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장. 친모와의 결렬
이도진! 드디어 네가 미쳤구나.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이도진은 자리에 앉은 채로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그나마 두변과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창피함이 덜해져서, 십여 미터까지 물러나서는 다시 두변을 바라보았다.
두변은 누가 봐도 불쌍한 모양새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이도진은 하룻밤 사이에 체내에 남아 있던 마합산이 전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숙여보니 배에 난 상처도 봉합되었고, 장포도 꾸깃하긴 하지만 깨끗해진 상태였다.
이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변이 내 몸을 본 건가?
아니지. 괜찮아. 두변은 환관이잖아. 진정한 사내가 아니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두변이 그럼 내 몸을 본 유일한 남자인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도진은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몇십 년 동안 꼭꼭 숨겨둔 얼음보다 깨끗하고 투명한 몸을 열여덟 살짜리 어린 환관에게 보였다는 게 화가 났다.
하지만 이 아이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이 아이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배의 상처를 봉합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결례되는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자신이 이 아이가 자는 사이에 괴롭힌 것이니까.
이도진은 복잡한 심정으로 두변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이 아이가 천적인데, 왜 중요한 때에 자길 해치지 않고 구해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변이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이 와중에 어떻게 잠을 자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변은 내가 북명검파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보낸 사람인 걸 알잖아. 분명히 도망칠 기회가 있었는데 왜 도망치지 않았던 거지?’
이도진은 두변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는 두변을 잠시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두변, 내 목숨을 한 번 살려줬으니, 나도 오늘 너를 한 번 놓아주겠다. 오늘 이후로 북명검파의 다른 사람의 손에 붙잡히지 않길 바라야 할 것이다. 북명검파 대은구도의 주살 명단에 이름이 올랐으니, 네가 살날이 그리 많지 않아. 내가 돌아가서 융통해보겠지만, 네 목숨이 어떻게 될지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
이도진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두변이 깨어나기도 전에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두변은 구양진경을 하는 중이라 가장 편안한 정신 상태로 온몸의 모공을 확장한 채 천지 원기를 흡입하면서 잠들어 있었다.
시스템이 이도진이 유일한 열쇠라고 말했건만, 두변은 이도진이 떠나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시스템의 계획대로 되려면 두변은 이제 뭘 해야 할까?
이도진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또 다른 새하얀 여인이 두변의 앞에 나타났다.
이 여인은 이도진보다 더 아름답고 젊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한기와 독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두변이 깨어나서 이 여인을 보게 된다면, 그는 아마 막한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여인은 막한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막한보다 더 악독해 보였고, 더 화려했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이 여인은 기음음만큼 절세미인이었다.
이 여인은 막영 토사의 여동생이자, 막씨 가문을 헌신짝 보듯 무시하는 막추였다.
막추에게는 또 다른 신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천마교주 기음음의 연적으로, 북명검파 종주 영도현이 마음에 뒀던 여인이었다.
이도진이 정상급 무도 종사라면, 막추는 진정한 대종사였다.
뒤늦게 산속으로 쫓아 들어온 막추는 이도진이 떠난 흔적을 발견하고 낮게 이를 갈았다.
“이도진! 네년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 이거지.”
막추의 살벌한 시선이 두변에게 떨어졌다.
“어린 환관놈이 감히 내 일을 망쳐?”
막추가 곧바로 두변을 죽일 기세로 검을 뽑았다.
막추는 이도진과 동시에 우연히 ‘혈성대법’의 행방을 알게 되어 이도진을 마련교의 함정에 빠트린 당사자였다.
검으로 두변을 내리치려던 찰나, 막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검을 거뒀다. 그녀는 두변을 말 등 위에 태우고는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그리고 다른 말에 올라탄 채 그대로 두변을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기이한 불빛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두변을 수면 상태로 유지했다.
‘숙주 두변, 북명검파 임무 정상 진행 중!’
동아시아의 그 어떤 세력, 그 어떤 왕후나 장군의 가문에도 북명검파의 제자가 꼭 한 명씩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가주 본인이 북명검파의 직속 제자인 경우도 다수였다.
북명검파는 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단약과 비급, 동굴 지도와 이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북명검파의 선조는 ‘북명대법’ 하나만으로 북명검파 문파를 설립했고, 벌써 천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북명검파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북명검파는 몇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곳이 바로 대은구도였다.
나머지 섬들은 하나같이 비밀리에 감춰져 있었고, 북명검파의 제자들도 다른 섬들을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무림 세계에서는 북명검파가 곧 대은구도이고, 바깥 세계에서 돌아다니는 북명검파의 제자들 전부 대은구도의 사도들이라고 보면 된다.
정확히 말하면 세속 무림의 주도자가 바로 대은구도인 셈이다.
대은구도에는 명단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 어떤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또 어떤 사람들을 죽여야 할지가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이번에 두변이 염효를 죽이고, 계청주를 설득해서 그가 중립 입장을 포기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탓에 북명검파의 일부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래서 두변이 대은구도의 주살 명단에 오른 것이고, 이도진이 그를 잡아오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신선경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천지 원기가 흘러넘칠 정도로 많았고, 매우 아득하고 요원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청명했고,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이 모두 영기를 품은 것처럼 생기 있어 보였다.
이 신선경과도 같은 곳이 바로 북명검파의 대은구도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에겐 이곳은 영원한 비밀이어서 북명검파의 고위 제자가 아닌 이상, 북명검파로 들어오는 길이 어딘지도 모른다.
두변이 눈을 뜬 곳은 커다란 대전 안이었는데, 사방에 벽은 없고 천장만 있었다. 그러니 그림 같은 풍경이 사방에 펼쳐지고, 천장 위에는 학이 서쪽으로 날아가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대리석이 쫙 깔린 대전의 중앙에는 구멍이 있는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아래에는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대은구도 도주가 대전의 상석에 앉아 있고 그 주위로 수십 명의 사람이 얼핏 보였다.
이 대전 자체가 산꼭대기에 자리한 터라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덕분에 햇빛이 대은구도 도주의 얼굴을 비추건만, 두변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막추가 두변을 데리고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하(何) 도주, 본좌가 밖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대은구도 명단에 있는 두변을 발견해서 잡아 왔습니다.”
막추가 이도진을 쳐다보았다.
이도진은 두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어렵게 놓아줬더니 곧바로 막추에게 붙잡혀 올 줄이야!
“두변?”
북명검파 대은구도 도주가 명단을 가져와서 펼쳤다. 도주는 두변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
“아 여기 있군. 우리 북명검파의 바둑알 두 개를 잡아먹은 정급(丁級) 죄인.”
북명검파 고수 두 명이 두변을 처형하려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도진이 서둘러 말했다.
“도주, 두변은 북명검파의 정급 주살(誅殺) 명단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우리 북명검파에서는 재능이 출중한 인재들을 많이 양성하지 않습니까. 두변의 재능도 만만치 않은데, 우리 사람으로 만드는 건 어떠신지요?
그리고 두변은 이미 절반 정도 우리 북명검파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은구도 도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조사해본 결과, 두변의 원래 이름은 두헌이고, 희민지(姬敏芝) 사저의 친아들입니다.”
두변은 자신의 기억 속을 빠르게 뒤져서 고아하고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을 기억해냈다.
두변의 친모인 희민지는 조정의 훈귀인 연북 후작부의 소저였다. 이도진이 사저라고 부르는 걸 보니, 희민지가 이도진의 선배 격인 듯한데 도주와 가까이 앉아 있었다.
이도진이 말을 이었다.
“희 사저, 두변의 문무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시잖아요. 두변을 제자로 삼으시는 건 어떠세요? 창과 방패를 옥과 비단으로 만들 좋은 기회잖아요.(干戈爲玉帛: 적대 관계가 우호 관계가 되다.)”
대은구도 도주가 희민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 두변이라는 자가 네 아들이었느냐? 두변을 제자로 받아들여서 주살 명단에서 지워줄까?”
이때, 다른 여인이 끼어들었다.
두변의 약혼자였던 방청의가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두변, 두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고 아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고 다니던 거 아닌가? 어쩌다가 이제 와서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희민지 사숙에게 빌붙는 거지?”
두변이 머릿속으로 시스템과 교류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어요?’
‘예상했지. 원래의 계획대로 간다. 네 체질 향상, 무도 수준 향상, 전설급 비급을 위해서라면, 꼭 북명검파의 제자로 들어가야 한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희 사저, 두변은 사저의 친아들이잖아요. 설마 친아들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건 아니죠? 둘 사이에 어떤 오해나 은원이 있는 건 알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요.”
이도진의 말에 희민지가 두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지난번 경성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말고는 자신의 아들을 못 본 지 정말 오래였다.
희민지는 안북 후작부의 천금 소저이지만, 일곱 살 때부터 북명검파에 보내져서 무공을 배웠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북명검파와 가족의 지시에 따라 두회에게 시집을 갔고, 두헌을 낳은 지 반 년도 안 돼서 다시 북명검파로 돌아왔다.
천부적인 무도 재능이 워낙 뛰어난지라,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반은 집에, 반은 북명검파에 있었다.
북명검파에 곧 성대한 의식이 치러질 예정이라서, 희민지를 포함해서 방청의도 대은구도에 와 있던 상태였다.
두변을 한참 바라보던 희민지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변, 네가 넷째 숙부와 얘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넷째 숙부가 네게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더구나.”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네 아버지와 이 얘기를 해본 적 있는데, 네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더구나. 하지만 이번엔 내가 결정하겠다. 두씨 가문으로 돌아와라. 주살 명단에 네 이름이 올라가 있긴 하지만, 등급이 낮은 편에 속하기도 하고, 네 천부적인 무도 재능이 뛰어나다 보니, 네가 우리 대은구도의 누구를 사부로 모셔도 죽음은 면할 수 있다.”
두변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두변은 희민지와 많은 닮은 편이었다. 두변의 미모는 바로 희민지에게 받은 것이리라.
두변이 갑자기 물었다.
“그해 방청의가 제 존재 자체가 자기 명성에 먹칠하는 거라면서 저를 두씨 가문에서 증발시켜 달라고 했었죠. 그때 어디 계셨습니까?”
희민지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당시에 나는 북명검파에서 무도 수준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
“만약 제가 두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제 생사를 신경쓰지 않으실 겁니까?”
“오해하지 말거라.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덮어두는 게 좋다.”
이때 방청의가 끼어들었다.
“두변, 황제가 당신을 제국의 남작으로 봉해줬다고? 일부러 두씨 가문의 체면을 깎으려고 그런 거 아닌가? 두회 대인, 두강 대인께서도 작위가 없는데, 당신은 있잖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다시 두씨 가문에 빌붙으려고? 두변, 못하는 게 없는 천재라더니, 알고 보니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네.”
방청의가 희민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 시어머니이시기도 제 사숙이시기도 하지만, 조언 하나만 드리지요. 마음 약해지지 마세요. 농부와 뱀 이야기를 떠올리세요.”
희민지가 두변에게 물었다.
“어떻게 결정할 거니?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너를 직계 제자로 받아들일 순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를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북명검파의 사람이 될 테니, 주살 명단에서 이름을 지울 수 있다.”
“거절하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