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장. 한단지보
이런 모습의 그가 1품 무사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하긴, 1품 무사 정도는 돼야 주군의 영계를 보관할 수 있겠지.’
두변이 사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막영 토사께서 나를 이리로 보냈습니다. 막씨 가문의 국왕 영계를 가지러 왔습니다.”
“비밀 구령이 뭐요?”
아야가 물으면서 살짝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아야, 네가 열한 살 때 침상에 오줌을 쌌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두변의 대답에 1품 고수 아야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10여 년이오. 벌써 10여 년이 지났소. 10여 년 만에 드디어 의모의 소식을 알게 되다니. 나는 이대로 의모와 영영 소식이 끊기는 줄만 알았소.”
아야는 막씨 가문보다는 막영 토사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의모께서는 잘 계신 것이오? 지금 어디 계시오?”
두변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막영 토사의 남편인 감타가 아주 깊은 심연에 토사를 가뒀었어요.”
아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어! 감타 그놈만큼 배은망덕한 놈이 없지. 그놈의 시신을 천 토막, 만 토막 내도 싸.”
아야가 다시 고개를 들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의모께서 돌아가실 때, 많이 고통스러워하셨소?”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게 아니라, 해탈하신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막영은 죽기 전에 무공을 천지 원기에 흘려보내고, 해탈한 상태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야가 바닥에 엎드린 채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울음을 터트렸다. 10여 년을 기다려서 듣게 된 소식이 이 소식이라니.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충성을 맹세했던 의모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게 너무도 가슴 아팠다. 이런 소식을 언젠가 듣게 되리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야가 비통함을 추스르고 말했다.
“내 의모께서 왜 막씨 가문의 희망을 귀하에게 맡겼는지, 왜 귀하에게 국왕의 영계를 맡겼는지 묻고 싶소.”
두변이 대답했다.
“저는 견사 대사의 계승인입니다.”
“지금 의, 의부의 계승인이라고 하였소?”
두변이 흠칫 놀랐다.
‘이 사람이 지금 견사 대사를 의부라고 부른 건가?’
아야가 설명했다.
“나는 고아였소. 추운 겨울에 의지할 곳이 없어 굶어 죽을 뻔했는데, 견사 대사께서 나를 발견하셔서 살려주셨지. 그 뒤로 몇 년 동안 의부를 따라 강호를 떠돌았는데, 그러다 의부께서 막씨 토사부에서 의모를 만나게 된 게요. 의부께서는 내가 아직 어린아이이니, 안정적인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나를 의모께 의탁하셨소. 그래서 막영 토사께서 나의 의모가 되신 거요.”
아야가 떨리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의, 의부께서는 잘 계시오?”
두변이 대답했다.
“이미 열반하셨습니다.”
두변이 머릿속에서 견사 대사의 기억을 찾아냈다.
그러자 두변의 얼굴에 견사 대사의 후광이 비치면서, 아야에 관한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장면 속의 아야는 어린아이였고, 견사 대사가 그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해서 아야가 뛸 듯이 기뻐하는 장면이었다.
“아야!”
두변이 견사 대사의 목소리로 아야를 불렀다.
그러자 아야가 다시 한번 힘없이 바닥에 엎드린 채 통곡했다.
한참이 지난 뒤, 아야가 감정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사내가 내실로 들어간 뒤, 밀실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왔다. 상자 안에 든 반지가 바로 막씨 가문의 국왕 영계였다. 검은 주석으로 만들어진 반지의 중앙에는 기이한 수정이 박혀 있는데, 원석에서 신비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계가 바로 막씨 가문이 재기할 수 있는 희망이야. 여기엔 막씨 왕조의 보물이 숨겨져 있어!’
아야가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서 허리를 숙이고 국왕의 영계를 두변에게 바쳤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막야, 주인을 뵙습니다.”
주인?
두변이 흠칫 놀랐다.
“나는 잠시 이 영계를 맡는 사람일 뿐입니다. 난 이 영계를 막씨 가문의 후계자에게 전달해줄 뿐이에요.”
막야가 말했다.
“저를 살려주신 분은 의부십니다. 한때 막씨 토사부에서 살았던 건 맞지만, 저는 여전히 의부의 사람입니다. 귀하가 의부의 계승자라면, 저 막야도 귀하의 것이지요.”
두변은 막야가 왜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는지 잠시 생각했다.
중국 고대에서는 대단한 인물들이 의자를 거두는 게 흔한 일이었는데, 대부분은 자기 친자식을 보조하기 위해서 의자를 거두었다. 그래서 의자와 친자는 형제이기도 하지만, 주인과 종복의 관계이기도 했다.
지금 막야는 두변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부의 계승자라는 이유로 그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당신은 액족인(厄族人)입니까?”
두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액족인은 외골수인 걸로 유명한 부족이었다. 그들도 한때는 서남의 토사였지만,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려서 멸망하게 되었다.
두변은 아야가 그때 고아가 된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두변이 말했다.
“난 지금 군대가 필요합니다. 나를 잔혈방으로 데려가서 막씨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막(莫) 삼소저를 만나러 가시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막야가 비밀 통로의 문을 열기 위해 잠시 사라졌다.
그 사이 두변은 막씨 가문의 반지를 촛불에 비추면서 자세히 관찰했다.
여기에 막씨 왕족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막씨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 여기에 있다면서,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막씨 가문의 몇 대 가주들이 이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무도 이걸 쓸 생각을 안 한 걸까. 보물이 있긴 한 걸까?
두변이 의아한 눈빛으로 반지를 관찰하다가, 반지의 각도를 살짝 틀어서 빛이 정중앙의 수정에 오도록 했다.
두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반지의 비밀을 발견한 것이다.
“주인, 이쪽으로 오시지요.”
막야가 두변의 등 뒤에서 말했다.
같은 시각.
이 세계의 어떤 공간 안. 기이한 불빛이 공중에 떠 있다가, 네 갈래로 갈라졌다.
기이한 불빛 네 갈래가 마지막 회의를 시작했다.
‘말을 안 듣는 숙주를 어떡하면 좋을까? 이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원칙대로라면 죽여버리는 게 맞지.’
‘차라리 이 세계의 현지인을 하루빨리 육성해서 이 힘들고 위대한 임무를 완수해야지 않겠어?’
‘봐봐. 숙주가 찾은 군대는 결국 잔혈당이잖아. 우리가 예상했던 노선 그대로 가고 있어. 이번 숙주도 결국 큰소리만 칠 줄 아는 놈이야.’
‘하지만 이번 숙주는 유전자가 일치하는 마지막 사람이야. 우리가 다시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그자가 충분히 숙명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려면 최소 17년이 필요해.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17년이라는 시간이 없어.’
‘난 차라리 이 세계에 있는 현지인을 육성하는 게 성공 확률이 더 높다고 봐.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이 있어? 다들 훌륭해서 한 명만 잘 골라도 우리의 임무를 완수해낼 수 있다고 봐.’
‘하지만 그들은 다른 지구의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할 텐데?’
‘특수한 세계관을 이해시키지 않아도 되지. 다 씹어먹을 정도로 능력이 좋기만 하면 되지 않겠어?’
‘내 생각엔 숙주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 바로 착하게 말을 잘 듣고 우리에게 완전 복종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도 우리의 계획을 그르칠 테니까. 여태 우리의 명령을 어기는 놈들은 다 죽였잖아. 그런데 왜 예외를 만들려고 그러지?’
‘숙주가 복종하지 않으면 죽일 수 있었던 건 다음 숙주가 항상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런데 지금은 더 데려올 숙주도 없지 않아.’
‘우리가 지금 숙주를 가장 최후의 보루로 남겨놨던 건, 저자가 그만큼 완벽하지 않고 결함투성이여서잖아.’
불빛 네 개가 쉬지 않고 논쟁했다.
‘투표로 끝내자. 계속 지금 숙주를 안고 갈 건지, 죽여버릴 건지.’
‘죽여.’
‘죽여.’
‘좀 더 지켜보자.’
죽이자는 의견이 둘, 좀 더 지켜보자는 의견이 하나였다.
만약 마지막 불빛이 두변을 죽이자고 한다면, 두변은 죽고, 현지인이 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금색 불빛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혹시 다들 두변의 말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 있어? 우리가 이렇게 대단하고, 우리가 계획한 노선이 이렇게 정확한데, 왜 항상 실패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벌써 우리가 이 일을 한 지 몇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잖아. 선택권과 시간이 차고 넘치던 때는 다 지나갔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번 숙주를 데려왔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나머지 불빛들이 침묵했다.
금색 불빛이 이어서 물었다.
‘만약 두변이 우리의 도움 없이 백색부를 뚫어내고,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고도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어떡할 생각이지?’
붉은색 불빛이 언성을 높였다.
‘절대로 그럴 리 없지. 두변은 지금 엉성하게 한단지보(邯鄲之步: 자기의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면 제 재간까지 다 잃는다.)하는 것일 뿐. 우리 계획대로 가고 있잖아. 막씨 가문의 잔여 세력을 수복하는 건 우리 계획의 일부였어. 두변이 우리와 갈라섰지만, 여전히 우리의 단물을 빼먹고 있는 거라고. 지금 두변은 이전에 우리가 썼던 그 어느 숙주보다도 형편없는 게 맞아!’
금색 불빛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건 만에 하나의 상황이잖아. 만약 우리 계획대로 가지 않았는데, 결국 두변이 승리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막야는 막영 토사의 의자이다 보니, 막씨 가문 내에서 서열이 꽤 높았다.
잔혈방의 지하 비밀 근거지 중 한 곳이 바로 멸혼루 근처에 있었다.
그는 횃불을 들고 비밀 통로 안에서 앞장서서 걸었다.
“이 비밀 통로는 예전부터 있던 겁니까? 아니면 나중에 파낸 겁니까?”
두변이 물었다.
막야가 대답했다.
“백색성은 원래 막씨 가문의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막씨 가문이 이곳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었죠. 이런 비밀 통로와 지하 근거지는 다 그때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비밀 통로가 백색부 전체에 퍼져있고, 비밀 통로로 백색부 곳곳을 거의 다 갈 수 있습니다.”
두변 일행은 길고 긴 비밀 통로를 몇 리나 걸은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막야가 앞으로 다가가서 특정한 규칙으로 철문을 두드리자, 잠시 뒤에 철문이 열리고 무사 두 명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막 장로!”
두 무사는 붉은 피를 의미하는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어서, 두건만 봐도 잔혈방 사람임을 알 수 있을 듯했다.
무사 두 사람이 두변 등을 바라보았다.
막야가 소개했다.
“이분은 대토사(大土司)의 사자이시다.”
무사 둘이 두변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삼소저께서 안에 계시느냐.”
“계십니다.”
막야의 질문에 잔혈방 무사가 대답했다.
막야는 두변 등을 데리고 철문을 넘어서 거대한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와, 진짜 무지막지하게 큰 지하실이잖아!
두변은 내심 감탄했다.
그들이 들어간 지하실은 족히 몇백 평이 되어 보이는 곳으로, 대리석처럼 보이는 정교한 석판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지하실 중앙에는 수많은 관이 놓여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막씨 토사의 지하 왕릉인 모양이었다.
막야가 관 뚜껑 하나를 열자, 층계 하나가 보였고, 층계를 따라 내려가 보니 또 다른 통로가 나왔다.
통로 안에는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막야 의형, 지금 외부인을 데리고 막씨 지하 궁전에 온 겁니까?”
어디선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