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장. 생사를 건 선택
하지만 시스템은 꼭 전원이 나간 것처럼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얼굴 없는 노인이 죽었는데도 시스템과 교류를 할 수 없다고?
시스템이 대답하지 않자, 두변은 명상 세계에서 시뮬레이션이라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꿈속 세계의 시뮬레이션도 불가능했다.
두변은 그제야 깨달으면서 눈을 떴다.
견사 대사의 동굴에 있을 때처럼, 모든 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지혜로만 결정해야 하는구나!
왼쪽이 검은색, 오른쪽이 하얀색. 생사를 건 선택이었다.
두변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 왼쪽 검은색 문을 선택했다.
일부러 암흑에 떨어지고자 검은색을 선택한 건 아니었고, 두변이라는 자가 태생이 비관주의자여서 그랬다.
전 세계의 위인들만 보아도, 긍정적인 사람들보다 비관주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비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사람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 더 나은 것을 탐구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어떤 비관주의자들은 결국 암흑을 이기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굴원(屈原: 초나라 유명한 정치가, 문학가)이 그랬듯이 말이다.
또 어떤 비관주의자들은 기적적으로 암흑을 이겨낸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이끌고 빛을 향해 걷고, 끝내 광명을 찾게 된다.
지금 당장 걷는 길에 빛이 없다 해도, 지금 가는 길이 완전히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의 문명은 언제나 그렇듯이 굴곡진 채로 전진한다.
그래서일까. 두변은 검은색 문을 선택했다.
두변은 암흑 속에서 빛을 찾기로 결심했고, 끝내 그 빛을 찾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하얀색 문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 이 세계가 빛으로 가득 찬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두변은 그런 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변은 문 뒤에 뭐가 있을지 몰라서 일단 숨을 참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지옥일까? 천국일까? 아니면, 그냥 속세일까?
검은색 문을 연 뒤, 두변이 보게 된 건 그가 상상한 것이기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작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등불 세 개, 선반 세 개가 차례로 놓여 있었는데, 선반 위에는 비급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첫 번째 선반에 놓인 비급을 쳐다보았다.
절대 하등 비급 ‘능파미보(凌波微步)’
비급의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주석이 달려 있었다.
‘현존 세계 최강 경공 보법(步法) 중 하나.’
두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배웠던 육맥신검이나 구양진경은 현대 지구의 무협물에서 들어봤음직한 무공이지만, 실제의 무공 위력은 상상 초월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분명 다른 이름이 있을 테지만, 이전의 숙주가 어디서 들어봤던 익숙한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저 얼굴 없는 노인이 이전 숙주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능파미보’ 같은 이름을 알 수 있을까.
혹시 북명검파의 선조 중에도 초월자가 있있던 걸까.
두변의 시선이 두 번째 선반으로 향했다.
절대 중급 비급 ‘유명신장(幽冥神掌)’.
‘이 장법(掌法)을 수련하게 되면, 내력에 끔찍한 유명(幽冥: 저승)의 기운이 깃들게 된다. 이 무공으로 공격당한 사람은 무공 수준이 공격한 자보다 2급 높아도 저승의 기운이 몸속에 침투되는 걸 막지 못한다. 저승의 기운은 생기를 좀먹다가 상대방을 죽게 만든다.’
두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유명진기(幽冥眞氣)는 검고 차가운 기운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저승의 기운을 뜻하는구나!
누구든 이 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으로 저승의 기운에 휩싸이게 되고!
저승에서 온 이 비급만 있다면, 누굴 만나도 한 번쯤 겨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무공이 절대 중등 비급이라니. 절대 상등 비급은 도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공인 거야?
두변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마지막 선반으로 시선을 옮겼다.
절대 상급 비급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특수한 내력 기장(氣場)을 만들어서 상대방의 어떤 내력 공격도 반사할 수 있다. 상대방의 무공 수준이 당신보다 2급 높아도 이 무공 운용이 가능하다.’
또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무공의 이름만 같을 뿐, 실제 무공의 원리는 완전히 달랐다.
이 세계의 ‘건곤대나이’는 특수한 내력 기장을 바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지, 다른 무협물에서 봤던 것처럼 두 손을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이 건곤대나이는 최고의 방어 무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공과 함께 육맥신검까지 동시에 쓰게 된다면, 자신은 6품 하등 무사임에도 불구하고 4품 무사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방어와 동시에 반격할 기회를 만드는 절호의 기술이라 할 만했다.
두변은 세 비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절대 하급 비급 ‘능파미보’, 절대 중급 비급 ‘유명신장’, 절대 상급 비급 ‘건곤대나이’.
두변은 이 세 권의 비급 중 단 하나만 고를 수 있었다.
정말 행복하지만 괴로운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세 권의 절대 비급이 손 닿을 거리에 있고, 어느 한 권을 골라도 무척 값진 수확이리라.
‘능파미보’는 경공 보법계의 무적, ‘유명신장’은 공격계의 무적, ‘건곤대나이’는 방어, 반격계의 무적.
누구나 이 세 권의 비급을 보게 된다면, 세 권을 전부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두변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단 하나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누구든 두변 같은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아마 다들 ‘건곤대나이’를 선택할 것이다.
‘건곤대나이’는 특별한 운용 동작 없이 곧바로 내력 기장을 만들어 내서 상대의 공격을 반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두변은 자신의 선택이 제 운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 세 권 중 한 권을 제대로 선택해야만 다음 관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두변은 침착하게 득과 실을 생각했다.
‘당장 발밑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공격을 선택할 것인가, 방어와 반격을 선택할 것인가?’
만약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바로 다음 관문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두변은 얼굴 없는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눈을 감았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두변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을 때, 공격을 먼저 배워야 할까, 방어와 반격을 먼저 배워야 할까, 아니면 걸음마부터 배워야 할까?
두변은 머릿속에서 답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먼저 걸음마를 뗀 뒤에 공격을 배우고, 방어와 반격을 배운다.
당장 발밑의 길을 잘 걸을 수 있어야만 앞으로 나갈 길이 생긴다.
두변은 세 권의 비급 중에서 등급이 제일 낮은 절대 하급 비급 ‘능파미보’를 고르기로 결심했다.
생각을 마친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곧장 첫 번째 선반 위에 놓인 비급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능파미보’ 비급에 닿는 순간, 나머지 두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절대 비급들에 화르륵 불이 붙으면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두변의 예상대로 그에게 주어진 비급은 단 한 권이었다.
두변은 ‘능파미보’ 비급을 펼쳤다.
역시 두변이 생각했던 대로 ‘능파미보’는 현대 지구의 무협물에서 보던 무공과 완전히 달랐다. 이 무공은 주역(周易)과도, 음양 팔괘와도 완전히 무관했다.
‘능파미보’는 진정한 경공법 비급이었다.
체내에서부터 밖으로 내력 기장을 만들어 내서 몸을 거의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서 몸이 제비처럼 가벼워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최소한의 현기 내력으로 중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신비롭고 강력한 기장은 주위 환경에 따라서 보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바람이 엄청 부는 환경에서는 바람의 힘을 역이용할 수 있고, 상대와 전투중일 때는 상대의 공격 내력을 이용해서 피하거나 반격할 수 있다.
어쨌든 ‘능파미보’는 역대급 경공 보법이었다.
이 무공을 사용하면 몸을 깃털보다 가볍게 만들 수 있고, 무척 빠른 속도로 보법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두변은 대은구도 도주가 바로 이 무공을 이용해서 바다를 가로질렀다고 생각했다.
비급은 약 6백 장 정도 되었는데, 절반이 문자이고 절반이 그림이었다.
이 비급을 정상적으로 배우고 깨우치려면 최소 반년 이상이 걸리고, 완전히 습득하기까지 최소 3년이 걸리겠지만, 두변 아닌가!
두변은 빠르게 ‘능파미보’ 비급을 읽고, 곧바로 명상 세계로 들어가서 한 장씩 내용을 곱씹었다.
십여 배 뛰어난 두뇌 능력 덕분에 어렵기만 한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두변은 명상 세계에서 단 하루 만에 이 비급을 통째로 외웠다.
이어서 그가 해야 할 건 비급 내용에 대한 해석이었다.
이 비급의 원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다음에 도안과 도안을 연결해서 한 땀 한 땀 연구해야 했다.
두변은 명상 세계에서 보름에 걸쳐서 ‘능파미보’의 원리를 완전히 깨달았다.
원리를 깨우친 뒤에는 연습뿐이었다.
후우우.
공법을 운용하자마자 두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허공에 약 1미터 정도 떠 있었지만, 발끝으로 가볍게 허공을 디디자마자 몸이 6미터 밖까지 날아갔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자, 심지어 바람에 몸을 실어서 더욱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두변은 공기에 몸을 맡기면서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을 꿈꾸지 않을까.
사실 두변은 지금 중력을 무시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에너지 저항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 짜릿한 느낌을 뭐라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유명신장’이나 ‘건곤대나이’ 대신 ‘능파미보’를 선택하면서 당연히 조금은 아쉬웠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나머지 두 비급에 대한 아쉬움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능파미보’를 선택한 것이 천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두변은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는 사람처럼 피곤한 줄도 모르게 끊임없이 능파미보를 운영했다.
이 빠른 속도는 야생마의 질주 속도보다 빠르지 않은가!
정말 하늘을 거스르는 경공 아닌가!
하지만…….
불과 5분 후, 두변의 내력이 말끔히 소모되고 말았다.
이 경공은 너무도 놀라운 무공인 게 맞지만, 현기 내력의 소모량이 상당했다.
두변이 처음으로 이 무공을 운영하면서 효율성 없이 현기 내력을 사용한 탓도 있었다.
그나마 이곳이 명상 세계여서 다행이었다.
두변은 명상 세계인 만큼 빠르게 현기 내력을 다시 회복했고, 그렇게 끊임없이 경공을 연습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두변의 현기 내력 운용 효율성도 올라갔고, 경공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점점 더 길어졌다.
두변은 명상 세계에서 열 번, 백 번, 천 번을 연습했다.
두변이 마지막으로 연습했을 때, 현기 내력을 모두 소모하는 데 20분이 걸렸고, 그 20분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백 리가 훨씬 넘었다.
명상 세계에서 이 무공을 이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두변은 곧 눈을 떴다.
그가 바닥을 향해 발끝을 톡 치자, 그의 몸이 7미터 밖까지 날아갔다.
중력을 무시하는 이 짜릿한 느낌이 두변의 온몸을 감쌌다.
첫 번째 방에서의 학습이 끝났으니, 다시 출발해야 했다.
그의 눈앞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이번에는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두변이 문을 열자, 자욱한 초록색 안개가 그를 덮쳤다.
맹독이다!
두변이 재빨리 숨을 참았지만, 피부로 침투하는 독 때문에 정신이 자꾸만 아득해졌다.
두변이 눈살을 찌푸리고 앞을 내다보았지만, 족히 만 미터는 넘어 보이는 동굴이 전부 이 자욱한 독 안개로 가득했다.
만 미터의 끝에는 동굴의 출구가 보였다.
하지만 출구까지 제대로 된 길도 없었고, 7미터 간격으로 우뚝 솟아있는 돌기둥이 전부였다. 돌기둥이 출구까지 일자로 쭉 늘어서 있어서, 돌기둥을 제대로 밟고 뛰면 출구까지 갈 수도 있을 듯했다.
돌기둥마다 7미터 간격이 있다는 건 무얼 뜻할까.
두변이 조금 전에 ‘유명신장’이나 ‘건곤대나이’를 선택했다면 이 관문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 관문은 두변에게 걸을 줄 알아야만 공격을 하고, 방어를 하고, 반격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인생의 원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후우욱.
두변은 경공을 이용해서 발끝을 바닥에 톡 하고 쳤다.
그의 몸이 7미터 밖까지 날아가서 다음 돌기둥 위에 잠깐 멈춰 섰다.
그는 숨을 참고 연속으로 다음 돌기둥을 향해 뛰었다.
독 안개가 두변의 피부를 통해 몸에 침투하고는 있지만, 재빠르게 벗어나기만 한다면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진 못할 것이다.
두변이 무중력 상태를 만끽하면서 잠자리가 수면을 스치듯 가볍게 돌기둥을 밟으며 날아갔다.
두변은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동굴을 가로질렀고, 출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두변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첫 번째 관문이 끝났다.
두변의 선택은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