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29화 (229/648)

229. 한 번도 져선 안 돼

이때, 엄청난 내력이 주위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대종사 영종오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언제나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널 죽이라고? 참으로 우습구나. 네깟놈을 죽이는 데 뭐하러 내 손을 더럽히겠냐. 너 같은 놈들은 소설책에서처럼 금방 죽어. 내가 특별히 말해주는 건데, 넌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변이 칼을 집어넣고 대답했다.

“기대해야겠네.”

그리고는 동료들과 함께 유유히 자리를 떠나서 동창 천호소로 향했다.

두변 일행이 온몸이 피범벅인 채로 온갖 식량을 들춰 메고 온 걸 보자, 문 앞에서 구걸하던 동창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럽니까, 도 백호? 같이 와서 한잔하지 않겠습니까?”

늙은 거지 도 백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성창륭 점포의 사람을 죽인 건가?”

“맞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을 다 죽였죠.”

도 백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럼 얼른 도망쳐라. 얼른!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도망칠 기회도 없어져!”

“도망이요? 지금 나더러 백색부를 떠나라는 말입니까?”

두변이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농담 같지도 않은 소리! 절대로 그럴 일 없습니다.”

도 백호가 경악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죽겠네. 죽겠어. 이문회 대인께서 보내셨던 다른 두 천호도 자네만큼 떵떵거렸고, 자네보다 훨씬 더 많은 정예병을 이끌고 이곳에 왔었지. 그런데 그들은 사흘도 채 안 돼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어. 그런데 자네는 백 명도 아니고, 일고여덟 명의 사람만 데리고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다고? 자네만 죽는 게 아니라, 이러다 우리 다 죽어!”

도 백호가 허둥대면서 외쳤다.

“죽으려면 혼자나 죽게. 난 이만 가볼 테니.”

도 백호가 문 앞에서 구걸하던 십여 명의 총기와 소기에게 말했다.

“얼른 도망쳐라. 같이 죽을 거 아니면, 얼른 도망쳐.”

그렇게 오랫동안 천호소 문 앞을 지키던 십여 명의 동창 사람들이 순식간에 도망쳐서 사라졌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두변이 보기에 그들은 마치 지진이 오기 직전에 대피하는 동물 같다고나 할까.

두변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이제 배불리 밥도 먹고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자. 며칠 내내 밀가루 덩어리만 먹었더니 입에서 단내가 다 나네.”

“알겠습니다!”

임계연이 가장 먼저 고기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기저기 부러져있는 나무토막을 장작 삼아 불을 지폈고, 사람들을 위해서 요리를 했다.

반 시진 뒤, 천호소 대청 안에 거하게 한 상이 차려졌다.

두변이 사람들과 함께 둥근 탁자에 모여 앉아서 포식하기 시작했다.

배에 기름칠한 게 얼마만인지, 두변 등은 촛불이 환하게 켜진 대청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고기를 뜯으며 시끌벅적하게 만찬을 즐겼다.

바깥에서 이 광경을 감시하던 여씨 사람이 냉소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이 생각나네. 미친놈들.”

같은 시각.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백색부 거리에 무장한 병마가 쉼 없이 돌아다녔다.

“야간 통행을 금지한다.”

“야간 통행을 금지한다!”

기마병들이 큰소리로 외치면서 곳곳을 오갔다.

“야간 통행 금지령이 떨어졌다. 해시(亥時) 이후로는 아무도 거리로 나와선 안 된다. 이를 어길 시에는 즉시 처형하겠다.”

“야간 통행을 금지한다!”

엄청난 규모의 병마가 백색부 전체에 포진하면서 야간 통행 금지령을 알렸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성 안팎으로 순찰을 시작했다.

두변 등이 절대로 성 밖으로 나갈 수 없게 성 전체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갔고, 집으로 가자마자 모든 문과 창문을 빈틈없이 닫았다.

거리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을 때, 천호소의 어느 방 안은 여전히 촛불을 환하게 켜놓고 시끌벅적하게 고기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천도회주의 딸 이능어의 저택 안.

그녀는 밖이 아닌데도 여전히 남자 옷을 입고 있었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그녀를 에워싼 채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능어가 사내를 좋아하지 않고 여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백색부 전체가 알고 있는 바였고, 그녀의 저택 안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인이 있었다.

환관도 첩을 둘 수 있는데, 여인이 집에서 같은 여인을 첩처럼 두는 게 무엇이 문제일까.

백색부 동창 천호 장소(張逍)가 이능어를 향해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장소는 올해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8년 전에 광서 환관 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동창 계림부에서 총기관으로 동창 생활을 시작했다.

재임 중에는 굵직한 사건들을 완벽하게 해결했고, 총기임에도 불구하고 계림부 지부의 저택을 수색할 정도로 오직 원리원칙만을 따르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이문회는 광서에 오자마자 장소라는 인재를 발견했고, 곧바로 그를 시백호를 건너뛴 백호로 승진시키면서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장소는 이문회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고, 울림주(鬱林州)에서 일당백으로 동창의 기세를 확장했다. 그는 광동성 엄당과의 기싸움에서도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고, 나중엔 악룡방(惡龍幇)을 토벌할 때 큰 공을 세워서 광서 전체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장소는 이문회가 광서에서 가장 중용하는 심복이 되었다.

이문회는 대쪽같은 장소의 품행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이문회가 비록 동창의 만호일 뿐이었지만, 이미 광서성 전체 동창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수를 써도 백색부를 뚫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씨 토사는 아예 백색부에 남아있던 대녕 제국의 세력을 완전히 짓눌러버렸다.

이문회가 바늘로 구멍을 뚫는 심정으로 두 명의 동창 천호를 이곳으로 보냈는데, 두 명 모두 백여 명의 정예병을 데리고 왔음에도 사인 불명으로 죽게 되었다.

당시 장소는 어딜 가든 자기가 다 씹어먹을 수 있다는 패기가 넘쳤다. 그래서 그는 이문회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의도와 자기가 이문회의 가장 빼어난 수하라는 걸 공식화하기 위해서 백색부로 가기를 자원했다.

어린 나이에 백호가 된 장소는 이 자리에서 꽤 오래 지내야 천호로 승진한다는 게 답답했다. 그는 하루빨리 자기가 생각하기엔 퇴물이나 마찬가지인 무천추, 종정 같은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호랑이굴인 백색부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문회가 장소를 아끼는 건 맞지만, 그는 자존감이 과하게 넘치고, 무조건 남들보다 자기가 더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백호인데도 무천추, 종정 같은 천호를 누르려는 그의 마음이 이문회의 눈에 그대로 보였다. 이문회는 장소를 후계자로 삼을 정도로 아꼈지만, 그의 심성을 단련하기 위해서 백호 자리에서 몇 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그의 백색부 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소가 이문회의 관저 밖에서 무릎을 꿇은 채 꼬박 이틀 밤을 지새웠다. 그는 이문회의 짐을 덜어드리겠다며 간곡히 청을 올렸고, 백색부에서 동창의 자리를 확실히 확보하겠다며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자신의 피로 군령장을 썼다.

이문회는 고민 끝에 결국 장소가 백색부로 가는 걸 허락했다. 그는 장소에게 백색부에 남아있는 게 곧 승리이니, 절대로 경거망동하거나 마음을 조급하게 먹어선 안 된다고 일렀다.

장소는 당시 정예 무사 오백 명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백색부로 와서 천호가 되었다. 당시 그는 백색부뿐만 아니라, 거의 광서 전체에서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는 기세였다.

그런데 그의 포부는 한 달 만에 수포가 되었다.

자존감이 극도로 높았던 그는 한 달 만에 부정적이면서 인생에 회의감이 가득한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생존을 위해 동창을 배반했고, 아버지처럼 여겼던 이문회를 배신했다.

이문회의 신임을 얻고 광서 엄당의 떠오르는 샛별이던 장소는 그렇게 여씨 토사의 주구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능어의 주구가 됐다.

“장소, 너랑은 달리 두변이야말로 이문회의 진정한 후계자 아니냐? 적어도 이문회는 널 의자로 거둬들이지 않았잖아.”

이능어가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장소의 준수한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곱상한 환관보단 유망한 젊은 장수에 가까웠다. 그는 크고 굵직한 이목구비 덕분에 용맹함이 돋보였는데, 몇 년 사이 그의 용맹함은 음울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소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두변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광대놈일 뿐입니다. 이문회가 눈뜬장님인 거죠.”

이능어가 눈썹을 슬쩍 올리면서 물었다.

“이문회를 그렇게 얘기한다고? 한때 네가 섬겼던 사람을?”

장소가 이능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섬기는 사람은 오직 여기 계신 주인과 여씨 가문뿐입니다. 이문회는 끝장났고, 대녕 제국도 머지않아 파멸할 것입니다.”

이능어가 냉소했다.

“두변 그 개새끼가 죽을 때가 됐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기엔 너무 하찮은 존재야. 고작 그놈 하나 죽이겠다고 내가 조정 관리를 죽였다는 책임을 질 필요 없잖아? 가서 그놈을 죽여라. 너는 동창의 천호이니, 그놈을 어떻게 죽여도 명분을 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해야 남들이 보기엔 이 일이 대녕 제국 엄당 내부의 싸움인 것이고, 우리 여씨와는 무관한 일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놈이 내일 태양을 볼 수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그놈을 죽인 뒤에 제가 정식으로 여씨 가문의 관리가 되어 문산성에서 근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능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가 보거라. 꼭 기억해라. 두변과 그의 일행이 절대로 내일 태양을 볼 수 없도록 해라.”

허름한 백색부 천호소 안.

두변과 그의 일행은 계속해서 술잔을 비우며 고기를 뜯었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그들의 술잔에는 술이 아닌 물이 가득했다. 외부의 감시자들이 의심할까 봐 최후의 만찬인 척 술 마시는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변이 말했다.

“내가 워낙 존재감이 없다 보니, 여씨 가문이 직접 나서서 나를 죽이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나 하나 죽이기 위해서 여씨 가문이 조정 관리를 죽였다는 죄명을 얻을 필욘 없을 테니까. 그들은 아마 동창의 배반자 천호 장소를 시켜서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 그리고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장소는 기선제압 하려고 직급으로 나를 누르려고 할 것이다.

장소 휘하에 무사 오백 명이 있는데, 무사 중 대부분이 여씨 가문 사람이다. 그들은 동창 무사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셈이니 그들에게 어떤 동정도 환상도 느끼지 말고 적으로 봐야 한다.

그에겐 오백 명이 있지만, 우린 다 합쳐봐야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쪽에도 대종사급 강자가 있을 테니, 영종오 대종사께서는 그자를 상대해 주셔야 해서 우릴 돕지 못하실 것이다.

쪽수로는 승부가 안 될 싸움이니, 최대한 머리를 써야 한다. 공간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온갖 수를 써서 상대를 교란시켜야 한다. 우린 절대로 그들과 정면승부로 맞서 싸워선 안 돼.

지금부터 시작할 모든 싸움에서 우리는 한 번도 져선 안 된다. 우린 계속해서 이기고, 이기고, 또 이겨야만 백색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한 번이라도 패배했다간 모든 게 끝장 난다.

지금부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전투에 임할 것이고, 모두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들 잘 해낼 수 있는가?”

두변이 물었다.

“명, 따르겠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때, 밖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색부 동창 시백호 두변 안에 있는가?”

두변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창 백호 한 명이 십여 명 무사를 이끌고 두변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놈이 바로 두변이더냐.”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을 따라 되물었다.

“네놈이 바로 임횡(任橫)이더냐. 역적을 주인으로 섬기고, 조국을 배신하고, 동창을 배반한 여씨 가문의 주구 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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