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장. 겸손한 사람
첫 번째 관문의 출구를 뚫고 나가자, 그의 앞에 또다시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한쪽 문에는 ‘상천(上天)’, 다른 문에는 ‘입지(入地)’가 쓰여 있었다.
또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두변은 상천을 선택할까, 입지를 선택할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죽고, 옳은 선택을 하면 무궁무진한 수확을 얻을 것이다.
두변은 자신이 내리는 선택마다 인생의 원리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하늘로 향하는 상천의 문은 오만함을 뜻하고, 땅으로 들어가는 입지의 문은 겸손함을 뜻한다.
두변은 오만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는 오만한 사람이 아니다.
두변은 오만하기보단 누군가에게 자랑으로 여길 만한 사람이고, 그의 자랑스러운 능력이 그의 인생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
경성에서 황제의 목숨을 구할 때나, 경성으로 가는 길에 당엄을 마주칠 때나, 두변의 태도는 몹시 겸손했다.
황제가 두변을 제국의 남작으로 봉했을 때, 그는 황제에게 황송해했다. 대녕 제국 역사에서 환관에게 작위를 하사한 황제는 없었기에 두변은 천윤제가 느낄 부담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없지만,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오만하거나 남들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변은 심호흡을 한 뒤, 입지의 문을 열었다.
두변은 문 뒤에 뭐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지라 문을 열면서 몹시 긴장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니, 그곳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나타나거나 위험한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문 뒤에는 그저 땅속으로 향하는 길고 긴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변은 길을 따라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5백 미터 정도 갔을 때, 갈림길이 나타났다.
두변은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두 갈림길은 차이 하나 없이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두변은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왼쪽 길을 선택했다.
몇백 미터쯤 걸었을 때, 두변의 앞에 또 한 번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왼쪽, 중앙, 오른쪽 세 갈래로 길이 나뉘었다.
두변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조금 전에 했던 선택처럼 왼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묵묵히 몇백 미터 걸어가던 두변의 눈앞에 네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두변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직감대로 가장 왼쪽의 갈림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끝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몇백 미터가 지나자, 이번엔 다섯 갈래로 나뉜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 뒤로 두변은 몇백 미터 간격으로 여섯 갈래, 일곱 갈래, 여덟 갈래, 아홉 갈래의 갈림길을 지나쳤고, 그는 매번 가장 왼쪽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두변은 열 개 갈래로 나뉜 갈림길이 나타나길 기다렸는데, 그를 기다리는 건 두꺼운 벽이었다.
여기서 더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건 마치 인생과도 같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두변은 자신의 직감대로 왼쪽 길을 고수하며 끝까지 걸었고, 그 길은 결국 막다른 길이었다.
두변은 깊이 심호흡한 뒤, 왔던 길로 다시 걸어서 원점으로 돌아왔다.
두변은 원점에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그는 지난번과 달리 오른쪽 길을 택했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는 중간을, 세 번째 갈림길에서는 두 번째 길을, 네 번째 갈림길에서도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아홉 번째 갈림길까지 계속 두 번째 갈래를 선택했던 두변은 결국 또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바위벽이 길의 끝을 막고 있었다.
두변은 포기하지 않고 수학의 배제 공식을 사용해서 모든 갈림길 조합을 걸어봤지만, 매번 막다른 길로 끝이 났다.
이곳은 애초에 출구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두변이 어떤 갈림길을 택해도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내가 미래에 어떤 길을 가더라도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는 걸 뜻하는 걸까?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봤는데도 나갈 길이 없는데, 이제 어떡하지?
무력으로 길을 한 번 뚫어봐?
두변은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벽을 향해 육맥신검을 운용했다.
하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벽면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겠지.
혹시 여기가 이동하는 미궁 아닐까? 기다리다 보면 이 벽이 옮겨지면서 새로운 길이 나타나는 건가?
두변은 바위벽 앞에 털썩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위벽에 변화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한 시진이 지나고, 세 시진이 지나고, 다섯 시진이 지났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이곳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막다른 길은 여전히 막다른 길이었다.
입지의 문을 선택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나? 상천의 문이 정답이었던 건가?
아니야. 그럴 리 없지. 상천의 문을 선택했다면, 아예 선택할 갈림길도 없이 내가 죽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입지의 문은 겉보기엔 막다른 길만 있어 보이지만, 분명히 살길을 찾아낼 방법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살길을 어떻게 찾아내지? 사지에 몰아넣어야만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는다지만, 이대로 간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두변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자신의 이마를 탁하고 쳤다.
멍청한 놈! 바위벽이 길을 막았다고 해서 그게 막다른 길이야? 바위벽도 길일 수도 있잖아. 입지의 길이라곤 하지만, 위로 기어 올라갈 수도 있는 거잖아!
막다른 길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틀에 박힌 사고가 나를 사지로 몰아넣을 뿐!
두변이 영설 공주가 선물했던 황금설 비수를 꺼내서 바위벽을 비수로 찍으면서 능파미보를 이용해서 벽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슉, 슉, 슉.
두변은 비수로 바위벽을 찍으면서 반동을 이용해서 빠르게 위로 기어 올라갔다.
2분이 지날 때쯤, 두변은 벌써 몇백 미터 높이까지 기어올랐다.
이 바위벽은 사실 절벽이었고, 몇백 미터 높이의 절벽 끝은 평지였다.
두변은 절벽의 끝인 평지에 올라간 뒤, 절벽의 반대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몇만 미터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이 절벽의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저 깊은 심연에서 지옥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두변은 육맥신검 소양검을 절벽 아래로 쏘아냈다.
소양검이 땅에 닿아서 반사되는 소리를 듣고 깊이를 가늠해보려고 한 것이지만, 소양검은 바다에 빠진 바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입지의 길이로구나.
조금 전에 지나쳤던 무수히 많은 갈림길과 막다른 길, 그리고 끝내 생각해내서 기어올랐던 이 절벽까지. 사실은 다 나를 이 절벽에서 떨어뜨리기 위함인 건가? 내가 여기서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리고 죽을 것 같은데.
두변은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일종의 모험이라기보단, 인생의 철학을 배우는 수업, 혹은 미래 인생에 대한 계시록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두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온몸의 힘을 빼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슈우우우우웅.
두변의 몸이 끊임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심연에는 그의 피를 빨아들이는 흡혈 괴인도, 그를 감싸는 괴수도 없었다.
풍덩!
두변은 평범한 동굴 속의 심연에 빠진 것처럼 고인 물에 빠졌다.
물의 깊이가 꽤 깊은지라, 물에 빠지면서도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때, 고인 물로 가득한 연못이 갑자기 환해졌다.
붉은 눈 한 쌍과 노란 눈 한 쌍이 연못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눈의 직경은 1척이 넘었고, 눈에서 쏘아내는 빛은 몹시나 사악했다.
두변이 급히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그의 시야에 직경이 1미터가 넘는 거대한 뱀 두 마리가 들어왔다.
한 마리는 붉은 뱀, 한 마리는 노란 뱀.
두 뱀은 두변이 여태 봤던 뱀 형태의 괴수 중에 가장 거대했다.
두 뱀은 완전히 서로를 꽉 감싼 상태에서 상대의 몸을 물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천 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장관이지 않을까.
대형 뱀 두 마리가 꽈배기처럼 서로에게 얽혀서 거대한 입으로 상대를 물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로에게 갇힌 괴수들의 끔찍한 싸움이었다.
두변을 발견하자, 두 대형 뱀이 일제히 두변을 쳐다보았다.
뱀들의 눈빛에는 사악함과 위협, 그리고 경고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
이어서 두 뱀은 곧장 다시 서로를 물고 뜯으면서 혈투를 벌였다.
이때, 물속에서 또 다른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 뱀은 두변의 손목만큼 몸통이 얇았고, 총 길이가 6척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뱀의 입에는 송곳니는 없이, 하얗고 작은 이빨이 가지런히 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색도 섞이지 않은 새하얀 뱀이었다.
왠지 이 뱀은 이제 막 허물을 벗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의 비늘이 무척 여리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꼭 사람의 얇은 표피처럼 살짝만 손톱으로 긁어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뱀의 두 눈이 새까맣게 빛났다.
약하고 여려 보이는 하얀 뱀이 선의와 영기가 가득한 눈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반가워요, 인간.’
하얀 뱀이 진짜로 입을 열어서 두변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니고, 정신 교류를 통해 말을 걸었다.
‘반가워요.’
두변이 대답했다.
하얀 뱀이 총기 가득한 눈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곳은 대지 균열로 생긴 깊숙한 동굴에 있는 연못이에요. 사실 난 아주 평범한 하얀 뱀이었는데, 이계의 에너지가 몸속으로 침투해서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있죠’”
‘몇백 년이나 살았으니까 정신 교류까지 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연못은 내 영역이에요.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난 원래 천성이 우울한 편이고 아주 심한 결벽이 있어요.’
하얀 뱀이 울상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얀 뱀의 비늘은 티 없이 맑았고, 마치 어린 소녀의 피부처럼 결이 곱고 얇았다.
“나는 살아있는 것을 잡아먹고 싶지 않아서 이 연못에서 특수한 에너지를 먹으면서 살아요. 그래서 내가 몇백 년이나 살았는데도 이 정도밖에 못 자란 거예요. 원래 난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살 수 있었는데, 거대하고 사악한 뱀 두 마리가 내 영역을 침범해서 이 연못을 빼앗으려고 해요.”
하얀 뱀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두변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두변은 아직도 미친 듯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뱀 두 마리를 바라보았다.
작은 하얀 뱀은 저 두 마리 거대한 뱀에 비해서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하얀 뱀이 말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저 두 마리 뱀이 서로를 물어뜯고 싸우느라 꼼짝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뱀의 급소인 7촌(寸) 부위가 밖에 훤히 드러나 있고요.”
두변은 다시 두 뱀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뱀 모두 7촌 부위가 노출되어 있고, 급소도 활짝 열려 있었다.
지금 저 둘은 급소를 무방비하게 노출한, 가장 취약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둘은 서로를 치열하게 물어뜯느라 자신들의 급소가 노출됐다는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하얀 뱀이 두변에게 부탁했다.
“선량한 인간, 나를 위해서 저 사악한 뱀들을 무찔러줄 수 있나요?”
“왜 직접 처리하지 않고요?”
하얀 뱀이 대답했다.
“두 뱀의 급소가 훤히 보이긴 하지만, 나는 너무 약해서 저들을 죽일 수 없어요. 나는 송곳니도 없어서 내가 저들의 급소를 깨문다 한들 상처도 안 남아요. 그리고 나는 평생 살생을 한 적 없어서 앞으로도 그 계율을 깰 생각이 없어요. 선량한 인간, 제발 나를 위해서 저 사악한 뱀들을 죽여줄 수 있나요? 내가 꼭 보은할게요. 약속해요.”
“어떻게 보은하게요?”
두변이 물었다.
하얀 뱀이 제 입에서 투명하고 밝은 구슬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몇백 년 동안 나는 피와 살을 먹지 않고, 아주 순수한 정기만 빨아들이면서 살아왔죠. 이 구슬은 내가 가진 기운의 결정체예요. 당신이 나를 도와서 저 두 마리 뱀을 없애주면, 당신은 내게 평온하던 집과 생활을 되찾아 주는 거죠. 그래서 보은의 의미로 이 구슬을 줄게요.”
두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얀 뱀이 곧 울 것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선량한 인간, 내가 몇백 년 동안 쌓아온 에너지 결정체를 준다고 해도 만족 못 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주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내겐 이런 구슬이 두 개밖에 없어요. 그래서 한 개만 줄 수 있는 거죠. 내가 만약 구슬 두 개를 전부 당신에게 준다면, 나는 죽게 돼요. 선량한 인간, 이 연못은 내 집이에요. 나는 평생 살생하지도 않았다고요. 제발 내 집을 되찾게 도와줘요. 제발요.”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도와줄게요.”
하얀 뱀이 감격스러워했다.
“너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두 뱀을 죽일 때 꼭 조심해야 해요.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죽이면, 다른 한 마리가 자유의 몸이 되니까 바로 당신을 공격할 거예요. 그러니까 두 마리를 동시에 죽여야 한단 얘기죠.”
하얀 뱀의 말이 맞았다.
거대한 뱀 두 마리의 전투력은 어마어마했다.
평소대로라면 두변 열 명이 와도 뱀 한 마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뱀이 서로를 물어뜯느라 두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치명적인 급소까지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러니 두 마리를 동시에 죽여야 했다.
거대한 뱀 두 마리는 몸이 연못에 반쯤 잠겨 있었는데, 둘의 급소가 수면에서 2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두변이 조심스럽게 두 뱀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