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장. 미안하다
“정말 금방 이리로 올 것이다. 분명히 염효가 너를 죽이러 올 거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서 계림으로 돌아가면, 네가 살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여기에 계속 있다간 죽고 말아.”
장소는 수모의 가면을 벗은 뒤로는 마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되찾으려는 듯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괜찮다. 그놈을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까.”
두변이 말했다.
“그럴 리 없어. 염효의 병력은 네 병력의 열 배가 넘는다. 염효의 무공 수준도 무척 높아서 네가 그를 공격할 틈도 주지 않아. 그가 너를 죽일 생각이라면, 일격필살로 싸움을 끝낼 것이고, 네가 가진 수백 명 무사를 순식간에 죽여버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모두가 살 수 있다.”
장소가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지만, 두변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는 이 난관을 헤쳐나갈 방법이 있다. 내가 방법이 있다면 있는 것이다.”
“아, 내가 너무 웃기지? 뭐 하는 놈인가 싶고, 염치도 없고 가엾다고 느끼겠지?”
장소의 눈빛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다.”
두변이 말한 뒤, 빠르게 그의 목을 단검으로 그었다.
장소의 목에서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순간 본능적으로 목을 움켜쥐려다가 이내 손을 다시 아래로 떨궜다.
“윽, 으윽.”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목구멍에서 의미 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변, 미안하다. 내가 이문회 주인을 실망시켰다.’
장소는 유언을 남기고 싶었지만, 변절자로서 그 어떤 말도 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숨이 멎은 뒤에도 눈을 감지 못했다.
두변이 손을 뻗어서 그의 눈을 감겨주려던 순간, 장소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계표표가 말했다.
“이 사람은 백색부에 오지 말았어야 해. 자기가 바라는 이상과 본인 능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거지.”
기음음이 뒤에서 갑자기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더니 아이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아이참. 난 아직 어린아이라서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광경 못 본단 말이에요.”
두변은 실소하고 말았다.
‘적당히 좀 합시다. 누구보다 흥미진진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잖아요. 장소가 완전히 죽은 뒤에야 눈을 가렸으면서. 그리고 댁은 몇십 년 동안 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잖아요!’
혈관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이 죽을 때 한 말은 진실된 말이라고 하잖아. 우리도 장소가 한 말을 참고해서 방비해야 해.”
계표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효라는 사람은 아주 비밀스러운 사람이야. 평소 밖에 잘 나오지도 않아서 그의 행보를 파악할 수가 없어. 그의 무공 수준이 내 아버지와 이도전의 바로 아래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지만, 그가 결코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건 확실해.”
두변이 기대에게 물었다.
“기대, 천마혈군 6백 명으로 얼마나 많은 수의 정예병을 무찌를 수 있지?”
기대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만약 적군에게 대형 군사 병기가 없다면, 한 명당 네 명을 무찌른다는 가정하에 약 2천 명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6백 명으로 2천 명을 무찌를 수 있다는 건 무척 대단한 일이지만, 염효에게는 7천 병마와 무수히 많은 대형 군사 병기가 있었다.
혈관음이 말했다.
“염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우리에게 재정비할 틈도 주지 않을 거야. 어쩌면 우리에게 단 하루도 주지 않겠지.”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염효였다고 해도, 절대로 내게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병마를 이끌고 오겠죠.”
혈관음이 물었다.
“조금 전에 네가 장소에게 했던 말은 사실이야?”
“네, 사실이에요.”
두변이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서 명령을 내렸다.
“어서 전장을 정리해라. 이곳에 있는 시신을 모두 불태우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바로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능어가 수십 명 무도 고수를 데리고 천리마를 탄 채 천천히 천호소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능어는 여느 때와 같이 남자 옷차림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요염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두변의 뒤에 있던 천마혈군에게 닿는 순간, 이능어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두변, 정말로 네놈을 다시 보게 만드는구나. 네가 기껏해야 막씨 가문의 그 머저리 공주를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흑애 감옥에 가서 이 천마교 광신도들을 네 것으로 만들다니.”
이능어의 말투에는 두변이 이토록 우수한 천마혈군을 얻었다는 것에 대한 시샘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떻게 해낸 거지? 기음음 저년을 어떻게 했길래 매수했어? 우리 여씨가 그렇게 많은 공을 들였는데도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던 기음음을 어떻게 설득했냐고! 시백호 주제에 저년에게 뭘 줄 수 있었는데?”
매수? 항복? 이 두 단어만 들어도 너희 여씨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는데?
기음음이 지금은 회춘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소녀가 되었더라도,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서남을 평정하던 무시무시한 악마였다.
그녀가 한창 서남을 종횡할 때 여여해와 계청주는 아직 두각도 드러내지 못하던 자들이었다.
아무리 기음음이 약해졌다고 해도 한때 천하를 제패하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항복시킨다는 건 너무도 우습고 건방진 생각이리라.
“네놈이 천마군을 얻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네가 장소를 죽인 건 대단하다고 해주마. 하지만 넌 내 개새끼 한 마리를 죽인 것에 불과해. 네겐 6백 명이 전부겠지만, 우리 천도회에는 몇천 명, 그리고 백색부 참장에게도 몇천 명이 있다.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한 시진?”
이능어가 사악하게 웃으면서 두변의 뒤에 서 있던 기음음을 내려다보았다.
“참 귀여운 소녀네. 염효 이모부께서 딱 너 같은 어린 애들을 좋아하시던데. 두변, 저 애를 이모부께 장난감으로 선물해드리면 네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능어를 바라보던 두변의 눈빛이 섬뜩해졌다.
기음음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염효라는 아저씨가 왜 나를 장난감으로 삼아? 나를 어떻게 가지고 논다는 거야?”
이능어가 기음음의 말을 무시하고 웃으면서 두변에게 말했다.
“두변, 제국의 사람이 백색부에 오게 되면 몇 번을 싸워도 져야만 한다. 그럼 목숨이라도 건질 테니까. 그런데 네놈이 승리를 한 번 거뒀다는 건, 네 제삿날이 곧 오늘이라는 뜻이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지. 곧 백색부 참장부에서 대군을 보내서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이건 대녕 제국 내부의 무장 집단과 엄당 사이의 갈등일 뿐, 우리 여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할 말을 다 한 이능어는 수십 명 무도 고수와 함께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혈관음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두변이 옅은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누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 난관을 헤쳐나갈 방법이 있다고 한 거면, 방법이 정말로 있는 거니까. 비장하지도, 누가 다치거나 죽지도 않고,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어요.”
‘역시 예상대로 빨리 왔군.’
두변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천호소 밖을 내다보았다.
이능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 부대가 천호소 앞에 도착했다.
백색부의 몇 대 거물 중 하나인 염효의 기마병이 ‘염’ 자가 쓰인 군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기마병 수십 명의 우두머리인 기마 부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창 시백호 두변, 안에 있느냐?”
두변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참장부의 기마 부장이 말했다.
“우리 참장부에서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 동창이 그 병사를 숨겨줬다는 제보를 듣고 이리로 왔으니, 당장 동창 천호소 안의 모든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라. 천호소 안을 샅샅이 뒤져야겠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순순히 명령을 따르도록 해라.”
‘이런 젠장.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나를 죽이러 온 건 예상했던 일이니까 괜찮아. 그런데 성의있게 이유 좀 바꾸면 안 되냐? 장소를 상대할 때도 그 이유를 썼다면서, 지금도 똑같은 이유를 대고 있어?’
두변이 이를 부득 갈았다.
“안에 있는 엄당 주구 놈들은 당장 밖으로 뛰어나와라! 지금부터 천호소 안을 수색한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백색 참장부 몇천 대군의 손에 참혹하게 죽을 것이다!”
참장 기마 부장이 소리쳤다.
바로 이때, 두변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기이한 불빛이 반짝였다.
꿈속 시스템과 갈라선 시간이 불과 며칠이었지만, 두변은 꽤 오랜만에 기이한 불빛을 보는 듯했다.
꿈속 시스템이 재가동되었다!
‘숙주, 미안했다.
네 활약은 괄목상대할 만하다. 내 도움 없이도 이번 싸움에서 이기다니. 내가 이전에 했던 말과 생각을 일부분 고치도록 하겠다.’
두변은 속으로 이제 ‘그렇지만!’이라는 말이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네가 천마혈군을 얻게 된 건 네 무모함과 우연 덕분이지, 그걸로 네 능력을 증명할 순 없다. 내 말에 동의하지?’
‘동의하죠. 하지만 그걸 다 내 무모함과 우연으로 치부하면 안 되죠. 내게 인간성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있었기에 견사 대사의 기억을 잘 활용한 겁니다. 다른 지구에서 제가 얼마나 많은 여인과 교제했는데요. 거기서 쌓인 경험을 무시해선 안 되죠. 제가 제일 잘하던 게 바로 여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거였다고요.’
‘그래도 그 결정이 도박이었고, 모험이었다는 건 변함없다. 네가 한 모험과 도박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내가 계획했던 노선대로 갔다면, 좀 더 안정성이 높았을 테고, 계청주의 지지를 받았다면 모든 게 순조로웠을 것이다. 백색부에서 입지를 다지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고, 천도회 이도전, 그리고 백색부 참장 염효도 너를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네. 그 길이 안전하기야 했겠죠.’
‘그런데 너는 아둔하게도 감정에 휘말려서 내가 정해준 길을 가지 않았다. 넌 절대로 운중사라는 신분을 버려선 안 됐고, 네가 두변이라는 걸 밝혀선 안 됐어. 내가 계획했던 노선에서 완전히 벗어났기에 계청주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계표표를 운중사에게 죽어도 시집 못 보내겠다는 계청주를 어떻게 설득했을 건데요?’
‘그것도 다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는 건 무의미하지. 네가 멍청하게 그 길을 망쳤으니까. 계표표는 도구에 불과했는데, 너는 고작 도구를 위해서 내가 짜놓은 노선을 망치지 않았냐.’
두변은 기이한 불빛의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자신은 이미 시스템의 도움 없이 막강한 군대를 얻었고, 백색부의 첫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승리를 거뒀으며, 변절자 장소까지 죽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아직도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두변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천마혈군이 막씨 가문의 잔여 세력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죠. 천마혈군은 최정예 군대니까요.’
‘그럼 네게 비밀 하나를 알려주지. 방씨 집단의 배후에 있는 더욱 막강한 존재는 해외 왕국에서 천마혈군 같은 강력한 인간 병기를 십만 명이나 가지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꿈속 세계는 입만 열었다 하면 두변의 두피를 저릿하게 할 정도로 놀라게 만들었다.
방씨 집단 배후에 또 누가 있다고? 방씨 집단만 해도 사람이 무력해질 정도로 강하잖아. 대녕 제국에서 문관 집단이 거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로 강력하잖아!
그런데 거기다 해외 왕국이 또 하나 더 있다고? 천마혈군 같은 인간 병기가 십만에 달해? 이 세계는 정말 파도 파도 보스급 악당이 계속 나오는군.
기이한 불빛이 말을 이었다.
‘뭐 물론. 이건 나중의 일이지만 말이야. 네가 가진 천마혈군도 사실 내가 계획한 노선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음음이 죽은 뒤에 네가 천마혈군을 가질 예정이었지.’
‘기음음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13개월 남았다.’
두변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기음음은 그저 마냥 귀여운 어린 소녀였다. 아이의 예정된 죽음이 몹시도 속상했다.
기이한 불빛이 물었다.
‘막씨의 잔여 세력을 안중에 두지 않던데, 넌 막한을 무시하는 거냐?’
‘네, 그 여자의 잔혈방도요.’
‘막한은 네게 계표표보다 중요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