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32화 (232/648)

232장. 막씨 가문의 후계자

여인의 목소리는 뼈마디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곧이어 수많은 횃불이 동시에 켜지고, 너무 갑작스러운 불빛과 휘황찬란한 금빛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잔혈방의 지하 핵심지는 정말로 지하 궁전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금빛으로 가득한 궁전은 벽조차 금박으로 덮여 있었다. 궁전의 정중앙에는 옥좌가 놓여 있는데, 금박이 되어 있고 용이 새겨져 있는 것이, 꼭 용상이나 다름없었다.

황금색 용상에 앉아 있는 얼음처럼 차갑고 아름다운 여인은 몹시 화려한 장포를 입고 있었고, 심지어 머리에는 금관까지 쓰고 있었다.

막씨 조상은 안남 왕국의 왕족이었고, 반란을 일으켰을 땐 막영 토사가 스스로 백색왕을 자처했었다고 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절세 미녀의 곁에는 몇십 명 무사가 서 있었고, 다들 모두 눈부시게 화려한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두변은 막씨 가문의 잔여 세력이 망명하느라 지하 세계에서 누추하고 힘든 생활을 할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막씨 가문은 지하 세계에서 왕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여기 앉아 계신 분은 제35대 안남 왕국 왕이자, 제2대 백색 왕국 여왕 막한(莫寒)폐하이시다!”

환관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두변을 향해 말했다.

이 와중에 환관까지 있어? 밖에선 잔혈방이라고 하고, 내부에선 왕족 노릇을 하고 있었나 보네. 사람이 얼마 남지도 않았을 텐데, 이런 게 된다고?

두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여인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잠시 고민했다.

“두변, 막 삼소저를 뵙습니다.”

두변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서 예를 올렸다.

막한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두변이 아닌 그의 뒤에 서 있는 계표표를 향해 있었다.

막한의 눈빛에서 이글거리는 경쟁심을 발견한 두변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서남 4대 미인 중 한 명이 바로 전설 속의 막씨 공주라는 사실 말이다.

이 사람이 바로 얼음 공주 막한인가 보구나!

“누구냐.”

막한이 물었다.

“저는 대녕 제국의 동창 백호, 두변입니다.”

“무슨 일로 왔지?”

두변이 속으로 한탄했다.

제발 무게 좀 그만 잡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엄당 백호가 파벌의 우두머리와 하는 대화인데, 꼭 대녕 제국의 관리가 여왕 폐하를 뵙는 것 같잖습니까!

두변이 말했다.

“막영 토사의 부탁을 받아, 막씨 가문의 영계를 막씨 후계자에게 전하러 왔습니다.”

막한의 눈빛이 반짝이면서 드디어 얼음장 같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왕의 영계 말이냐?”

막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지만, 그녀는 체통을 지키려는 듯 간신히 엉덩이를 옥좌에 붙이고 앉았다.

“이리 가져오너라.”

막한이 말하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환관이 두변에게서 국왕의 영계를 가져갔다.

환관이 막한을 향해 무릎을 꿇고 반지를 바쳤다.

“감축드리옵니다. 여왕 폐하. 왕의 영계를 다시 얻게 되셨으니, 이제 폐하께서는 안남 왕국 왕으로서 백색 왕국을 호령하시게 되셨습니다.”

두변은 이 상황이 마냥 손발이 오그라들 뿐이었다.

안남 왕국의 여씨 왕조도 곧 없어질 판국인데, 300년 전의 일을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이야. 제발 적당히들 좀 하세요!

이 와중에 막한은 여전히 여왕 모양새를 흉내 내면서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은 진지하게 막한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두변은 현대 지구에서도 이토록 피부가 흰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김용(金庸) 소설의 소용녀(小龍女)처럼 차가운 분위기랄까. 막한의 이목구비는 청아하면서도 수려했고, 살결이 무척 맑고 깨끗했다.

그런데 막한은 소용녀의 생김새뿐 아니라 머리가 어떻게 된 것도 닮은 모양이었다.

막한은 두변이 반지를 만졌었다는 게 기분 나빴는지, 고운 비단 손수건 한 장을 꺼내서 반지를 집어 들더니, 불빛을 통해 꼼꼼히 살핀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막씨 국왕의 영계가 맞군. 두변, 본왕을 위해서 국왕의 영계를 가져왔는데, 무슨 포상을 원하는가?”

두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기 어머니의 행방을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닌가?

“삼소저, 두변 선생이 대토사의 행방을 알고 계십니다.”

막야가 옆에서 말하자, 막한이 그제야 물었다.

“그래? 선대 여왕의 행방을 알고 있다니,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영당께서 깊은 심연에 감금되셨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무공의 일부를 제게 물려주셨고, 국왕의 영계를 막씨 후대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두변이 대답했다.

그는 대답하면서 뒤늦게 생각했다.

‘막야가 국왕의 영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바로 막한에게 주지 않은 이유는 뭘까?’

두변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을 찾아냈다.

당시 막영은 감타에게 국왕의 영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막야에게 보관했고, 그 후로는 막야는 국왕의 영계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막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고 살았다.

그러다 막씨 가문이 여씨 토사의 배신으로 인해 파멸했고, 막야는 막 삼소저를 보호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에 다시 막씨 가문과 왕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영의 명령이 없는 한, 막야는 절대로 국왕의 영계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별세하셨다고?”

막한의 표정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래. 알겠다.”

막한의 반응에 두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기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 반응이 다라고?’

막한이 물었다.

“무슨 포상을 원하는가?”

‘진짜 중증이로군. 진짜 자기가 여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두변은 이윽고 감탄까지 할 정도였다.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대녕 제국의 동창을 대표하여 막씨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우리의 공동의 적은 여씨 토사이니, 막 소저께서 제게 일천 병마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동창은 앞으로 막씨 가문을 도와 토사 지위를 되찾게 해드릴 것이고, 동창의 지지하에 막씨 가문은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막한이 헛웃음을 터트린 뒤, 매서운 눈빛으로 두변을 노려보았다.

“황당하기 그지없구나. 네가 대녕 제국에서 몇 품이나 되는 관리라고 본왕과 동맹을 운운해? 여씨 토사가 우리의 가장 큰 적이지만, 두 번째 적이 바로 대녕 제국이다. 본왕과 동맹 조건을 논할 거라면, 적어도 황제의 칙사를 데려오거나 계왕을 데려와라.”

두변은 듣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막야를 흘깃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저러는 겁니까?

막야가 난감해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삼소저, 두변 선생은 이문회의 의자이고, 이문회는 미래 동창 대도독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니 두변 선생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동창 전체와 동맹을 맺는 것이니 놓쳐서는 안 될 기회입니다.”

막한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문회도 결국은 황가의 가노일 뿐인데, 무슨 자격으로 나와 담판한단 말이냐?”

막한의 옆에 있던 환관이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여왕 폐하께는 이미 강력한 동맹이 있습니다. 미래 왕부(王夫)께서는 동창보다 훨씬 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리고 귀하께서는 제 코가 석 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신세면서 동맹이라니요.”

막야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막한이 그만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여봐라. 두변에게 일백 냥 황금을 하사하고, 그만 돌아가라고 하여라.”

두변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물었다.

“국왕의 영계를 바친 게, 고작 일백 냥 황금의 가치입니까?”

막한이 대답했다.

“본왕의 얼굴을 보게 된 건 값을 매길 수 없지 않은가.”

두변은 정말로 말문이 턱 막혔다.

환관이 말했다.

“귀하는 지금 여씨 가문에게 쫓기는 신세일 텐데, 우리가 귀하를 여씨 가문에게 안 넘긴 것도 보답이라 할 수 있지요.”

막한이 막야에게 말했다.

“승상, 앞으로는 이렇게 함부로 바깥사람을 우리 지하 왕궁에 들이지 말라.”

그렇게 두변 등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몇십 명 무사들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났다.

막야의 집에 돌아온 뒤, 두변이 막야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댁 삼소저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백색 여왕 놀이를 하는 겁니까? 막씨 가문이 안남 왕족이었던 건 벌써 300년 전 일이고, 백색왕이라는 것도 감타가 스스로 봉한 것인데요? 한 달도 안 돼서 백색왕이라는 호칭은 의미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막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삼소저는 과거의 영예를 잊지 못한 막씨 가문의 옛사람들 손에서 자란 터라 그렇습니다. 제가 다시 막 삼소저를 찾게 되었을 때, 이미 저 모습이 되어 있었죠. 저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저도 국왕의 영계를 일찍이 삼소저에게 줬을 겁니다.”

이 반지는 막씨 가문에게 무척 소중한 가보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단순한 반지일 뿐이다. 오직 막씨 가문의 사람만이 이 반지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막씨 가문의 희망이라는 건, 바로 이 반지에 숨겨진 왕족의 보물이었다.

보물은 반지의 수정석 안에 그려진 도안에 있었다. 무척 기이한 도안이긴 하지만, 두변은 이미 그 도안을 머릿속에 새겨둔 상태였다. 그 도안만 기억한다면, 국왕의 영계가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두변이 물었다.

“막씨 왕족 보물의 비밀은 반지 안에 새겨진 도안에 있는 거겠죠?”

막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역대 막씨 가문의 가주께서 수백 년을 연구하셨지만, 아무도 그 도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두변은 막씨 가문의 보물에 관한 생각은 잠시 한쪽으로 치워뒀다.

다만 막씨 가문에게서 병마를 빌려오지 못한 게 너무도 아쉬웠다.

군대가 없다면 장소를 죽일 수 없을 것이고, 동창 천호소를 잃게 되어서 임무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꿈속 시스템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건가? 정말 난 죽을 수밖에 없나?

같은 시각.

붉은 불빛이 말했다.

‘내가 말했었잖아. 이 숙주는 무능한 놈이라고. 우리의 계획대로 가긴 했지만, 우리의 조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막씨 가문에게서 군대도 못 얻었잖아. 괜히 더 이 숙주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얼른 죽여!’

푸른 불빛이 말했다.

‘나도 실망하긴 했어. 나도 숙주를 죽이는 것에 동의해.’

금색 불빛이 말했다.

‘그래도 좀 더 두고 보자. 바닥을 쳐서 절망할 때, 의도치 않은 기회로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도 있으니까.’

두변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잔혈방에서 병마를 빌리는 건 이미 글렀고. 그럼 군대를 만들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 지금쯤 꿈속 시스템이 나를 비웃고 있겠네. 그들 없이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아니면 나를 죽일지 말지 결정하고 있으려나?

두변은 눈을 질끈 감고 고심했다.

절체절명의 시기이니, 꼭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군대가 어디 있을까? 내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군대가!

백색성에는 여씨 가문, 청룡회, 그리고 막씨 가문의 잔여 세력이 전부인데, 그중 시스템이 계획했던 청룡회와 막씨 가문의 지원은 받지 못하게 됐어.

이 세 세력 외에는 병마를 끌어다 쓸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두변은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짚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초집중 상태로 정신을 맑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그의 뇌리에 빠르게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장면은 그의 기억이 아닌 견사 대사의 기억이었다.

“맞다.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흉악하고 잔인한 군대가 하나 있어! 누구에게서 병마를 빌리지 않고, 나만의 군대를 만들 수 있어! 진정한 나만의 군대를!”

두변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그는 정신이 번뜩 들어서 흥분한 모습으로 이위를 바라보았다.

이위가 물었다.

“어디서요?”

두변이 대답했다.

“흑애(黑崖) 감옥에서.”

사람들이 경악했다.

흑애 감옥이라고? 거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미친놈들이 갇혀있는 곳인데?

무공이 막강한 천마교 신도, 마교 무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처음엔 막씨 토사가 그들을 가뒀는데, 이후에 여씨 토사에서도 그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몇백 명의 마교 광신도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모두 무도 고수인 데다, 꼭 정신 교육을 받은 것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었다.

몇백 명의 마교 광신도들은 전장에 나서기만 하면 사람을 뜯어 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맹수가 되었다.

한때 천마교가 제국의 서남을 종횡할 때, 그들은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잔혹한 수단으로 적들을 죽였다.

대녕 제국, 막씨 토사, 여씨 토사가 차례로 몇만 대군을 보내서 그들을 소탕하는 데만 족히 수십 년이 걸릴 정도였다.

여씨 토사는 마지막까지 남은 몇백 명 천마교 신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그들을 교화하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천마교 광신도들은 죽임을 당하지도 않은 채, 흑애 감옥에 갇힌 지 10여 년이 넘었다.

두변이 물었다.

“막씨 가문이 꽤 오래 백색부를 통치했으니, 흑애 감옥도 그때 만들어진 거죠? 흑애 감옥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습니까?”

막야가 대답했다.

“알고 있기야 하지만, 소주인. 정말로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들은 미치광이들입니다. 마교 광신도들이라고요.”

두변은 백색부 같은 곳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여씨 토사와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천마교 광신도들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이 세상은 미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일지도 모르죠.”

막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육친도 몰라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소주인께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그놈들이 소주인을 보자마자 공격할 수도 있다고요.”

“아닙니다. 내겐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습니다.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죠.”

몇백 명 천마교 광신도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잔혈방, 여씨 토사가 가진 군대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극도로 흉악한 군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흑애 감옥으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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