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56화 (256/648)

256장. 계청주의 충심

계청주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청룡회의 몇천 명으로 여여해의 몇만 명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나는 ‘되는 대로 살 수 있겠지, 이런 초연한 중립 입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지.’ 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왔다. 내 무공 수준이 높긴 하지만, 너와 계표표만큼 용감하지 않다. 난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

두변은 계청주의 말을 맞받아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여씨는 나를 품을 그릇이 못 되지만, 대녕 제국은 나를 품을 수 있을 게다. 그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대녕 제국과 동맹 관계를 맺어버리면, 그 즉시 여씨와 적이 되는 거다. 겁이 나더군. 그래. 난 겁이 났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쌓아 온 모든 게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 내 마음속에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었지만, 여씨가 나를 집어삼키기까지 아직 몇 년이 더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대녕 제국과 동맹을 맺어버리면, 그 시일이 몇 년이나 빨리 앞당겨지는 거지. 나는 꼭 따뜻한 물에서 헤엄치는 청개구리처럼, 자기 몸이 익는 걸 본 뒤에야 뭔가를 바꿀 의지가 생기나 보다.”

계청주가 두변 앞에서 진심으로 참회의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여씨가 더는 내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여여해가 계왕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서남 토사 연맹을 연합하는 속도를 보면, 그놈이 반역을 일으키는 건 당장 내년, 내후년의 일이다. 여여해는 진남공이 안남 왕국에서 대승을 거두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진남공이 안남 왕국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여해는 반역을 일으킬 준비에 박차를 가할 것이고, 더욱 빠른 속도로 광서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고 반역군 완씨와 함께 진남공을 중간에 껴두고 남북 협공을 하겠지. 그렇게 되면 제국에 유일하게 남은 정예 부대가 전멸할 것이고, 대녕 제국의 남부를 지킬 수 있는 세력은 전멸하게 된다.”

계청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사실 나도 이제 더 갈 길이 없다. 여여해에게 무릎을 꿇고 투항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녕 제국과 연맹하는 것이겠지. 대녕 제국과 연맹하는 것도 내겐 구사일생의 길이긴 해. 하지만 이런 난세에서는 누구나 구사일생이겠지.”

계청주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뒤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두변, 네가 관직 직급이 낮긴 해도 대녕 제국의 황제가 가장 믿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안다. 대녕 제국의 문무백관과 엄당의 대부분 사람이 간악한 놈들이라는 건 알지만, 천윤제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성군이다. 천윤제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내가 겪었던 30년 전의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을 철저하게 재조사하셨고, 그 덕분에 억울했던 모든 사람이 결백을 되찾게 되었지.”

계청주가 두변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나는 일개 무도인일 뿐이니, 감히 먼저 황제 폐하와 동맹을 맺고 싶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를 대신해서 황제께 상주문을 올려다오. 평민 계청주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드디어 됐구나!’

두변은 속으로 환호했다.

그는 백색부에 올 때부터 챙겨왔던 성지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일찍이 준비된 것으로, 황제가 이연정에게, 그리고 이연정이 두변에게 전달한 성지다.

“황제가 명하노라. 계청주의 해원(解元) 자격을 회복하고, 이갑 진사 출신을 하사한다.”

계청주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성지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두변이 계청주의 두 손 위로 정중하게 성지를 올렸다.

계청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두변이 이미 준비돼있던 또 하나의 성지를 꺼내 들었다.

“황제가 명하노라. 계청주를 제국 명예 총병관으로 책봉하고, 부장군 실권(實權)을 부여한다. 계청주에게 관아를 만들고 자율적으로 병사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계청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전에 황제가 그를 명예 총병관으로 임명하려 한 적이 있지만, 그건 일말의 권력이 없는 허울뿐인 명예였다.

계청주가 서남에서 한 획을 긋는 인물이긴 하지만, 결국엔 관직 하나 없는 무도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계청주를 한 번에 종2품 관직인 부장군에 임명한 것이다. 이는 백색부 참장 염효보다 더 높은 관직이었다.

계청주가 황제에게 느끼는 감사함은 황제에게 지우지은(知遇之恩)을 입었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계청주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셈이었다. 황제가 마지막으로 무장에게 큰 관직을 하사했을 때가 염효 때인데, 염효는 그 은혜를 갚지 못할망정 대역무도한 변절자가 되었고, 염효 때문에 조정 세력이 백색부에서 완전히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황제가 또 한 번 무장을 믿고 큰 관직을 준 것이다.

만약 계청주마저 황제를 배신한다면, 천윤제는 평생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린 계청주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는 자신이 왜 어렸을 때부터 황족을 등한시할 수 있는 무도의 길을 걷지 않고, 열심히 글공부를 해서 관직을 얻고자 했는지를 떠올렸다.

이어서 그는 억울하게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에 휘말려서 관직 생활을 해보지도 못하고 꿈을 접고 무도를 배우게 됐던 때를 떠올렸다.

계청주가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관직과 권력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 때문에 황가와 권력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일관하며 살아왔다.

중국은 예로부터 관본위(官本位: 직위나 권력으로 개인이나 단체의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가치관) 사상이 뿌리 깊이 박힌 나라다.

천윤제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가 계청주를 명예 총병관에 임명했지만, 계청주가 그 성지를 내다 버린 이유가 있었다. 이미 망조가 되어가던 대녕 제국은 천윤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엔 명예 총병관을 돈으로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윤제가 이번엔 그에게 확실한 실권을 쥐여줌으로써 계청주의 억울했던 지난 수십 년을 보상해줬고, 관직과 권력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던 계청주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한참이 지난 뒤, 계청주가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큰절을 올렸다.

“신, 계청주 황제의 용은에 감사드립니다. 신은 폐하를 위해, 제국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나이다.”

성지를 받든 계청주가 오랫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자, 두변이 서둘러 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계청주를 일으킨 두변은 깜짝 놀랐다.

계청주는 북받쳐 오르는 감격스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창피한 꼴을 보이는구나. 예전에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건, 언젠가 제국에 이바지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었다. 당시 내겐 원대한 꿈이 있었는데, 마흔이 되기 전에 제국의 1품 대관이 되는 것이었지. 하지만 그때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서 다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늦은 나이에 생각지도 못하게 원하는 바를 이루다니. 운명의 장난이란 참.”

계청주가 이어서 말했다.

“성지에서 내가 자율적으로 병사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데, 병사의 수는 몇 명까지 가능한 것인가? 조정에서 감군(監軍)을 파견해주는 거냐?”

두변이 대답했다.

“1만 대군입니다. 조정에서 감군을 파견하진 않을 겁니다. 감군이라고 한다면, 제가 하나의 감군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직급이 너무 낮아서 대종사의 감군이 될 자격이 있을지요.”

“내가 직접 나선다면 병사 1만 명을 모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색부에 수십만 인구가 있고, 여씨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많거든.”

“대종사께서 병사를 모집하는 군비로 5만 냥 황금을 드리겠습니다. 그 돈으로 1만 명을 모집하는 데엔 충분하겠지요.”

5만 냥 황금은 당연히 막씨 왕족의 보물에서 얻은 돈이었다.

계청주가 깜짝 놀라더니 말했다.

“병사를 모집하는 데에 쓰일 1만 냥 황금은 우리 청룡회에서도 낼 수 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제국의 병사를 키우는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그 마음 감사히 잘 받아서 요긴한 곳에 쓰겠다.”

“광서의 전체 식량고와 대장간은 여씨와 탐관오리들의 손에 꽉 잡혀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의부 이문회 대인께서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채시고 광서에 있던 여씨 일족의 근거지를 뿌리째 뽑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여씨와 연관된 모든 관리를 숙청했고요. 그때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는 식량과 갑옷, 그리고 무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계왕과 장양명 대인께서 황제께 상주서를 올렸을 겁니다. 광서에 조정 직속의 무기 공방, 대장간을 십여 개 개설하고, 거기서 생산된 일부 무기와 갑옷을 대인의 군대에 공급하기로요.”

“영존 이문회 대인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제국을 위해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벌어주셨구나.”

“맞습니다. 거의 이 일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하셨죠.”

“이어서 우리가 해야 할 건, 시간과의 시합이겠구나.”

지금부터 제국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촌각을 다투면서 여씨 반란을 대비해야 했다.

현재 여씨는 미친 속도로 토사 연맹을 집어삼키고 있고, 대녕 제국에선 계왕과 계청주가 자체 군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할지는 모두 시간에 달려 있을 것이다.

만약 대녕 제국이 좀 더 빠르다면, 두변은 여씨의 숨구멍인 백색부를 꽉 막아버릴 수 있고, 광서에도 여씨의 수십만 대군에 대적할 조정의 군대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녕 제국이 이 싸움에서 주도권을 차지할 확률이 높아진다.

한편, 영종오 대종사는 여씨 영토의 중심지로 은밀하게 잠입해서 뇌명 토사를 암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영종오 대종사가 순조롭게 이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면, 여씨의 서남 토사 연맹 통합에 큰 지장을 줄 것이고, 여씨의 발목을 잠시 붙잡아둘 수 있게 될 것이다.

공적인 얘기가 끝나자, 두변이 계청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종사께 독을 쓴 사람은 대제자 인소당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상심하진 마십시오. 그는 부귀영화를 위해 대종사를 배신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북명검파의 첩자였습니다.”

계청주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잠시 뒤, 충격에서 벗어난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인소당은 나를 가장 오래 따른 제자다. 천부적인 재능은 별로였지만, 제일 내게 충성스러운 놈이었지. 내 제자이긴 했어도, 나와 연배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내 심복으로 여겼다.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그놈을 전적으로 믿었는데. 그런데 그놈이 북명검파가 심어둔 첩자였다니.”

계청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북명검파와 맞설 때가 된다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제일 비밀스럽고 막대한 힘을 가진 곳이 바로 북명검파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흑룡처럼 신출귀몰한 놈들이니까.”

두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한때 북명검파에서 수련하셨던 대종사께서도 북명검파를 잘 모르시는 겁니까?”

계청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북명검파에 대해 제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북명검파의 제자들일 것이다. 북명검파 관할 내에 있는 섬은 무려 13개에 달하고, 나는 그중 한 섬에서 사부를 만나 수련을 했다. 그때 나는 단 한 번도 다른 섬에 가본 적이 없고, 북명검파의 본거지에 간 적도 없다.”

“어떤 분 말씀에 따르면, 북명검파는 대녕 제국의 구멍이라고, 심지어 이 세계 절반의 구멍이라고 하시더군요.”

“아주 적절한 비유구나. 인소당이 나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건, 북명검파에서 나를 더는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건, 이제 내게 주어진 선택의 시간이 얼마 없어서이기도 하다.”

계청주가 탄식하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내 무공을 더욱 단련해서 대종사보다 더 높은 수준에 돌파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내가 북명검파를 뚫고 들어가서 사부의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난 그럴 수 없다는 걸. 적어도 나 혼자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계청주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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