두 다리를 부러트렸습니다.”
화가 난 두변은 명치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가가 순식간에 벌겋게 충혈됐다.
평생 책만 쥐고 살던 나약한 서생 진평이 사람들을 위해 곡식을 사러 나갔다가 그런 치욕스러운 일을 겪고 두 다리까지 잃게 되었다니!
두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곡식을 파는 점포 주제에 우리 동창 사람을 건드려? 그 비천한 놈들이 뭐라고 감히 내 막료의 다리를 부러트려! 너희는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왜 보복하지도 않고, 사람을 잡아들이지도 않았어?”
계왕부 전 호위 좌앙이 나서서 말했다.
“백호 대인께서 모르시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백색부 전체의 곡식 유통과 판매는 성창륭(聖昌隆) 한 곳에서 독점하고 있습니다. 성창륭과 거래하는 점포가 수백 개 넘는데, 그들의 배후에는 홍하회가 있습니다.”
홍하회는 여씨 토사가 백색부를 통치하고, 서남 토사 연맹을 아우르는 거대 상회이자 경제적 조직이었다.
홍하회 회장 여여지는 천도회주 이도전의 부인이고, 천도회는 여씨 토사가 백색부를 장악하는 무력 도구이다. 무공만 봤을 때 이도전이 계청주보다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천도회의 인원은 청룡회의 몇 배가 되었다. 그들은 백색부에서만 육천 명이 넘는 무사가 있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무장 부대를 만들 수 있는 집단이었다.
좌앙이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성창륭 유통의 배후에는 백색부 동창 천호, 백색부 지부, 백색부 참장 등의 전주(錢主)가 있습니다.”
두변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의 다리를 분지른 사람은 일개 곡식 점포의 점원이지만, 성창륭은 백색부 곡식 판을 촘촘하게 장악하는 거대 연쇄 집단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백색부의 곡식 시장을 독점하는데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