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장. 이도진의 등장
예전에 건로 여진족과 와단 가한이 대전을 치르고 있을 때, 당시 황제가 요동 지역의 대군에게 지난날의 악감정은 풀고 와단 가한과 함께 건로를 협공하라고 명령했다. 요동 대군도 미련하지는 않아서 건로와 와단 가한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를 틈타서 빼앗겼던 땅을 되찾으려 했었다.
하지만 건로의 정예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동 대군은 연달아 참패했고, 이후에는 아예 건로를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후에 만주의 여진왕이 먼저 자진해서 요동 대군에게 평화 조약을 제안했고, 요동 대군에게 군량과 은자를 내어주는 바람에 전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영설 공주가 말했다.
“두변, 건로의 여진족이 동몽골을 정복하게 되면, 병력이 40만 이상에 육박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
두변이 백색부에 있으면서 여씨의 반란이 위태롭다고 느꼈지만, 제국의 전체적인 국면을 보았을 때 요동 지역의 국면이 서남 지역의 국면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위태로웠다.
서남에서 여씨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서남의 몇 개 행성이 함락해서 4분의 1의 영토를 잃게 된다.
하지만 요동 지역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건로의 대군이 곧장 경성으로 들이닥칠 것이고, 그땐 제국이 정말 망조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영설 공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요동 지역에는 대녕 제국의 정예병 수십만 대군이 주둔하고 있고, 무장 집단의 힘 태반이 그곳에 있다. 그들도 자신들을 위해서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수비할 것이다. 그 덕에 요동 지역의 국면이 위험하긴 해도 아직 버틸 수 있다.”
대녕 제국의 무장 집단은 다른 지구 명대의 무장 집단보다 훨씬 더 세력이 강력했다. 동시에 건로도 후금(後金)보다 훨씬 더 강력해 보였다.
이 세계는 무도로 궐기하는 곳이다 보니, 개인의 용맹함과 전투력이 명대 시기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된 모양이었다.
두변이 갑자기 말했다.
“공주 전하, 공주 전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사람이 완안영도라는 걸 압니다.”
영설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땐 내가 아직 어렸을 때다. 그리고 그땐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고, 대녕 제국의 제일 청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용맹했지. 나도 그를 잠시 동경했을 뿐이지, 지금은 그놈의 목을 베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그 자식이 감히 공주 전하의 혼기를 늦추다니요.”
영설 공주가 두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런 놈이랑 나를 엮지 말아라. 원래도 아무런 사이 아니었으니까.”
영설 공주가 이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 참, 옥진 군주에게서 서신을 받았는데, 옥진이 거기 뭐라고 쓴 줄 아나?”
두변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 멍청한 여인이 설마 말하면 안 될 걸 말한 건 아니겠지?’
영설 공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두변, 정말 야심이 어마어마하더군? 나랑 옥진 군주 둘 다 부인으로 삼고 싶다고? 환관에게 그렇게 큰 포부가 있을 줄 몰랐군. 내가 정말 몰라봤었어.”
두변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 항상 안녕하시길 바라고,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두변은 당장 쥐구멍이라도 파서 쏙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영설 공주가 옥진 군주의 서신을 받았을 때 화가 나긴커녕 이 어린 환관이 마냥 우습고 귀여웠다고 여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영설 공주에게 공주라는 삶은 너무도 고단하고 책임감이 막중할 뿐이었다.
두변이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떠한 권력 관계에 의해 영설 공주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문의 자제들처럼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구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구애는 영설 공주 스스로를 하나의 물건처럼 느껴지게 할 뿐이었다.
그때 두변의 머릿속에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황제를 구하라 임무 성공. 영설 공주의 호감도 15 상승. 호감도 현재 55가 되었다.’
두변과 계표표는 백색부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돌아갈 때는 경성으로 올 때처럼 목숨 걸고 달리지 않아도 됐고, 백 리에 한 번씩 말을 바꿔탈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눈에 띄지 않게 변장한 상태였고, 두변이 현재로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들의 뒤를 밟으면서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두 사람은 꼬박 열흘 동안 몇천 리 길을 달렸다.
호북(湖北) 지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쉴 곳을 찾았다.
음력 10월 말인지라, 호북 날씨는 무척 추웠다.
몸을 씻고 객잔으로 돌아온 두변은 곧바로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어라? 표표 누이가 향정(香精)을 바꿨나? 근데 기운은 똑같군. 아주 강력하고 용맹한 내력의 기운 말이야.’
방 안에는 불이 다 꺼져 있었고, 계표표는 표범 같은 몸매로 무릎을 꿇고 한 곳을 향해 엎드린 채 절을 올리고 있었다.
폭발적인 몸매로 엎드려 있으니, 그녀의 몸매가 더욱 굴곡져 보였다.
두변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두변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누이, 너무 경건한 거 아닙니까. 이런 걸 하는데 기도까지 올리다니요.”
하지만 여인의 가슴을 만지는 순간, 두변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계표표의 가슴은 이렇게 말랑하지 않은데?
이상하다. 표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똑같은데?
이때, 여인이 드디어 몸을 돌리는데, 이도진의 얼굴에 살기가 가득했다.
‘북명검파의 이도진? 무공 절정인 데다 영종오와 10년을 싸운 절대급 무도 강자? 여천천의 스승? 천도회 이도전의 여동생? 올해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나? 아니지, 마흔이 넘었나?’
두변은 화들짝 놀라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었다. 난 죽었어. 호랑이 엉덩이는 만져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이 여인은 호랑이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무서운 존재잖아. 그런데 내가 이 호랑이의 어딜 만진 거야?
아니, 시스템! 왜 아무 말도 안 해준 거야!’
두변이 재빨리 손을 빼고 찬란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 종사,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방을 잘못 들어왔나 보네요.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바로요.”
이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들어온 게 아니다. 내가 너를 찾아온 것이다.”
“어휴. 이 종사. 뭐 분부하실 일이 있다면 수하를 시키셔도 됐을 텐데요. 이렇게 직접 행차까지 해주실 것까지야.”
“내가 널 죽이러 온 거라면, 네게 자살하라고 분부하면 되는 것이냐.”
두변이 경악했다.
“예? 그때 여천천과의 결투에서 영종오 대종사와 함께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두 분께서 서로의 제자를 위해 복수하지 않기로요.”
“여천천의 복수만을 위해 온 게 아니다. 네가 여천천을 죽인 건 북명검파가 네놈을 한 번 더 주의하게 된 것뿐이다. 하지만 넌 염효의 대군을 전멸시켰고, 계청주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너는 우리 북명검파의 이익을 위협하는 존재이니, 윗선에서 너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사실 북명검파의 이익을 건드리는 일을 했으니,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우리라.
“가자. 지금 떠난다.”
이도진이 말하면서 두변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의 무공 수준이 상당히 차이가 나지만, 이대로 순순히 이도진을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두변이 본능적으로 단혼영을 쏘아내려던 찰나,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가라.’
두변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진짜, 더럽게 늦게 나타나네.’
“이 종사, 잠시만요. 계표표 누이에게 쪽지 한 장만 남기고요.”
두변은 바로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먼저 떠납니다. 아무 걱정 말고 혼자 먼저 돌아가요.’
그 순간, 이도진이 그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가자.”
두변의 의식 깊은 곳에서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시스템! 이게 도대체 뭡니까!’
두변이 짜증을 냈다.
‘넌 북명검파의 많은 장치를 훼손했다. 북명검파는 이미 너를 적으로 간주했고, 오늘 이도진의 손을 벗어난다고 해도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널 죽일 것이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사람을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두변이 흠칫 놀랐다.
시스템의 말이 맞긴 했다.
북명검파는 이 세계의 블랙홀과도 같으니, 그 어떤 임무도 북명검파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두변의 친모도 북명검파의 제자였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이도진이 온 것은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하다. 너를 일부러 찾아온 건 아니지만, 우연히 가는 길이 겹쳐서 널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이도진이 네 방에서 널 기다리게 된 것이고, 네게 미리 알리지 않은 이유는 네가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마음껏 무슨 실력을 발휘하는데요? 제가 이도진의 가슴을 만진 거요?’
‘그래. 아주 잘하더군.’
‘세상에. 참 고맙습니다.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는 시스템은 또 처음이네. 그나저나 이도진이 뭘 하려는 겁니까?’
‘이도진은 너를 북명검파의 대은구도(大恩仇島)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대은구도의 장로 앞에서 너를 죽이는 게 그녀의 이번 임무다. 대은구도에서 너를 죽이기 위해서 이도진을 보낸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습니까?’
‘이도진을 정복해라.’
‘뭐라고요? 이도진이 미인이긴 한데, 지금 나이가 마흔이 넘지 않았나요?’
‘숙주, 생각이 너무 음험한 거 아니냐? 내가 말한 정복은 그녀를 스승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그래야 네가 북명검파의 제자가 될 것이고, 북명검파의 추격을 면할 수 있다. 물론 너희 사제지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도진을 스승으로 삼으면, 북명검파의 호신용 부적을 하나 얻게 되는 것 외에 또 다른 좋은 점이 있나요? 전 언젠가 북명검파를 없앨 생각이거든요. 제 사부 영종오 대종사가 이도진보다 훨씬 더 박학다식하기도 하고요.’
‘북명검파는 동아시아에서 제일 강한 무도 세력이다. 그들은 이계와 이 세계에 연관된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북명검파가 가진 보물이 무궁무진하다. 무도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지. 동아시아에서 내로라할 만한 인물들은 다 북명검파에 와서 무도 수련을 한다. 혹은 간접적으로 북명검파의 제자이거나.’
기이한 불빛이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북명검파의 모든 이를 적으로 돌리지는 말아라. 그리고 그것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갖지 말고.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너는 북명검파의 종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될 것이고, 이 강력한 무도 세력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예? 뭐라고요?’
‘북명검파의 종주가 되어야만 천하제일 고수가 될 수 있다.’
시스템이 계획한 노선이 이렇게나 파격적일 줄이야.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네 첫걸음은 이도진을 정복해서 그녀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영종오가 박학다식한 사람이지만, 이론적인 것에 치중된 사람이다. 무도 과학자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하지만 수련의 자원, 수련할 때 쓰이는 보물, 비급을 생각한다면, 이도진의 제자가 되어야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영종오는 영원히 두변의 사부이자 그의 가족이리라.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미래의 사명을 위해서라면 이도진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꼭 운명의 장난과도 같았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사실상 이도진이 네 적이라곤 하지만, 네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한 적은 없다. 그리고 네 의부 이문회에게도 무슨 짓을 한 적도 없으니, 괜히 마음의 짐을 가질 필요 없다. 그녀는 네가 북명검파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두변이 물었다.
‘그럼 전 뭘 해야 합니까? 이도진의 성격적 결함은 뭐고요? 그리고 제가 수련하는 내공이 이도진의 내공과 다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제자가 된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