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장. 항룡십팔장
기이한 불빛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제안하는 건, 아주 중요한 시기에는 네가 겪은 이 인생 계시를 떠올려도 되지만, 평소에는 이 기억을 잊고 사는 게 좋을 것이다.’
두변은 기이한 불빛이 한 말을 이해했다.
과거의 내가 어떤 선택을 했든, 미래에 대한 어떤 계시를 보았든, 그 어떤 것에도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인생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바로, 인생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니까.
두변은 조심스럽게 두 괴수의 알을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
이제 이 알들은 두변이 가진 가장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두변은 석실 전체를 둘러보다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투명한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벽사주(辟邪珠)라는 것이다. 아주 강한 이계 괴수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이 구슬에서는 아주 특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독기를 막아줄 수 있다.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독에 중독되지 않는다.’
‘진짜 신기한 물건이네요.’
두변이 감탄했다.
‘그 이계 괴수는 장기(瘴氣: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와 독기가 가득한 땅굴 속에서 산다. 지독한 장기와 독기 속에서 생존하려다 보니 괴수들의 체내에 벽사주가 생겨났지. 이 일을 알게 된 강 노인이 그 괴수를 죽여서 벽사주를 얻어냈었다.’
두변이 투명한 벽사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부르는 게 값이겠네요.’
‘그렇다. 벽사주가 생겼으니, 너는 이제 자유롭게 심연의 땅굴을 탐험할 수 있게 되었고, 적이 독기를 이용해서 너를 공격할 때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얼굴 없는 강 노인이 천기도의 모든 걸 두변에게 주었으니, 벽사주도 당연히 두변의 것이 되었다.
이어서 두변의 시선이 두꺼운 비급으로 향했는데, 비급의 겉면에 ‘환양대법(還陽大法)’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두변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이 비급은 누가 봐도 남자의 양기를 회복시켜주는 비급 같았기 때문이다.
두변은 뭐에 홀린 듯이 비급을 펼쳐보았고, 그가 예상한 대로 환양대법은 양기를 회복해주는 비급이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얼굴 없는 강 노인은 점술을 통해서 원래는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많이 탈취했다. 그래서 하늘이 그에게 벌을 내렸지. 가장 먼저 내린 벌이 바로 사내 구실을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의 고환이 점점 더 작아지더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당시에 강 노인이 많은 부인과 첩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사내 구실을 못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나. 강 노인은 다시 양기를 되찾기 위해 십수 년을 연구해서 환양대법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이어서 하늘이 그에게 내린 벌은 더욱 처참했다. 미각을 잃게 하고, 시력을 잃게 하고, 마지막엔 얼굴까지 잃게 했지. 하늘의 벌을 연이어 받게 된 강 노인은 사내 노릇을 못하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부인과 첩들은 이미 그를 배신하고 그를 떠났다. 그래서 이 환양대법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두변이 비급의 뒤쪽을 펼쳐보았는데, 비급의 절반이 텅 비어있었다.
강 노인은 이 비급을 절반만 완성한 것이다.
두변이 비급을 내려놓고 옆에 놓여 있던 얇은 책자를 들었다.
얇은 책자를 펼치는 순간, 두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책자에는 너무도 간단해서 도무지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지도가 하나 그려져 있었고, 지도 위에는 황금대제(黃金大帝)의 무덤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황금대제라면, 철목진(鐵木眞: 칭기즈칸)?’
이 세계에도 철목진이 존재하긴 했지만, 현대 지구의 철목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다른 지구에서는 철목진이 예순다섯까지 살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든까지 살았다.
그리고 다른 지구에서는 그가 몽골 제국을 건립하긴 했지만, 그가 아닌 그의 후대가 몇천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통일한다. 철목진이 제위에 있을 때는 남송(南宋)도 정복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철목진 혼자서 유럽의 절반, 그리고 아시아의 절반을 정복한다. 이 세계의 철목진은 여든이 되던 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죽어버린다.
그가 죽은 뒤 몇십 년이 지나자, 그가 세웠던 제국은 완전히 분열했고, 황금 제국의 휘황찬란한 시절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두변이 물었다.
‘황금대제 철목진도 당신들이 키운 사람인 겁니까?’
기이한 불빛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렇다. 그는 이 세계의 토착민이지만, 우리가 성장시켰던 그 어떤 토착민보다도 훌륭했지. 하지만 그는 우리의 최악의 실패작이었다. 영웅호걸의 면모를 보이면서 이 세계의 거의 3분의 1의 땅을 정복했지만, 그 땅을 제 목장으로 쓰려는 마음만 있었지, 문명의 진보나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는 책임감도 개념도 없었다. 나중에는 오히려 우리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그를 죽인 겁니까?’
‘그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고 정신력이 강한 주술사들을 모아서 우리와의 정신적 교류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제가 견사 대사의 동굴에서나 얼굴 없는 강 노인의 석실에서 당신들과 연결이 끊어졌던 것처럼요?’
‘비슷하긴 하지만 똑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얼굴 없는 강 노인의 석실에서는 네가 우리와 연락할 순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너의 정신과 영혼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황금대제 철목진은 세계 최강의 정신 주술사를 데려와서 아주 막강한 정신 기장을 구축했지. 우리가 그를 죽이고 싶었다면,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두변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물었다.
‘그런데도 죽었다고요?’
‘그렇다. 서방 세계의 자객이 그를 죽였다.’
‘서방 세계요?’
두변이 놀라서 물었다.
‘지금 네게 이 얘기를 해줘도 될지 잘 모르겠군. 우리가 너를 보조하는 것처럼 서방의 어느 황제에게도 우리 같은 존재가, 우리와 같은 문명이 있다. 그들은 미친 속도로 강해지고 있고, 네가 이 세계에서 상대해야 할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빠르게 성장해서 10년 이내에 대녕 제국의 제일 강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 문명 간의 전쟁이 되는 겁니까?’
‘아니, 파멸의 전쟁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끔찍하지.’
기이한 불빛이 대답했다.
두변은 다시 시선을 작은 책자로 옮겼다.
책자에는 ‘전설급 비급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 황금대제의 무덤에 있을 수도 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두변이 흠칫 놀랐다.
‘항룡십팔장이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기이한 불빛이 두변의 생각을 읽고 한참 뒤에 말했다.
‘그것도 다른 세계의 무공이다. 원래는 항룡십팔장이 아니라, 멸용결(蔑龍訣)이라는 이름의 무공이었다. 이 무공을 처음 배운 사람이 멸용결이라는 이름보다는 항룡십팔장이라는 이름이 훨씬 멋스럽다면서 무공의 이름을 그렇게 바꿨다.’
‘처음 이 무공을 배운 사람도 당신들의 숙주, 초월자였습니까?’
‘그렇다. 벌써 천 년 전의 일이지.’
‘그럼 이 전설급 비급 항룡십팔장이 이름만큼 대단합니까?’
‘네가 배운 육맥신검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어우, 대단하죠.’
‘항룡십팔장은 육맥신검보다 더 강한 무공이다. 네가 전장에서 전쟁의 신으로 거듭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두변은 놀라서 숨을 한 번 들이켜 마셨다.
육맥신검만 해도 이 정도인데, 항룡십팔장이 육맥신검보다 더 강하다고?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야?
기이한 불빛이 이어서 말했다.
‘항룡십팔장, 그러니까 멸용결을 시전하게 되면, 근방 몇십 리 이내의 모든 천지 원기가 용의 형상으로 응집되었다가 폭발한다.’
두변은 놀라서 머리털이 삐쭉 서는 기분이었다.
육맥신검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 무공은 자신의 내력 현기를 이용해야만 시전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항룡십팔장은 근방 몇십 리 이내의 천지 원기를 모아다가 폭발시킨다?
이건 무공이 아니라 대량 살상 무기에 가까운 게 아닌가.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전장에서 항룡십팔장을 시전하게 되면, 그 위력은 하늘을 울릴 정도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죽어버릴 것이고, 너를 천인(天人)으로 보는 정도겠지. 이 무공은 학습자의 혈맥에 대해 아주 높은 요구사항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철목진은 바로 몇백 년 이래 유일하게 황금 혈맥을 가진 자이고, 이 놀라운 비급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내부에서 격렬한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는 항룡십팔장 비급을 그에게 전수해주기로 했지. 그래서 그가 무적 황금대제라는 전설을 쓰게 되었고, 3분의 1의 세계를 집어삼키고 유래에 없던 황금 제국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철목진이 당신들을 실망시킨 겁니까?’
‘그렇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자신에게 완전히 자아도취 해서 우리의 사명을 등한시했고, 나중에는 아예 주술사를 통해 정신적 교류까지 막아버리고 우리를 내쫓았다.’
‘그래서 이 전설급 비급 항룡십팔장은 당신들이 가진 제일 강력한 무공 비급이라는 건가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그래. 하지만 지금 네 혈맥과 무도 수준으로는 이 비급을 배울 수 없다. 네 수준은 한참 떨어져.’
‘그 비급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황금대제 철목진이 숨겨버려서 우리도 그 비급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비급은 너무도 강력해서 꼭 그 비급을 회수해야만 해. 네가 배울 수 있든 없든, 항룡십팔장, 그러니까 멸용결 비급을 회수하는 건 네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얼굴 없는 강 노인이 점술을 통해서 알아낸 거죠? 그 비급이 황금대제의 무덤에 있을 수 있다는 것 말이에요.’
‘그래. 강 노인은 천안을 떴던 사람이니 그의 점지는 유의미하다.’
‘항룡십팔장이 황금대제 철목진의 무덤에 있다는 거네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확률이 매우 높지.’
간단하다 못해 발로 그린 것 같은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얼굴 없는 강 노인도 아주 강력한 점복 대사지만, 황금대제 철목진에게도 아주 유능한 점복 대사와 정신 주술사가 있었다. 그들이 무덤을 만들 때, 점복 대사의 점술을 막는 방법까지 생각해서 만든 터라 이 지도가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기이한 불빛이 갑자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네 것이라면, 분명히 네 것인 줄 알아라.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지도는 점점 더 자세하고 선명해질 것이다. 항룡십팔장은 너무 강력한 무공이어서 네가 꼭 회수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라. 예외가 없는 한, 네가 전장의 신이 되려면 항룡십팔장을 익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고, 어쩌면 이 무공을 익혀야만 네가 전장의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항룡십팔장 비급의 중요도가 제일 높지만, 지금 상황에선 흡성대법을 찾는 게 더 급선무네요.’
‘그렇다. 누군가가 흡성대법 비급을 손에 넣어서 배우게 된다면, 십수 년 뒤엔 아주 엄청난 무공 고수가 탄생할 것이다. 네가 그때 가서 그 사람을 없애려면, 엄청 버겁고 힘들 것이다.’
‘북명검파의 선조가 북명대법을 통해서 이 세계의 무신(武神)이 되고, 북명검파를 만든 거잖아요. 그들은 이 세계의 무도 균형을 깨트리지 않나요?’
기이한 불빛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북명검파는 통제할 수 있으니까…….’
두변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이제야 알겠네. 당신들이 이 세계에 꽤 많은 골칫거리를 만들었네요?’
‘최종 사명을 완료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할 뿐이다. 물론, 다양한 시도 때문에 뒷감당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긴 했지. 그리고 최종 숙주인 네가 그 뒷감당을 다 해주고, 국면을 바로잡아야 한다.’
‘여튼, 흡성대법은 제가 지금 당장 손에 넣어야 하는 비급이고, 항룡십팔장은 미래의 중요한 전략적 임무라는 거죠?’
‘맞다. 그리고 네 무공을 1, 2년 사이에 종사급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다면, 흡성대법을 꼭 찾아내야 한다.’
두변은 깜짝 놀랐다.
1, 2년 만에 종사급 무도 수준을 돌파한다고? 내가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종사가 돼? 진짜 어마어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