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86화 (286/648)

286장. 충동적인 이도진

이때, 밖에서 희민지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쯤 하시죠. 대은구도 도주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두변에게 시비를 걸려고 오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광경을 보게 되면 두변이 얼마나 더 곤란해지겠어요.”

이도진이 번개에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창피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었다.

두변은 이도진의 온몸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도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꿈속에 있었는데, 희민지가 이도진을 현실로 끄집어낸 것이다.

두변은 왠지 마음이 쓰여서 다정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떤 세계에선 남자가 자기보다 연상인 아름다운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게 되게 흔한 일이거든요. 이 사저는 무공이 뛰어나니까, 주안술(駐顔術)을 열심히 수련하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아름답고 어려 보일 거예요.”

두변은 태생이 인간쓰레기이지만, 묘하게 홍루몽의 가보옥(價寶玉)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여인이 속상해하거나 울적한 걸 보면 자연스럽게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여인을 위로했다.

“진짜?”

이도진이 다시 꿈에 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요. 기음음도 예닐곱 살 아이가 되었잖아요. 그만큼 어려지라는 건 아니지만.”

“좋았어. 앞으로 주안술을 열심히 수련해서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젊고 탄력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겠어. 영도현 종주의 부인도 그보다 몇 살 많은데, 지금까지도 북명검파의 제일 미인이라고 불리거든. 몇 년 전에 내가 서른 몇 살일 때, 종주의 부인을 뵌 적 있는데, 분명히 쉰이 넘은 여인인데도 나처럼 젊어 보였어. 내가 20년 뒤에도 아름답고 젊을 거라고 약속할게. 진짜 약속할 수 있어. 내가 벌써 계획을 짜놨거든. 지금 내 머릿속에주안술 내공 몇 가지가 떠올랐고, 주안술에 쓰기 좋은 물건도 몇 개 생각해놨어.

너와 함께 흡성대법을 찾고 난 뒤에 난 바로 주안술 수련에 집중해야겠어. 몇 년이 지나고 네가 좀 더 성숙해지면, 우리가 같이 서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할게. 진짜 약속해.”

이도진이 이토록 간절한 모습을 보이자, 두변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믿어요. 제가 지금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어서, 10년 후면 사저보다 더 늙어 보일지도 모르죠.”

두변의 진심 반, 농담 반인 말에 이도진은 두변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정말로.”

이도진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도진은 두변이 자신에게 마음이 크게 있지 않음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이라는 게 그렇지 않았다. 이도진에게 정이라는 건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아서 자신이 자제하고 싶다고 해서 자제되는 게 아니었다.

“불청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어요.”

두변의 말에 이도진도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두변의 품에서 일어났다.

“응. 사제. 널 실망시키지 않도록 할게.”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갖춰 입고 석실을 나섰다.

희민지를 본 이도진은 너무도 창피해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성숙한 여인인 만큼, 자신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도진이 희민지에게 다가가서 잘 보이려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희 사매, 걱정할 것 없어. 다음 대은구도 도주를 뽑게 될 때, 사저를 꼭 끝까지 밀어줄게. 누구든 사저와 경쟁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부터 상대해야 할 거야.”

‘엥?’

희민지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이도진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냉랭하고 고고한 모습을 보이던 이도진 맞나? 누가 죽든 살든 눈길 한번 안 주던 이도진 맞아? 극단적이고 독하기 그지없는 그 이도진 맞냐고.’

희민지는 태생이 냉담한 사람인지라, 이도진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뭔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그녀 스스로는 평생 두회를 그리워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는 건 원업(冤業)일 뿐이에요. 아무런 결실도 없을 거라고요.”

희민지의 말에 이도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발그레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난 무슨 결실이 있길 바라는 건 아니야. 지금이면 충분해.”

희민지가 놀란 얼굴로 이도진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면 충분해 보이긴 했다.

이도진은 몇 살이나 더 어려 보이고 심지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마치 너무도 맛있는 미주를 마신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희민지는 저도 모르게 부러운 감정이 일었다. 그녀로서는 평생 알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마음 좀 추슬러요. 지금 그 모습으로 하 도주를 뵙게 되면, 아주 골칫거리가 많아질 것 같으니까요. 난 두 사람을 위해서 비밀을 지키겠지만, 그 모습으로 있다가는 누가 봐도 알아채겠어요.”

희민지가 냉랭한 태도로 말했다.

“고마워. 사매, 정말 고마워.”

이도진은 희민지의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고마워한 뒤, 깊이 한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이도진은 다시 평소 같은 냉랭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하지만 눈빛은 그렇다 하더라도, 갑자기 젊고 아름다워진 얼굴은 무슨 수를 써도 숨겨지지 않았다.

잠시 후.

대은구도 도주 하진, 이도진과 희민지를 유린하려고 했던 강 노귀의 아들 강사, 그리고 구레나룻까지 하얗게 센 연로한 사내가 두변을 찾아왔다.

연로한 사내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가 바로 천기도 도주 강 장로의 쌍둥이 형제 강무심이었다.

강사가 천기도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호통쳤다.

“감히 누가 내 아버지를 흉내 내면서 천기도에 있는 것이냐.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벌인 것이야!”

몇 시간 전, 강사는 두변이 흉내 낸 강 노귀의 목소리에 놀라서 도망쳤지만, 뒤늦게 자기가 들은 목소리가 강 노귀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강사가 사부 강무심을 찾아가서 이 얘기를 전하자, 강무심이 그에게 화를 냈다.

“멍청한 놈. 누가 강 노귀인 척을 한 거겠지. 강 노귀는 죽었다. 강 노귀는 내 쌍둥이 형제라서 그가 죽은 걸 단언할 수 있다고! 그리고 강 노귀가 아직 살아있다면 뭐하러 너를 겁주겠냐? 벌써 너를 죽이고도 남았겠지.”

강 노귀가 왜 강사를 죽이려고 할까?

분명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비가 자기 자식을 왜 죽이려 할까.

강무심은 강 노귀가 천기도에 남겨둔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직접 강사를 데리고 천기도로 향했다.

두변이 천기도의 지하 석실에서 천천히 올라와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이도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변을 향한 자랑스러움과 행복함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희민지는 이도진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원업이로구나.’

강사가 두변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오늘 아침에 내 아버지를 흉내 낸 사람이 바로 네놈이냐?”

두변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대은구도 도주 하진을 향해 예를 올렸다.

“대도주를 뵙습니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복잡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천형을 받고도 죽지 않은 두변이 북명검파에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알 길이 없어 그를 천기도로 데려왔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두변은 멀쩡히 살아 있고 강 노귀가 죽어버리다니.

하진이 물었다.

“두변, 천기도 도주는 어떻게 죽은 것이냐?”

두변이 대답했다.

“천기를 간파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네놈이 내 아버지를 죽였을지 누가 알아? 천기도 도주였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틈을 타서 네놈이 천기도를 무단으로 차지했고, 아버지의 보물까지 빼돌리지 않았어! 지금 당장 천기도에서 꺼져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보물들을 내놔! 특히 괴수의 알 두 개 말이다.”

강 노귀의 보물 중 가장 진귀한 게 무언지 아는 걸 보니, 강사도 그렇게 멍청한 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어서 강사가 하진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도주, 두변이 보물을 제게 돌려주면 북명검파 제자의 효심으로 괴수의 알 하나를 대도주께 바치겠습니다.”

하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대은구도 장로 강무심이 차가운 눈빛으로 두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두변, 천기도 도주가 죽으면 그가 가졌던 모든 건 아들 강사가 가지게 된다. 그러니 당장 천기도에서 떠나고 무단으로 점유한 보물들을 내놓아라.”

이도진이 갑자기 검을 뽑고 강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누가 감히? 강사! 네놈은 북명검파의 배신자 막추와 공모해서 나와 희민지 사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냐! 당장 목숨을 내놔라.”

두변은 이마를 짚고 말았다.

‘이 사저, 너무 충동적이십니다.’

희민지도 작게 고개를 저으면서 이도진을 바라보았다.

‘사랑에 미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아직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는데, 두변을 내쫓고 보물을 뺏어가겠다는 말 한마디에 벌써 사람을 죽이려고 해? 이도진, 유치해도 너무 유치하잖아.’

하지만 이도진이 이미 검을 뽑았으니, 희민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희민지도 검을 뽑고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대도주, 오늘 아침에 대도주의 명령에 따라 천기도 해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막추가 이도진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시 제가 이도진과 함께 있었기에 막추가 저도 죽이려고 했죠. 그런데 강사가 저희를 도와주긴커녕, 막추의 미모에 홀려서, 그리고 막추에게 죽임당할까 봐 두려워서 저와 이도진 사저를 해치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을 목격하게 된 두변이 피치 못하게 천기도 도주의 흉내를 내면서 막추와 강사를 겁줘서 도망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두변 덕분에 저희가 살 수 있게 된 거죠.”

강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당하군. 대도주, 전 정말 억울합니다.”

강사가 이도진과 희민지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진짜 너무한 거 아니오? 나는 막추가 사매들을 추격하는 걸 보자마자 바로 하 도주께 도움을 요청하려고 간 것뿐이오. 혹시 두 사람, 두변과 공모해서 내 아버지의 보물들을 나누기로 한 거요? 그래서 두변을 감싸고 도는 것이고?”

강사의 뻔뻔함에 이도진과 희민지가 경악했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강사가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와서 막추가 두 사람을 추격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내가 지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고.”

희민지와 이도진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저 교활한 강사 같으니. 정말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지.’

하지만 두 사람 입장에서 강사가 자신들을 해치려고 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이도진은 흡성대법에 관한 얘기를 할 수가 없어서 무척 답답했다. 그녀는 두변과 함께 흡성대법을 찾기로 했고, 자신의 수련을 위해서, 그리고 두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 도주에게 흡성대법에 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도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사가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사매들, 막추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알잖소. 게다가 막추는 미치광이잖아. 두 사람이 쫓기는 걸 보고도 구해주지 않은 건 내 잘못이 맞소. 하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쳐도 막추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오. 나까지 목숨을 잃을 순 없으니, 얼른 대도주께 도움을 요청하러 간 건데, 이렇게 내게 누명을 씌우니까 참 섭섭하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답은 하나겠지. 두 사람은 지금 두변과 함께 내 아버지의 보물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것이야. 내 아버지의 보물이니, 내가 가지게 된다면 절반을 대은구도에 상납할 것이오. 하지만 내 아버지의 보물은 절대로 외부인에게 넘어갈 순 없소. 그것도 내 아버지를 죽였을 수도 있는 외부인에게 말이오.”

강사가 노골적으로 두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두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내력을 이마에 집중했다. 신비로운 검은 테두리의 금빛 표식이 두변의 이마에 나타났다.

이 표식은 전 천기도 도주가 다음 대 도주에게 주는 증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천기도 도주 강 장로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 표식을 제게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기도 도주 자리와 천기도의 모든 것을 제게 물려주셨습니다. 부디 대도주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두변이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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