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장. 왜 이런 시련을
염효가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계표표를 쳐다보았다.
‘주화입마 상태에 빠졌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지?’
계표표는 성원단을 먹고 몸을 회복하긴 했지만, 특별하게 무공이 더 늘진 않았다.
하지만 흑검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강기가 기존의 7할에서 8할 5푼으로 상승했다.
게다가 염효가 연달아 십여 명을 날려 보내느라 현기 내력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원래의 무공을 되찾은 계표표는 염효보다 무공 수준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염효는 시작하자마자 계표표에게 밀리고 말았다.
피를 토한 그는 힘겹게 절단된 칼을 집어 들었다.
진정한 고수는 일격필살로 승부를 낸다.
계표표도 무공 고수이지만, 그녀는 일격필살 방식이 아닌 강맹(剛猛) 방식으로 무공을 수련했다.
일격필살 방식은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지만, 단 두 번의 공격으로 현기 내력이 전부 소진된다.
강맹 방식은 전장에서 칼을 수백 번 휘두르는 사람에게 적합했다.
계표표는 제국에 보답하기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강맹 방식만을 고수해왔다.
염효도 무장이니, 당연히 일격필살이 아닌 강맹 방식으로만 무공을 수련했다.
계표표가 유리한 건 맞지만, 염효도 그녀보다 무공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승부가 갈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용 두 마리가 한데 휘감겨서 싸우는 것처럼 맹렬하게 칼을 부딪쳤고, 그들의 칼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현기의 충격으로 대지가 뒤흔들렸다.
콰과과광.
죽음의 불꽃은 아직도 피어나고 있었고, 사지가 온전치 못한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백색부 전체가 유래에 없는 공포와 충격에 휩싸였다.
천호소에서부터 전해지는 대지의 진동이 백색부 곳곳에 퍼졌지만, 그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집의 창문과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제발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면서 기도했다. 그들에게 이 싸움은 전투가 아니라, 천재지변보다 더 무서운 세계 종말의 날 같았다.
염효의 살아남은 병사들의 수도 점점 더 줄어들었다.
사실상 이 지경이 되었으면, 병사들은 군대고 뭐고 자기라도 살겠다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염효의 병사들은 눈앞의 광경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넋을 놓은 채 가만히 서 있거나, 정신줄을 놓고 실성해 버렸다.
그들의 눈에는 두변이 던진 죽음의 꽃이 너무도 악랄했고, 잔혹했다.
어떤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벌벌 떨면서 머리를 감싸고 하늘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자신들이 제국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늘이 노하여 자신들을 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도망치던 병사들은 머리 없는 파리처럼 제자리만 빙빙 돌다가 죽음의 포화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염효는 슬슬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칼을 휘두르는 게 힘겨웠지만, 계표표는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맹렬한 기세로 그를 몰아붙였다.
나중이 되자, 염효는 계표표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버거워졌다.
그제야 살아있어야 모든 게 의미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그의 용맹함을 완전히 압살해버렸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 어떤 부귀영화도 누릴 수 없다.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여여해의 매부일 것이며, 여씨 제국이 세워진 뒤에 왕후에 봉해지지 못한다고 해도 살길은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의부의 변까지 맛보면서 온갖 치욕을 겪었던 것처럼 여여해의 발을 핥으며 살아도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다시 재기할 날이 온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남의 변까지 맛볼 다짐을 한 참장 대인 염효에 비하면, 한신(韓信)이 남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건 치욕스러움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하하하, 드디어 두변이 죽었구나!”
염효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떤 사람들은 계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계략에 넘어가곤 한다.
계표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염효의 말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변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역시나 두변은 멀쩡하게 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계표표가 뒤늦게 다시 고개를 돌리는 찰나, 염효는 이미 십여 미터 후퇴한 뒤였다.
“퇴각하라! 전군 철수한다!”
염효가 뒷걸음질 치면서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명령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병사들은 이미 8할이 시체가 되어있었다.
‘벌써 이렇게나 많이 죽었다고? 왜. 도대체 왜? 내가 계표표와 싸운 지 일각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때, 두변이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파렴치한 반란군을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굳건히 문 앞을 지키던 90명 흑갑 돌격대와 천호소 담벼락에서 화살을 쏘던 천마혈군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원래 두변은 염효의 대군을 모조리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 염효와 그의 대군이 백성들을 학살했다. 그 무고한 백성의 수가 2천에서 3천이라니, 저런 금수보다도 못한 놈들은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염효가 놀라서 눈과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찰나, 계표표가 곧장 그를 향해 칼을 치켜들고 달려갔다.
염효는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끝인 건가. 하늘님!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오늘 이 자리까지 제가 얼마나 힘들게 올라온 건지 다 봤으면서, 제가 얼마나 많은 치욕과 희생을 견뎠는데. 두변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은 어째서 다 가질 수 있는 겁니까?
왜요, 도대체 왜요!’
염효가 눈을 부릅뜨더니 그의 눈가에 눈물이 아닌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같이 죽자! 천마혈해대법(天魔血解大法)!”
염효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의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천마혈해대법은 온몸이 극한으로 부풀어 오르게 되어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폭발을 일으키는 무공이었다. 이런 파멸적인 자폭의 위력은 계표표나 영종오도 버틸 수 없는 끔찍한 무공이다.
“표표, 어서 도망쳐요!”
두변이 다급하게 외쳤다.
두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염효의 시선이 두변을 향했다.
그는 같이 죽을 더 좋은 목표물을 발견했다는 듯이 한치의 지체도 없이 두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두변의 근방 몇 미터 이내까지 달려가면, 무공 수준이 높지 않은 두변을 완전히 박살 낼 수 있을 테니까.
이를 본 계표표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염효의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자기 목숨을 태우면서 달리는 염효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두변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계표표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근처에 있던 혈관음이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와 그대로 두변의 앞을 막았다.
그런데 커다란 핏덩이가 되어가는 염효를 본 두변은 당황하긴커녕 냉소를 지으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두변이 활을 꺼내고 화살을 얹고 활시위를 당겼다 놓는 모든 동작은 채 1초가 되지 않았다.
두변이 쓴 화살은 일반적인 화살이 아니라, 화살촉에 신비한 초록색 액체를 묻힌 화살이었다.
슈욱.
화살은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염효를 명중했다.
“멍청한 놈! 이깟 화살로 나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으냐?”
염효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쥐었다.
화살을 뽑으려던 염효는 화살에 찔린 곳과 화살을 쥔 손바닥이 빠르게 썩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그의 천마혈해대법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 이게 무슨 독이냐.”
염효가 격노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염효를 따라잡은 계표표가 곧장 흑검을 휘둘렀다.
계표표는 염효의 머리를 자르지 않고 사지를 절단했다.
백색부의 거물이자 조정을 배신한 대역죄인 염효는 사지가 잘린 채 바닥에 엎어졌다.
“아악. 으아악!”
한때 효웅이라고 평가받던 염효는 피바다에 얼굴을 묻은 채 처량한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 남지 않은 염효의 대군과 천마혈군은 한데 엉켜서 마지막 혈투를 벌였다.
그리고 잠시 뒤, 염효의 6천 대군은 한 명도 남김없이 전멸했다.
사방은 죽음으로 고요했다.
이겼다! 대승이다!
두변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고 명상 세계에 들어갔다.
‘시스템, 어때요? 잘 봤나요? 내가 백색부 참장 염효를 죽였습니다. 내가 해냈다고요!’
하지만 기이한 불빛이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혼자 힘으로 백색부 참장을 죽이면 다시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 내가 운명의 지도자가 되고, 시스템이 내 보조자가 되기로 하지 않았어?
두변이 시스템을 몇 번이고 더 불러봤지만, 기이한 불빛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두변은 하는 수 없이 일단 눈을 떴다.
이때, 사지가 잘린 염효가 움찔거리면서 두변을 향해 외쳤다.
“두변, 날 죽이지 말아라. 제발 나 좀 살려줘. 나를 참장으로 삼는 건 어떠한가? 내 군사 지휘력이 얼마나 뛰어난데, 이대로 날 죽이면 너무 아까울걸? 날 살려둔 걸 절대로 실망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제발 죽이지만 말아라.”
두변이 흠칫 놀랐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천마혈해대법으로 나랑 같이 죽자고 그 난리를 치더니,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빌어? 사지가 절단되었는데도 살고 싶어? 정말 질긴 놈이군.
저자가 시전한 무공이 천마혈해대법이라는 걸 떠올린 두변이 저도 모르게 기음음을 쳐다보았다.
기음음은 재빨리 두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면서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사실, 이 사악한 무공을 만들고 전파한 건 천마교주 기음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되어서 순진무구한 얼굴로 천마교주일 적에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절단된 곳을 지혈하고, 이놈의 목숨을 살려놓거라. 절대로 죽여선 안 돼. 간단한 응급처치 후에 광서 진무사부로 보내라. 이옥당 대인께서 이놈을 경성으로 압송하실 것이다.”
두변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기대가 대답했다.
염효는 대녕 제국의 가장 강력한 변절자는 아닐지라도, 가장 악질의 변절자이자 황제가 제일 증오하는 변절자였다.
두변은 황제가 염효를 직접 처단할 수 있도록 경성으로 보내기로 했다. 하루가 멀다고 안 좋은 소식만 듣던 천윤제에게 깜짝 선물을 보낸 것이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두변의 승리를 축하해줄 사람은 없었다.
두변은 직접 부엌에서 몇 가지 요리를 한 뒤, 자축의 의미로 함께 좋은 술을 마셨다.
천호소 안에 쓸 만한 탁자가 없는 탓에, 두변 등은 비교적 깨끗한 뒤쪽 연무장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며 만찬을 즐겼다.
몇백 명 천마혈군은 앞쪽에서 병사들의 시신을 깨끗하게 처리했다.
이때, 밖에서 익숙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계표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아 들었다.
소목지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천호소 안으로 들어오더니, 두변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두 형, 대승을 거둔 걸 축하합니다. 6백 명으로 6천 명을 무찌르다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런 훌륭한 전투는 들어본 적도 없군요.”
두변이 말했다.
“소 형, 과찬이십니다. 제가 막씨 왕족의 보물 덕에 승리를 거뒀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소목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고로 보물이란 덕목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야 빛을 발하는 법이지요.”
두변이 냉소를 지었다.
그때 군함 위에서는 그렇게 덕목이 있으셨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