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장. 스파르가눔
이연정이 두변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네게 무슨 일이 생겼다간 나도 네 아비를 볼 면목이 없단 말이다.”
두변이 대답했다.
“지금 폐하께서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만에 하나 폐하께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제국의 하늘이 무너질 것이고, 백색부에서 힘겹게 만들어 낸 국면도 전부 수포가 될 겁니다. 이대로 포기해선 안 됩니다.”
이연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네가 만 리 길을 달려서 경성까지 온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종사, 연단 대사, 대태의까지 속수무책인데, 네가 무슨 수로 폐하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이냐.”
영설 공주와 황후가 슬픔에 젖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차마 열여덟 살짜리 어린 환관에게 희망을 걸 수가 없어서 두변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두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숨을 들어마신 뒤, 두 눈을 감고 모든 정신력을 송과선에 집중했다.
송과선에 있던 붉은 불빛이 밝아지면서 두변의 천안이 작동되었다.
현대 지구의 최고급 CT 기술보다 더 뛰어난 천안으로 황제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천윤제의 근맥과 오장육부, 그리고 혈액과 산소의 흐름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천윤제의 몸이 투명하게 보였지만, 그에게 아무런 의학적 지식이 없다 보니 사실 봐도 뭐가 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의 몸이 얼마나 허약한지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천윤제의 오장육부, 특히 그의 폐가 엉망이었다. 그리고 근맥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가느다랗고 약했고, 그래서인지 황제의 골격도 다른 사람보다 왜소했다.
두변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황제들은 평생을 한량처럼, 혹은 폭군처럼 권력을 있는 대로 다 쓰고, 백성의 생활이 어떻든 간 개의치 않고 음탕하고 탐욕스러운 즐기다가 세상을 뜬다.
그런데 어떤 황제들은 마치 지옥에서 살아남는 것처럼 행복한 날이 별로 없고, 선조들이 물려준 강산과 백성들의 삶을 어깨에 짊어진 채 책임감을 다하며 고된 생을 살다 간다.
하지만 천윤제가 이번에 쓰러진 건, 그의 오장육부가 허약한 탓이 아닐 것이다.
대태의들이 황제의 맥을 수백 번 짚으면서 이번에 그가 쓰러진 건 평소의 지환이나 오장육부의 허약함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두변이 천안을 통해 찾아내야 하는 건, 황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치명적인 무엇이었다.
두변이 가만히 서서 황제의 몸을 찬찬히 살피기만 하는 걸 보던 이연정은 마음이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영설 공주와 황후의 마음도 점점 더 무거워졌다.
두변이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다.
‘꼭 찾아내야 해. 꼭 찾아내야만 해. 시스템, 난 너만 믿으니까 절대로 날 엿 먹여선 안 돼. 황제가 쓰러지게 된 치명적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황제의 목숨을 구할 수도 없고, 대녕 제국의 하늘이 무너질 것이라고!
꼭 찾아내야 해. 꼭!
시스템. 제발 날 좀 도와줘라. 어? 제발 좀.’
이때, 결국 두변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저것 때문에 대태의도, 연단 대사들도 병증이 뭔지 알아내지 못한 거였구나. 만약 저게 움찔거리지 않았다면, 나도 원인을 찾지 못했겠구나!’
두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의 뇌 속에 아주 긴 기생충 하나가 있는데, 족히 십여 센티미터가 넘어 보였다. 이 기생충은 황제의 뇌 속 중요한 부분을 꽉 막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황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음식도 못 먹게 된 것이다.
저게 무슨 기생충이지? 스파르가눔인가?
(※스파르가눔: 개나 고양이, 늑대를 종숙주로 하는 기다란 기생충으로 사람이 중간 숙주여서 사람 몸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을 일으킨다. 뇌로 가서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하고 언어장애가 생기게 하기도 하며 눈에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황제가 젊었을 때 뱀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고기에 있던 기생충이 황제의 체내에 기생하게 되었고, 황제의 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다가 지금에서야 황제의 뇌로 이동한 것이구나. 통로가 좁다 보니 격렬하게 움직이다가 결국 황제의 중요한 뇌혈관을 막은 것이고, 그래서 황제가 이유 없이 갑자기 쓰러지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된 것이구나.
두변은 시스템의 천안으로 기생충을 더욱 자세히 관찰했다.
황제의 뇌 속에 있는 기생충은 족히 30센티미터가 넘어서, 몸을 완전히 웅크린 채로 황제의 뇌혈관을 빈틈없이 막고 있었다.
현대 지구에서도 뇌 신경계는 엄청나게 어려운 분야에 속하니, 대녕 제국에서 이 병증을 찾아내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연단 대사와 대태의들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황제의 머릿속에 기생충이 한 마리 살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 없을 것이다.
두변은 길게 한숨을 토해낸 뒤,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이연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두변이 황제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황제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두변이 결례를 범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후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만약 병증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폐하께 큰절을 한 번 올리고 물러나거라. 본궁은 네가 만 리 길을 달려온 것만으로도 고맙구나.”
두변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황후 마마, 공주 전하, 이연정 대인, 소인이 폐하의 병증을 알아냈습니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야말로 두변이 뱉은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열여덟 살짜리 어린 애가 황제의 맥을 짚어보지도 않고 병증을 알아냈다니, 사람들은 그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두변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
“폐하의 뇌 속에 기생충 한 마리가 있는데, 아주 중요한 신경계 혈관을 짓누르고 있어서 폐하께서 이렇게 되신 겁니다.”
황제의 머릿속에 벌레가 한 마리 있다는 소리를 듣자, 세 사람이 더욱 놀란 표정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대신들, 무장들, 연단 대사들은 모두 밖에 있었지만, 황후, 이연정, 영설 공주 외에 상시 대기 중인 대태의 두 명이 내실에 함께 있었다.
두변의 말을 들은 대태의 두 명이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무 황당하지 않소! 그 기생충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
두변이 대답했다.
“1척 길입니다.”
“1척이나 되는 기생충이 어떻게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데도 자각하지 못한단 말이오?”
태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두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폐하께서 젊으실 적에 돼지고기나 뱀고기를 생으로 드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때 아주 얇고 가느다란 기생충이 폐하의 체내에서 기생하게 되었고, 몇십 년의 성장을 거쳐서 1척이 넘는 길이가 되었습니다. 이번엔 기생충이 우연히 폐하의 뇌까지 이동하게 되어서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하는군. 황당해!”
태의가 언성을 높였다.
영설 공주가 물었다.
“치료할 수 있나?”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두변은 말하면서도 스스로의 두피가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영설 공주와 황후가 눈빛을 반짝이면서 두변을 바라보았다.
황제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은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
대녕 제국에 천윤제가 없어선 안 되기도 하지만, 황후에겐 천윤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좋은 남편이었고, 영설 공주에겐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치료하면 되지?”
영설 공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폐하의 뒤통수에 작은 구멍을 내야 합니다. 1촌 정도 머리카락을 밀어야 합니다.”
두변이 대답했다.
태의 두 명이 얘기를 듣더니 절대 안 된다며 난리를 쳤다.
황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태의를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닥치지 못할까. 한마디만 더 지껄였다가는 본궁이 네놈들의 목을 칠 것이다.”
대신들이나 태의들이 허구한 날 하는 것이라곤 황가의 결정을 막는 것뿐이었다.
지금 황제의 목숨을 구하는 게 중요하지, 당장 머리카락 자르는 게 더 중요한가?
이들에게는 황제의 목숨보다, 황제가 선조들의 조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심지어 대신 중 대부분은 황제가 붕어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얼른 태자를 제위에 올리고 싶어했다.
황후는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몇 없다는 사실에 비통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살리고 싶었다.
“얘야. 계속 얘기하려무나.”
황후가 두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연정 어르신의 무공 수준이라면, 폐하의 뒤통수에 0.3촌 정도의 구멍을 낼 수 있을 겁니다. 두개골이 무척 딱딱하긴 하지만, 어르신의 무공이라면 아주 정확하고 쉽게 구멍을 낼 수 있겠지요.”
“할 수 있다. 그 정도는 공주 전하께서도 충분히 가능해.”
이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개골 아래에 딱딱한 막이 하나 있는데, 그 막 아래가 바로 대뇌입니다. 저는 아주 작은 겸자로 빠르고 정확하게 폐하 뇌 속에 있는 그 기생충을 뽑아낼 겁니다. 모든 과정은 반 각의 시간도 쓰이지 않을 것이고, 기생충을 뽑아내기만 하면 폐하께서 바로 말씀을 하시고, 음식을 섭취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뇌혈관이 십여 일 동안 막혀있던 터라, 한동안 말씀하시는 데 어려움을 겪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일어서는것도 잘 못 하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며칠 요양하시면 바로 원래대로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두변이 묘사한 상황은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황후와 영설 공주는 두변의 말을 누구보다 믿고 싶었지만, 또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봐 믿기가 두려웠다.
두변이 이어서 말했다.
“모든 도구와 집게는 고온 소독을 거쳐야 하고, 폐하의 상처는 항상 독한 술로 소독해야 합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삶아낸 깨끗한 천으로 폐하의 머리를 감싸야 하고, 소염 효과가 있는 포공단(蒲公丹)을 매일 복용하셔야 합니다.”
두변은 지금 신경외과 수술을 집도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무도 초고수, 현대 지구의 CT 기계보다 더 뛰어난 천안, 그리고 소염 효과가 좋은 포궁단만 있으면 이 수술은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연정이 두변을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두변, 정말 자신 있느냐?”
이런 일은 만에 하나의 상황을 생각해야 해서 자신 있다고 대답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리라.
하지만 두변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습니다.”
이연정이 황후와 영설 공주를 쳐다보았다.
지금 황실에서 최고 권력을 가진 자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태자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쓰러지고는 태자가 모든 정사를 대신 처리하고 있는 터라, 태자가 항상 황제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수술을 허락할 권력이 있는 사람은 황후와 영설 공주뿐이었다.
쉽게 말하면 황제의 머리에 구멍을 하나 내는 것이다 보니, 황후에게도 이 결정은 무척 어려웠다. 수술이 성공적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수술 중 무슨 일이라도 난다면, 황후도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수술에 차질이 생긴다면, 두변, 이연정뿐 아니라 황후와 공주까지도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이다. 황제를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황제를 시해했다는 죄명은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만약 시스템이 황제를 구하라는 임무를 주지 않았다면, 두변도 절대 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황후는 누구보다 두변을 믿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기대를 걸기가 무서웠다.
황후가 두변에게 다가가서 남녀 유별 등의 법도를 무시하고 두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실패한다면 너는 물론이고 네 의부 이문회, 네 조부 이연정도 죽을 수 있다. 물론, 본궁과 공주도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녕 제국은 아직 폐하가 없어선 안 됩니다.”
황후가 두변의 손을 더욱 움켜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그럼 본궁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락하마. 본궁은 폐하를 위해, 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
영설 공주도 다가와서 한 손으로 두변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황후의 손을 맞잡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부황을 위해 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다.”
두 사람 입장에서는 두변이 황제를 살릴 수 있다는 확률이 1할도 아닌, 1푼도 되지 않았지만, 그 1푼을 위해 목숨을 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