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51화 (251/648)

251장. 두변의 천안(天眼)

계청주가 다시 평온해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딸아. 이 아비는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두변이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지만, 그건 아마 막씨 왕족의 보물인 비밀 병기 덕분이겠지. 하지만 그 비밀 병기도 다 쓰는 날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그놈은 다시 하찮은 처지가 될 것이다. 넌 그놈을 떠나야만 그놈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 최근에 그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봤는데, 그놈은 악운 덩어리다. 이문회가 그놈을 위해서 거의 죽을 뻔했고, 이연정이 동창 대도독 직을 내려놓은 것도 그놈 때문이고, 그놈 곁에 있으면서 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계표표는 계청주에게 이문회는 제국을 위해서 위험에 빠진 것이고, 이연정은 이문회를 살리기 위해 대도독 직을 내려놨다는 걸, 그들이 두변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쓰러져 가는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고난과 역경을 겪는다는 것을 설명할 여력이 없었다.

계청주는 그들과 입장도 다르고 삼관(三觀: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도 맞지 않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이 작은 백색부에서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계청주는 이미 시야가 많이 협소해져 있었다.

계표표는 자기가 믿는 걸 아집으로 밀고 나가는 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누가 애국한다고 하면, 계청주는 콧방귀를 뀌면서 바보 보듯이 그 사람을 봤다. ‘너무 어리고 유치하군. 난 일찍이 제국의 본질을 꿰뚫어 봤지.’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많이 지친 계표표가 계청주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알겠어요. 아버지, 약이 식어가고 있으니까 얼른 드세요.”

계청주가 그제야 입을 벌렸고, 계표표가 한 숟가락씩 정성스럽게 그에게 약을 먹였다.

계청주는 몇 숟가락 마시더니 곧바로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오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계표표는 약효가 참 빠르다며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그때!

계청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눈알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의 근맥이 갑자기 굵게 튀어나오면서 그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계청주는 숨이 턱에 닿도록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고, 숨 쉬는 게 점점 더 버거워졌다.

계청주가 끔찍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계표표에게 말했다.

“독이…….

표표, 어서 이곳을 떠나라. 두변에게 가거라 어서…….

육맥신검 비급은 물속에……. 아악!”

계청주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더니, 곧이어 그의 칠규(七竅: 사람의 얼굴에 있는 7개의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더니, 그의 몸이 허공에서 침상으로 떨어졌다.

침상에 떨어진 계청주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계표표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계청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계표표는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계청주를 있는 힘껏 흔들었다가, 그를 끌어안았다가, 다시 그를 미친 듯이 흔들면서 그가 깨어나길 바랐다.

계표표는 계청주가 피를 토하기 직전에 어서 두변에게 가라고 한 말에 크게 감동했다. 아버지는 딸이 자신에게 독을 썼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부녀의 연을 끊을 만큼 크게 싸웠음에도 그는 계표표가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는 딸의 안전을 위해서 곧바로 아집을 꺾고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사실 계청주도 두변이 탐탁잖을 뿐이지 그의 능력에 대해선 인정하고 그를 신임했다.

하지만 계청주의 바람과 달리, 계표표는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계표표는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가는 계청주의 몸을 붙들고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이때, 조금 전 밖으로 나갔던 계청주의 제자들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계청주에게 말했다.

“사부, 왜 그러십니까?”

“사부, 저희를 놀리지 마십시오.”

“사부, 사부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희도 더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부,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어떤 악랄한 놈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입니까. 범인이 사람이든 요괴든, 제가 꼭 그놈을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습니다.”

이때, 대사형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면서 계표표를 노려보았다.

“사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라. 우리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부께서 무탈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렇게 된 것이냐.”

계표표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대사형을 쳐다보았다.

‘내가 평소에 믿고 따르던 그 대사형이 맞아?’

대사형의 이름은 인소당이고, 곧 쉰을 앞두고 있었다.

인소당은 서른 몇 살 때 계청주의 제자로 들어왔고, 천부적인 무공 실력은 나쁘지 않으나 다른 제자들에 비해 무공 실력이 훨씬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평소 청룡회의 행정을 도맡아서 처리했고, 청룡회 내부에서 꽤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계청주가 무공 수련이나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도 인소당이 청룡회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처리했고, 그래서 다른 제자들도 언제나 그의 결정을 믿고 따랐다.

사실 계표표의 마음속에는 계청주보다 인소당이 더 아버지에 가까운 존재였다.

계청주는 집안의 사소한 일에 무신경했지만, 인소당은 계표표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살뜰하게 챙겼다. 그 덕에 인소당은 계표표에게 아버지이자, 좋은 오라버니였다.

그런데 서로에게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인소당이 계표표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책문하고 있었다. 계표표는 계청주가 자신의 친부인데, 자기가 뭘 했겠냐며 되묻고 싶었다.

계표표가 냉랭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대사형, 지금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묻는 거죠?”

“사매, 내가 사매를 어렸을 때부터 업어 키웠던지라, 내가 사매를 얼마나 아끼는지 사매가 더 잘 알겠지. 하지만 애정이 많은 만큼 실망이 더 크군. 말해봐라. 사부께서 왜 갑자기 이렇게 되셨는지. 조금 전에 우리 모두가 탕약을 한 모금씩 맛봤고 독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가 밖으로 나간 뒤에는 이 공간엔 너와 사부만 남았고, 네가 직접 사부께 탕약을 먹여드렸지. 여기까진 맞지?”

“맞아요.”

“우린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걸 밖에서 들었다. 사부께서 사매에게 불효자라고 호통치셨고, 사실 자기가 죽길 바라는 거냐고 화를 내셨지. 그때 너도 감정이 격해져서 사부께 반박했지?”

계표표는 이런 질문 방식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소당이 말했다.

“사매, 부녀지간에 말싸움하는 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지. 그런데 왜 사부를 독살한 거지? 호랑이가 아무리 흉악해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흉악한 새끼가 호랑이를 잡아먹는다는 얘기도 없다.”

이 말이 나오자, 계표표가 격노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난 그런 적 없어요.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죠? 나 계표표는 자살하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를 해치지 않아요.”

옆에 있던 제자들이 다급하게 인소당을 말렸다.

“대사형, 사매가 고집이 센 건 맞지만, 사부께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지 알잖아요. 사매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맞아요. 대사형, 증거도 없는 일을 그렇게 함부로 말해선 안 되죠.”

나머지 네 명의 제자들이 계표표의 편을 들어주면서 인소당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사제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사제들이 너무 단순하고 착해서 그래. 사내 따라 도망친 여인들이 얼마나 바뀌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그리고 사부께서 이미 사매를 내쫓고 소목지 공자를 후계자로 지목하셨는데, 사매가 그것 때문에 사부께 원한을 품었을지 누가 알아?”

“증거, 증거를 찾고 다시 말합시다.”

이사형이 진지하게 말했다.

“증거? 그래. 내가 바로 증거를 가져다주지.”

인소당이 자신있게 말했다.

“이게 사부께서 드시던 탕약이지? 지금 아무도 이 탕약에 손을 댄 적 없어. 맞아?”

인소당이 묻자,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소당이 계표표에게 물었다.

“이 숟가락으로 사부께 약을 먹여드린 거고?”

계표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개 몇 마리, 돼지, 닭, 오리, 그리고 당나귀 한 마리를 데려와.”

대사형이 시종에게 말했다.

계청주가 평소에 당나귀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지라, 청룡회에서 키우는 당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 키우는 당나귀가 아니었다.

인소당이 남은 탕약을 가축들에게 먹였다.

그러자 불과 30초 뒤에 가축들이 모두 중독 증세를 보였다.

가축들의 모든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고, 죽기 직전에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튕겨 오르고 온몸의 근육이 꼬여버린 것처럼 아주 참혹한 모습으로 땅에 떨어지면서 죽었다.

이 모든 걸 지켜본 계표표는 조금 전 계청주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계표표를 옹호하던 제자 네 명도 사뭇 달라진 눈빛으로 계표표를 쳐다보았다.

증거는 확실했다.

자신들이 방을 떠나기 전까지는 탕약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지금 저 탕약에는 독이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계표표가 탕에 독을 넣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제자들이 계표표를 바라보는 눈빛에 속상함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사매, 어, 어떻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계표표, 천벌 받을 게 무섭지도 않아?”

“계표표, 정말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두변을 따라 떠났을 때도 나는 네가 용감하고 정의로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너는 전갈처럼 악독하고 개돼지보다도 못한 사람이구나.”

인소당이 말했다.

“계표표를 쇠사슬로 묶고, 침으로 혈도를 막은 뒤에 지하 감옥에 가둬두자.”

제자들은 인소당의 말에 따라 계표표를 쇠사슬로 묶고, 침을 놓아서 혈도를 막았다.

계표표의 종사급 무공은 혈도를 막은 상태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계표표는 영혼 없는 얼굴로 아무런 저항 없이 지하 감옥까지 끌려갔다.

인소당이 사제들에게 말했다.

“사제들, 계표표가 이런 천륜을 어기는 짓을 한 걸 보면, 분명히 배후에 누군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계표표를 심문해서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는 건 어때?”

제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계표표의 처벌을 어떻게 할지는 소주인께서 결정하도록 하죠.”

“그야 당연하지.”

인소당이 곧바로 대답했다.

인소당이 지하 감옥으로 와서 계표표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말해라. 누가 사부를 독살하라고 시켰는지!”

인소당이 물었다.

계표표는 인소당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멍한 표정으로 지하 감옥의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어서 말해라!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난 네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무시한다는 걸 알았다. 내가 네 뒤치다꺼리를 다 해줬는데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일도 없었지.”

계표표의 곁에서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는 유모도 있고 시녀도 있었지만, 인소당은 계표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장난감과 인형 같은 걸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계표표는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이나 인형보다는 싸움을 더 좋아했다.

“내 앞에서 청룡회 대소저처럼 굴어도 소용없다. 그동안 네가 그토록 무시했던 사람이 이젠 네 생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소감이 어떠냐? 네가 청룡회의 대소저라고 해도 난 두려울 게 없다.”

인소당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채찍을 물에 잠시 담갔다.

“말해라. 사부를 독살하라고 시킨 배후가 누구냐.”

계표표가 그제야 인소당을 흘겨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계표표가 여전히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난 인소당이 물 묻힌 채찍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짝.

새빨간 핏자국이 계표표의 몸에 길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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