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장. 결말이 보이는 비극
저놈들은 뭐야? 동창 무사복을 입고 있는데? 내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까 계림에서 데려온 무사는 아닐 텐데?
그럼 뭐야. 땅에서 솟아난 놈들인가?
아무렴 어때. 두변 저놈에게 몇백 명 무사가 있다고 해도 결과는 같아. 나도 몇백 명 무사가 있고, 수비에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저놈들을 해치우는 건 시간 문제지.
“전원 집합하라. 전투를 준비한다.”
장소가 명령했다.
잠시 뒤, 장소의 몇백 명 무사가 공격진을 치고 담장 뒤로 대열을 갖췄다.
“죽여라!”
“죽여!”
두변과 장소가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구 동창 천호소 안에 있던 장소의 무사들이 천마혈군을 향해 화살 비를 쏘아냈다.
두변의 천마혈군 무사들은 일제히 방패를 치켜들고 거북이가 된 것처럼 방패진을 쳤다. 빈틈없는 방패진 때문에 장소의 무사들이 쏘아낸 화살비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6백 명 천마혈군은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방패를 들고 멈추지 않고 전진했고, 그렇게 막힘 없이 구 동창 천호소 안으로 진입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여라!”
두변이 명령했다.
구 동창 천호소 안으로 들어간 6백 명 천마혈군이 빠르게 방패를 내리고 돌격진으로 대열을 바꿨고, 눈 깜빡할 사이에 장소의 무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라, 장소의 무사들은 허둥대느라 대열을 유지하지 못했고, 천마혈군은 수십 개의 소부대로 나뉘어서 기계적으로 적을 찔러 죽였다.
천마혈군은 서로를 엄호하고 교대하며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천마혈군은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오직 살기만 있을 뿐 아무런 망설임도 걱정도 없었다.
장소의 무사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잘려나가는 벼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짧디짧은 일각의 시간이 지나고, 전투는 끝났다.
장소의 몇백 명 무사가 구 동창 천호소의 바닥을 가득 메웠고, 한 명도 빠짐없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두변이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속으로 말했다.
꿈속 시스템, 봤죠? 난 당신들이 없어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겼다고요.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뭐야. 내가 시스템을 창피하게 하면 안 되나?
몇 초가 지나도 대답이 없었고, 기이한 불빛도 나타나지 않았다.
두변은 명상을 멈추고 눈을 떴다.
아직 내가 시스템을 불러낼 정도는 아닌가 보네.
두변이 다시 구 동창 천호소 안에 발을 들였을 때, 그의 발치에는 장소의 무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피바다가 된 천호소 안으로 들어온 두변은 변절자 장소에게 다가갔다.
장소는 천마혈군 병사들의 손에 붙잡힌 채 무릎이 꿇려 있었다.
장소는 악랄한 표정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웃음 지었다. 그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두변이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가 가까이 왔을 때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두변이 옆으로 살짝 피했다.
변절자 장소가 냉랭하게 말했다.
“두변! 네가 이 변태 같은 군단을 어디서 만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넌 지금 날 이겼다고 생각하고 무척 득의양양할 테지. 맞지?”
두변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장소가 이어서 말했다.
“백색부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나? 괜히 깔짝거리면서 자기가 이겼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작은 승리를 거뒀다는 건, 넌 곧 백색부에서 없어질 거라는 뜻이라고. 네가 이 싸움에서 졌다면 여씨가 네 목숨만은 살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렇게 이긴 이상, 넌 죽음을 면치 못해.”
두변은 속으로 장소가 한 말에 동의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색부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로 이기면 안 된다. 패배만이 살 길이다.
누구든 만에 하나 백색부에서 이기게 된다면, 여씨는 가차 없이 열 배의 힘으로 그 사람을 찍어 눌러서 없앤다.
이곳은 그들의 천하이기 때문이다.
장소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나를 죽이고 이곳 천호소를 되찾게 돼서 네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지? 하지만 너는 승리의 축배를 들 시간도 없을 것이다. 천도회가 바로 네놈을 죽이러 올 거니까. 네겐 기껏해야 몇백 명이 다겠지만, 천도회에는 몇천 명, 그리고 백색부 참장의 병력 몇천 명이 있다. 만 명이 넘는 병력을 어떻게 6백 명으로 막아? 어떡할 거야? 달걀로 돌을 치는 격이잖아?
두변! 멍청한 두변! 죽을 준비나 해라. 너는 나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일 뿐이야. 하하하하. 네가 나를 이긴 게 뭐 어때서? 네놈에게 내가 살려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줄 알았어? 실패자의 모습으로 졸렬하게 네게 목숨을 구걸하길 바랐어? 꿈 깨. 나는 절대로 네게 살려달라고 빌지 않아. 네가 거둔 짧은 승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뼈저리게 느껴보라고.”
두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장소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그 눈빛 뭔데? 내가 여씨에게 투항한 걸 질책하는 눈빛이야? 넌 고귀한 선택을 했으니까 내 배신을 책문하려고? 그런 건 꿈도 꾸지 마라. 넌 내가 뭘 겪었는지도 모르잖아!”
두변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난 그저 너를 동정할 뿐이다. 넌 백색부에 오는 게 아니었어. 다른 곳에 있었다면, 넌 무너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겠지. 하지만 백색부에서는 좌절하게 되면 죽음, 아니면 적에게 무릎을 꿇는 것뿐, 다른 선택지는 없어. 네가 여씨에게 무릎을 꿇은 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모두에게 죽을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니까.”
장소가 흠칫 몸을 떨었다.
두변은 그를 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순간, 줄곧 그토록 강한 모습만 보이던 장소가 몇 년 동안 꾹꾹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나도 정말 최선을 다했어.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내가 패배했을 때, 나도 내 수하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내 목을 그었지만, 충분히 단호하지 못했어. 여기 내 목 좀 봐, 여기 내 목에 남은 흉터가 그걸 증명해!”
장소가 울부짖었다.
두변은 장소의 목에 커다랗게 남겨진 자살의 흔적을 이미 발견했다. 장소는 보여주기식으로 죽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꽤 깊게 칼을 써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을 것이다.
당시에 진심으로 의리를 지키려 했지만, 칼을 쥔 마지막 순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손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죽지도 못하고 여씨의 포로가 되었다.
장소가 이토록 광기 가득한 모습으로 두변을 미워하는 이유는 왜일까. 질투 때문이 아니라 괴로움 때문이었다.
변절자가 원래의 동지를 만나게 되면, 엄청난 열등감에 휩싸이게 된다. 장소는 그런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더욱 잔혹하고 광기 어린 모습으로 빠르게 동지를 죽이거나, 그 동지도 변절자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래야만 자신이 열등감에 잠식되지 않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은 이제 더는 선택지가 없어서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될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장소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너무도 순탄하게 승승장구해서 좌절이란 걸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좌절하게 될 때,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죽음, 혹은 굴복뿐이었다.
만약 백색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있었다면, 장소는 아마 엄당의 건실한 기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소는 자기 욕심 때문에 백색부에 오게 되었고, 그가 백색부로 오게 된 건 결말이 보이는 비극이었을 뿐이다.
“날 죽여줘. 제발 날 죽여줘. 그날 내가 끝까지 나를 죽이지 못한 게 너무도 후회스러워! 내가 그날 죽을 수 있었다면, 내 동지들과 주인께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렸을 텐데. 정말 후회돼. 너무도 후회돼.”
장소가 목놓아 울면서 말했다.
두변이 품에서 영설 공주가 선물한 황금설 단검을 꺼냈다. 그는 장소의 목에 난 흉터에 단검을 갖다 대고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빠르게,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줄 테니.”
장소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잠깐만. 두변, 이번 일은 네가 잘못한 것이다. 너는 청룡회주 계청주의 지지를 받은 뒤에 싸움을 벌여야 했어. 백색부에서 여씨와 천도회에 저항할 만한 세력은 계청주밖에 없어.”
두변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워낙 고집이 세서 말이지. 여씨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나도 참지 않고 맞서 싸웠을 뿐이다.”
“그럼 넌 끝장난 것이다. 진짜로. 그해 나도 너와 똑같은 상황이었어.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일로 내게 시비를 걸었는데, 내가 화를 누르지 못하고 그들에게 맞서 싸웠지. 그땐 여기 있는 어떤 무도 파벌과 싸웠었는데, 나는 몇백 명 동창 무사를 이끌고 그들을 무찔렀었다. 당시에 나도 잠깐 득의양양했지. 지금의 너처럼 승리의 기쁨을 잠시나마 느꼈고.”
장소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그리 오래 만끽하지도 못했다. 백색부 참장이 갑자기 한 병사가 실종되었다면서 동창 천호소를 찾아와서 내게 병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더군. 그들이 강제로 천호소를 조사하겠다길래 난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백색부 참장이 병사 2천 명을 데리고 동창 천호소를 공격했다. 완전무장한 2천 명 병사에다가 대형 군무기까지 동원되었던 터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어. 그날 난 패배했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죽지 못했고, 포로가 되었다가 결국 동창을 배반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용감하던 장소가 아니라, 비겁하고 간사한 주구가 되고 말았다.”
백색부 참장이 실종된 병사 한 명 찾겠다고 전투를 벌였다니, 꼭 현대 지구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은가.
백색부 참장 염효(閻梟)는 관직 사회에서 비교적 신비주의인 사람이었다. 두변은 물론이고, 동창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비록 많은 정보가 없지만, 두변은 그가 백색부의 몇 대 거물 중 한 명이라는 것과 그가 7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린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광서의 다른 참장은 모두 3품 무장인데, 오직 염효만 대녕 제국 부장군 직함이 있었고, 참장을 겸하는 종2품이었다. 이는 광서 순무와 동등한 품급이었다.
염효 외에, 백색부의 지부도 대녕 제국 예부(禮部)의 명예 관직인 종3품을 하사받았다.
백색부의 참장과 지부에게 이렇게 높은 관직을 준 것으로도 대녕 제국이 제국 변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백색부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염효를 꼭 조심해라. 나는 포로가 된 뒤에 투항한 거지만, 그자는 자발적으로 여씨에게 빌붙은 자다. 7천 병마를 그가 홀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다. 염효는 북명검파 출신이고, 경성 무도원 수석 졸업생이어서 무공 수준이 무척 높다. 염효의 부인은 여여해의 여동생인지라, 여씨가 서남 토사 연맹을 통일한 뒤에 성화제국을 건립할 때, 분명히 염효를 왕후(王侯)에 봉할 것이다. 염효는 절대로 여씨의 협박을 못 이겨서 투항한 대녕 제국의 장수가 아니야. 그는 여씨와 협력하는, 야망에 가득 찬 군벌이다. 절대로 그를 좋게 봐선 안 돼.”
장소가 말했다.
“이런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다.”
두변이 말했다.
원래 두변은 염효라는 자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었다. 그는 자신이 장소를 죽이면, 자신을 죽이러 올 사람은 천도회의 이능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소의 말에 따르면, 뒤이어 올 사람은 백색부 참장 염효인 모양이었다.
대녕 제국의 종2품 무장이 두변을 죽이러 오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염효가 두변을 죽이러 와야 이 사건이 대녕 제국 내부의 갈등이라고 보이기 때문이었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 이건 무장 집단과 엄당 집단 간의 싸움이지, 여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어야 했다.
어쩌면 그래서 백색부 참장 염효가 여씨와 협상할 자격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해서 여씨, 홍하회, 천도회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백색성의 몇 대 거물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