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장. 육맥신검은?
그는 몹시 어려운 결심을 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이내 뒷짐을 지고 창가로 가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두변은 계청주의 모습을 보고 그가 무얼 고민하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계청주를 기다렸다.
계청주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결심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평생 사부의 복수를 위해서 무공을 단련해왔고, 북명검파를 없애버릴 유일한 희망이 ‘육맥신검’이라 믿으면서 ‘육맥신검’에 평생을 매달렸다.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육맥신검’을 익히지 못했다.
비록 그가 ‘육맥신검’ 비급을 눈감고도 써낼 수 있고,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해도 무공은 전혀 익힐 수가 없었다.
그제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가 언젠가 ‘육맥신검’을 익힐 수 있다고 믿었건만, 어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오니 모든 게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육맥신검’을 익히지 못할 운명이고, 이 비급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수십 년 만에 깨달은 셈이었다.
계청주는 계표표와 자기 제자들에게도 ‘육맥신검’의 일부를 가르치려고 했지만, 아무도 이 무공을 배울 수 없었다.
계청주는 이제야 자기가 ‘육맥신검’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자신은 그저 진정한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 비급을 보관하고, 보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도 아쉬웠다.
전설급 비급을 가졌는데도 이 무공을 익히지 못하니 얼마나 아쉬울까.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한 번 놓였던 계청주는 전보다 훨씬 더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고, 어릴 적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계청주는 자기가 지금 수준 이상으로 무공 수준을 높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육맥신검’에 대한 욕심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계청주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 몸을 돌렸다.
“너는 계표표의 근맥을 치료하고 내 목숨도 구해줬다. 나 계청주가 그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다면 사람 된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놈이 되는 것이겠지.”
두변이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제국을 위해 충효를 바치고,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신 것만으로도 제게 충분한 보답을 하신 겁니다.”
“그건 공적인 일이다. 내가 폐하께 충성을 바치기로 한 것도 나 자신을 위한 일이고, 청룡회의 살길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폐하께서 나를 믿고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주셨으니, 나 또한 폐하께 응당한 보답을 해 드려야지.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내가 개인적으로 갚아야 한다.”
계청주가 두변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겐 전설급 비급인 ‘육맥신검’이 있다. 네게 두 시진을 줄 테니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 보아라. 그걸 1, 2년 이내에 배우겠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족히 수십 년을 쏟았는데도 아무런 수확이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네게 그 비급을 보여주는 것도 우연한 기회라고 생각하거라.”
계청주가 비장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나를 따라오거라.”
두변은 계청주를 따라 고탑을 내려왔다.
계표표 등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지만, 두변과 계청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지나쳤고, 계표표 등은 계청주가 두변을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청룡회 중앙의 연못에 도착했다.
계청주는 예전과 같이 물속으로 잠수하지 않고, 대신 어떤 장치를 눌러서 연못에 있던 물을 전부 뺐다. 연못의 물이 빠지면서 밀실로 향하는 입구가 드러났다.
두변은 계청주를 따라 입구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몇십 미터 되는 층계를 내려가서 밀실 앞에 도착했다.
계청주가 밀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밀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자체였다.
계청주는 곧바로 품에서 자기가 챙겨온 초를 꺼내서 밀실에 있던 마연향이 남아있는 초를 껐다.
계청주가 마연향을 쓰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인소당이 최근 마음이 심란해진 자신을 위해서 이 진귀한 것을 구해왔다는 생각에 무척 고마워했었다. 그런데 인소당이 효심이 지극해서 자신을 위해 비싸고 희귀한 마연향을 구해온 게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밑밥을 깔아둔 것이었다니.
두변은 그제야 이 작은 밀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밀실 안에는 작은 탁자 하나와 엄청난 양의 재가 쌓여 있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종이를 태웠는지 가늠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계청주가 말했다.
“사실 ‘육맥신검’ 비급은 내 머릿속에 있어서 아무도 이 비급을 훔쳐가지 못한다. 난 며칠 동안 공을 들여서 ‘육맥신검’ 비급을 외워서 적어낸 뒤, 한 번 쭉 읽고 바로 불태워버리지. 그렇게 수년이 지나다 보니, 이곳에 쌓인 재가 산이 되었구나.”
계청주가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제 밤에 ‘육맥신검’ 비급을 또 한 번 완성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날따라 비급을 불태우기가 아깝더군. 꼭 내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짐작한 사람처럼 말이다. 만에 하나 내가 이 비급을 불태워버리면, ‘육맥신검’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날 쓴 비급을 이곳에 남겨두었다.”
계청주가 탁자에 놓인 비급을 두변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가져가서 읽어 보거라. 네게 딱 두 시진만 주겠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읽어 보아라. 그리고 네가 이 비급을 볼 수 있는 건 우연히 찾아온 기회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익힐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두변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한 뒤, 계청주에게서 비급을 받아왔다.
이건 다른 세계에서 온 전설급 비급이고,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무공이다.
계청주의 생각대로, ‘육맥신검’의 주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두변의 직전 숙주까지는 ‘육맥신검’을 얻는 임무를 모두 실패했다.
만약 두변이 ‘육맥신검’ 6권을 전부 익히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최강의 무도인이 되는 것이다.
두변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비급을 펼쳤다.
그런데 한 장, 두 장, 세 장을 넘겨도 아무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두변의 표정을 보면서, 계청주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심오한 무공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게냐.”
두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종사, 안에 아무 내용도 없습니다.”
계청주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두변의 손에서 비급을 뺏어와서 확인해봤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안에는 아무 내용이 없었다.
분명히 이틀 전에 완성된 비급을 이곳에 두고 나갔는데, 지금 펼쳐보니 그가 작성했던 내용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는 것은?
누군가가 ‘육맥신검’ 비급을 훔쳐갔구나!
계청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그의 안면근육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계청주가 곧장 밖으로 나가서 이제자 사무도에게 물었다.
“소목지는 어디 있느냐?”
사무도가 대답했다.
“소 공자는 사부의 해독제를 찾으러 나간 두 대인이 걱정되어서 두 대인을 찾아보겠다며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네요.”
계청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부의 ‘육맥신검’을 되찾고 싶었다면, 내게 말하면 될 것을 왜 훔쳐갔을까. 그 비급은 사부의 것이었고, 소목지는 사부의 손자이니, 비급을 돌려달라고 하면 내가 어련히 돌려줬을 텐데, 왜 굳이 그걸 몰래 훔쳐 가야만 했을까.”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소목지가 ‘육맥신검’ 비급을 훔쳐갔다고?
두변이 옆에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소목지는 아마 ‘육맥신검’만 훔쳐간 게 아니라, 대종사를 독살하는 데에 일조했을 겁니다. 인소당이 죽기 전에 저희를 비웃었습니다. 청룡회는 자기 하나 죽는다고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고요. 제 생각엔 인소당은 마연향과 삼룡탕을 이용해서 사람을 독살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소목지의 사부는 제일 의선(醫仙)이라고 불리는 사람이고요.”
이 말이 나오자, 사람들 마음속에 있던 소목지의 좋은 인상이 교활하고 악독한 독뱀으로 바뀌었다.
“왜? 도대체 왜?”
계청주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최근 내가 표표와 두변에게 미안할 짓을 한 건 맞지만, 소목지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었다. 내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그를 챙겨줬고, 청룡회 소주인 자리에까지 앉혀놨는데, 도대체 왜 나를 실망시킨다는 게냐. 왜 도둑놈처럼 내 비급을 훔쳐가고, 왜 나를 독살하려고 한 게야?”
계청주는 소목지의 배신이 너무도 속상했다.
두변이 말했다.
“사실 소목지는 목적을 달성할 뻔했습니다. 그의 뜻대로 대종사께서 독살당하셨다면, 표표 누이는 아버지를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 될 것이고, 청룡회는 그대로 소주인인 소목지에게 넘어가게 되었겠지요. 소목지가 미리 꽁무니를 내뺀 건, 어쩌면 제가 계 대종사를 살려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대종사가 깨어나시게 된다면, 자기도 의심받을 게 뻔하니까 일찍이 도망친 거죠.”
계청주가 이를 부득 갈면서 사무도에게 말했다.
“청룡회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전해라. 지금부터 소목지를 보는 즉시 죽여버리라고.”
계청주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바꿨다.
“아니지. 지금부터 소목지를 발견하는 즉시 내게 보고하라고 전해라.”
계청주가 소목지를 죽이는 게 아까워서 말을 바꾼 게 아니라, 소목지는 무공이 막강하고, 미꾸라지처럼 교활한 놈이라 계표표 수준의 무도 강자가 아닌 이상 그를 상대할 수 없음을 생각해서 말을 바꾼 것이었다.
계청주가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긴 한숨을 뱉었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지금 바로 외워서 한 권 써줄 테니, 날 따라오너라.”
두변은 계청주를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계청주는 진지하게 먹을 간 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붓을 들었다.
‘육맥신검’ 비급을 수백 번, 수천 번 외워서 썼던 터라, 붓을 움직이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계청주는 문자가 됐든 그림이 됐든, 뭐든 5분에 한 장씩 완성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두변은 계청주의 놀라운 속도에 감탄했다.
옆에서 곁눈질로 보았을 때, 계청주가 작성하는 내용은 필사를 한다 해도 십몇 분에 한 장 간신히 완성할 정도였다.
마지막 열 몇 장이 남았을 때, 계청주가 갑자기 붓을 멈췄다. 그는 마지막 내용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계청주가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답답한 듯 자신의 이마를 수차례 때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을 감고도 써냈던 내용이 왜 갑자기 기억나지 않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두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청주에게 말했다.
“대종사,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잠시 대종사의 상태를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계청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변은 곧바로 정신력을 송과선에 집중해서 천안으로 계청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계청주의 머릿속에는 무언가 검은 기운이 어딘가를 막고 있었다.
그의 체내에 있던 마연향은 전부 빠져나갔지만, 중독의 영향 때문에 기억의 일부가 검은 덩어리에 의해 막혀 버린 것이다.
‘육맥신검’의 마지막 내용이 바로 검은 덩어리가 막아둔 곳에 있기에 계청주가 그 내용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두변이 이 사실을 계청주에게 알리자, 계청주가 핏대를 세우며 화를 냈다.
“소목지 이놈! 내가 네놈을 찾게 된다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다. ‘육맥신검’을 훔쳐가고, 내 기억에 남은 내용마저 지우려고 해?”
무공 수준이 막강한 계청주라도 머릿속에 있는 검은 기운을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그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통스러워할 때, 두변이 말했다.
“대종사, 저를 믿으십니까?”
계청주가 놀란 얼굴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믿지. 믿고말고.”
두변이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사용할 기술은 정신 공격술입니다. 이 기술은 대종사 머릿속에 있는 검은 기운만 없애고, 다른 곳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사용해본 적 없는 기술인지라, 난이도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는 한 치의 오차도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 대신 대종사께서는 저를 완전히 신뢰하고, 정신력 방어를 전부 해제하셔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제게 목숨을 맡기시는 거죠.”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알겠다. 한 번 해보아라.”
계청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농을 던졌다.
“아마 지금은 네가 나보다 내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겠지.”
두변은 계청주의 농에도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계청주의 목숨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은 그의 딸인 계표표와 ‘육맥신검’을 얻어야 하는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