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장. 연기를 하더라도 제대로
두변은 깜짝 놀랐다.
머리가 어떻게 된 그 여자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자기가 여왕인 줄 아는 그 멍청한 여자 말이에요?
기이한 불빛이 이어서 말했다.
‘막한의 중요성은 때가 되면 네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막한이라는 패를 완전히 버리지 말도록 해라.’
두변은 속으로 막한이 예쁘긴 했지만, 자기가 여왕인 줄 아는 정신병자가 어째서 계표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동창을 배반한 세력을 성공적으로 없앴지만, 앞으로 닥칠 위기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너는 백색부 참장 몇천 대군의 공격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네가 숨을 쉴 틈도 주지 않을 것이다. 천마혈군이 강한 건 맞지만, 일당 십으로 싸울 순 없다. 그들에게 의지해서 백색부에서 살아남을 순 없다.’
‘네, 알고 있어요.’
‘내 도움이 없었지만, 네가 운을 믿고 모험해서 천마혈군을 얻게 된 건 인정한다. 이번 전투에서 네가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내가 다시 네게 기회를 주고자 나타났다. 난 네가 백색부 참장의 난관을 순조롭게 넘길 수 있도록 널 도와줄 수 있다. 그의 몇천 대군을 무찌르면서 말이지.’
‘대가는 뭡니까?’
‘대가는 똑같다. 오늘부터 너는 내 어떤 명령도 거역해선 안 되고, 내 명령을 거역하는 즉시 담판의 여지도 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앞으로도 내 운명을 당신들이 주도할 것이고, 나는 당신들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말이네요?’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뭐,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럼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여전히 그 태도일 줄 알았다. 알면서도 나타난 내가…….’
기이한 불빛이 말끝을 흐렸다.
두변은 기이한 불빛이 말을 이으기를 기다렸다.
‘아무튼, 네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다. 하나는 지금 당장 네 패배를 인정하고, 내가 앞으로 내릴 그 어떠한 명령도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내가 계획한 길만 가야 하고, 내가 희생하라는 사람을 전부 희생해야 한다. 설령 그 사람이 너와 가장 친밀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두변은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뭐 거의 꼭두각시 수준도 아닌데?
‘두 번째 선택지는 네가 내 도움 없이 백색부 참장 난관을 넘기고, 그의 몇천 대군을 무찌르는 것이다. 네가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다면, 네 능력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고, 네 진정한 천재성과 운을 증명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나는 내가 계획했던 노선이 정말 맞았던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이고, 전략을 바꿔보도록 노력하겠다.’
기이한 불빛이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때가 되면, 넌 더 이상 꼭두각시가 아닌 운명의 주도자가 되는 것이고, 난 너의 보조자가 될 것이다.’
두변은 기이한 불빛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꿈속 세계는 두변에게 줄곧 하느님 같은 존재였고,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보조를 해줄 테니, 그에게 운명을 주도하라고 한다? 정말 운명의 주도권을 주겠다고?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네게 더 많은 에너지를 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네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어서 한 가지 엄청난 기능이 추가될 것이다.’
두변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꿈속 시스템이라는 게 업그레이드까지 가능한 건 알지 못했고, 거기다 엄청난 기능까지 추가된다고 하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전에 시스템의 도움 없이 이번 백색부 참장 수천 대군을 무찔러야 한다.
‘참고로 우리는 막대한 에너지를 써서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제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번 도전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이 도박을 하는 대가는 감히 계산할 수도 없는 정도이고,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꼭, 꼭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두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하겠습니다.’
‘첫 번째 선택지를 선택하는 게 훨씬 더 안정적이지 않나? 네 말대로 네가 꼭두각시가 되긴 하겠지만, 위험하진 않잖아.’
‘네, 그래도 내 선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 혼자서 이 난관을 헤쳐나가서 내 능력을 증명하고, 당신들의 신뢰를 얻어내겠어요.’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한다면 난 다시 네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난 네가 이 임무를 완전히 끝낸 뒤에 다시 나타날 것이고, 새로 업그레이드된 시스템으로 널 만나러 올 것이다. 그땐 네가 운명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이 임무를 진행하는 도중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네가 죽는다고 해도 너를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절체절명의 시기에 내가 나타나서 네 목숨을 구해줄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두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백색부 참장 염효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그런데도 두 번째 선택을 하겠다고? 정말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두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다음에 또 보지. 아, 이번이 영원한 작별이 될 수도 있겠군.’
기이한 불빛은 그렇게 두변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두변은 명상에서 깨어났다.
백색부 참장 기마 부장이 외쳤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천호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참장부에 대한 반역으로 판단해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두변이 조용히 기마 부장을 노려보기만 했다.
두변의 뒤에 서 있는 6백 천마혈군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백색 참장부 기마 부장이 수십 명 기마병을 이끌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동창 천호소를 샅샅이 뒤져라! 앞을 막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죽여버려라! 돌격!”
수십 명 기마병이 천호소를 향해 돌격했다.
쿵, 쿵, 쿵, 쿵.
두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창 천호소는 제국의 존엄을 대표한다. 누구든 함부로 천호소를 쳐들어온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전투를 준비해라.”
몇백 명 동창 천마혈군이 화살을 올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기마 부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두변을 노려보면서 외쳤다.
“돌격!”
참장부의 몇십 명 기마병이 동창 천호소의 대문을 깨부수고 천호소 안으로 쳐들어갔다.
두변은 정말로 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다른 선택지 같은 걸 주지 않았다.
“죽여라!”
두변이 명령했다.
슉, 슉, 슉.
몇백 명 천마혈군은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활시위를 놓았다.
시커먼 화살 비가 참장부의 몇십 명 기마병을 향해 날아갔고, 파도가 거대한 암초에 부딪혀서 힘없이 흩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던 기마병은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전투마는 너무 소중한지라, 천마혈군은 말에게 화살이 가지 않도록 사람만 쐈다.
두변이 손짓하자, 천마혈군 서른 명이 앞으로 나가서 전투마를 데려왔다.
“참장부에서 선물해주신 말은 잘 쓰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문밖에 있던 기마 부장이 분노하긴커녕 웃음을 터트리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기마병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가 냉소하며 두변에게 말했다.
“두변, 정말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그리고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백색부 동창이 우리 참장부의 병사를 잡아들이고, 참장부의 수색을 거절하면서 기마병 수십을 죽였다. 두변 이놈이 양심도 없이 날뛰니, 백색 참장부는 더는 두변의 만행을 두고 볼 수만 없다. 나는 참장부를 대표하여 백색 동창 천호소를 향해 선전포고한다. 황제 폐하, 백색부의 정의를 위해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참장부를 헤아려주소서.”
기마 부장이 품에서 신호탄 같은 영전(令箭: 군사 명령을 전달할 때 신표信標로 사용하는 특수한 용도의 화살)을 꺼내서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파바바박!
화살이 하늘 높이 올라가더니, 허공에서 붉은 불꽃이 되어 터졌다. 아마 수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변이 속으로 냉소했다.
연기를 하시려면 제대로 하셔야죠. 이미 군대를 모아놨으니,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이 그냥 화살 하나로 시작을 알리는 겁니까?
백색부 서쪽 성문 밖.
참장부의 5천 대군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이곳에는 1천 기마병, 4천 보병, 십여 대 투석기, 수십 대 대형 강노, 그리고 무수히 많은 돌포탄과 화유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토끼 한 마리 잡겠다고 사자와 호랑이까지 푸는 격이었다.
5천 정예 대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대기중이었다.
대열을 갖추고 쭉 늘어선 5천 대군은 성문 앞에서 보았을 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파바바박.
백색성의 허공에서 영전이 터지자, 천도회주 이도전의 딸 이능어가 웃었다.
“이모부. 제가 말했었잖아요. 두변은 고집불통인 멍청한 놈이라고요. 그때 장소란 자와 똑같잖아요. 조금만 시비를 걸어도 제 분에 못 이겨서 달려드는 꼴이요. 당장 사람 죽이는 것에 눈이 멀어서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 예상도 하지 못하는 게 참 우스워요.”
백색부의 거물, 제국의 2품 무장, 야심 가득한 군벌 염효는 이능어의 말을 듣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대군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엄당의 주구를 없애라. 출발!”
염효가 명령을 내리자, 5천 대군이 위풍당당하게 백색성 안으로 행진했고, 두변이 있는 천호소를 향해 갔다.
백색성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군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고, 창문과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몇 리 떨어져 있는데도 땅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5천 대군의 발걸음 소리와 말굽 소리가 무서운 굉음이 되어 점점 더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했다.
동창 천호소는 폐허가 되기 직전인 건물인지라, 이곳에서 제대로 된 방어선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대군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죽음의 신이 다가오는 소리처럼 들리자, 계표표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두변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서 아버지께 부탁해볼게. 우리가 청룡회에 들어가서 잠시 피신하고, 그 대가로 내게 뭘 요구하든 다 들어준다고. 우리 몇백 명이 청룡회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염효의 군대는 우릴 절대 건드리지 못해.”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계표표가 다시 말했다.
“천마혈군이 2천 명을 무찌를 수 있다는 건 맞지만, 상대는 우리의 열 배야. 게다가 대형 군사 무기까지 동원할 텐데, 이대로 저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면 우린 천마혈군을 전부 잃게 될 수 있어.”
“표표 누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방법이 있다고 한 거면, 정말로 방법이 있는 거니까요. 나를 믿고 지켜봐 줘요.”
염효의 대군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지면의 진동도 점점 거세졌다.
이때, 대종사 계청주가 갑자기 천호소 앞에 나타났다.
“표표, 이전의 일은 다 잊고, 지금이라도 아비와 함께 가자.”
계표표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버지,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두변과 그의 군대를 청룡회에 숨겨주세요. 이번 일만 도와주신다면, 아버지께서 뭘 원하시든 다 하겠어요. 절 누구에게 시집보내셔도 괜찮아요.”
계청주가 애틋하지만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계표표를 바라보다가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귀신에게 마음을 홀려버렸구나. 네 마음대로 하거라!”
계청주가 다시 분노하며 소리쳤다.
그는 계표표의 목숨이 걱정돼서 온 게 아니었다. 염효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표표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표표가 주화입마 상태에서 전투에 임하게 된다면, 근맥이 상하다 못해 다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두변이 계표표를 일으키면서 말했다.
“표표 누이, 일어나요. 내가 괜찮을 거라면 정말 괜찮은 거예요.”
“엄당의 주구놈! 만약 내가 중립을 유지하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네놈을 갈기갈기 찢었을 것이다!”
계청주가 두변을 노려보면서 소리치더니, 소맷자락을 휙 털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사이 백색부 참장 염효의 대군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를 달리던 기마병의 시야에 동창 천호소가 들어왔다.
“엄당 주구놈들이 감히 우리 참장부를 모욕했다. 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라!”
“엄당 주구놈들을 죽이자.”
기마병 부대가 큰소리로 외치면서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이때, 참장부 기마병 부대가 오는 쪽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기마병 부대가 나타났다.
총 네 개의 소부대로 나뉜 기마 부대는 왕의 깃발을 치켜들고 빠른 속도로 천호소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