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장. 천년사요
일순간 강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천기도 도주 표식이 가짜일 리는 없었다.
강무심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는군. 황당하기 그지없어! 천기도는 북명검파 종주까지 나왔던 곳인데, 그런 곳에서 어찌 도주 자리를 사적으로 물려줄까! 게다가 천기도는 지금 대은구도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으니, 도주의 승계는 대도주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 그다음에 북명검파 장로회의 허락까지 받아야만 가능한 건데, 강 노귀가 누구에게 도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고 해서 물려줄 수 있는 것이냐?”
강무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천기도가 하나의 도이긴 하지만, 대은구도의 통제를 받고 있고, 몇 대의 북명검파 종주들이 거쳐 간 곳이라서, 도주의 계승은 북명검파 장로회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강무심이 이어서 말했다.
“두변이 천기도의 도주가 된 건 불법이다. 그러니 두변이 가진 보물들도 결국 무단으로 갈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강사가 강 노귀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당장 강 노귀의 보물들을 내놓아라.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우리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강무심의 목소리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대은구도의 장로이고 하진의 사숙인지라, 무공 수준도 매우 높았다. 이도진과 희민지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강무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도진이 검을 고쳐 들고 전투 준비 자세를 갖췄다.
희민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바로 이도진을 따라 준비태세를 취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최종 결정권자인 하진을 향했다.
만약 그가 두변이 무단으로 보물을 갈취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두변은 순순히 모든 보물을 강사에게 돌려줘야 했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입을 열었다.
“두변, 천기도 도주의 자리는 개인 간에 계승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맞다. 일단 나의 허락을 거쳐야 하고, 그다음엔 북명검파 장로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콰과과과광!
바로 이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은구도 방향에서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다. 몇백 미터 높이까지 치솟은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어서 천둥소리 같은 포효가 들리는데 그 소리는 2백 리 떨어진 천기도까지 울려 퍼졌다.
초록색의 맹독 연기가 하늘의 반쪽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다 밑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이무기가 해수면을 뚫고 하늘 위로 치솟았다. 몸집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이무기는 두변이 정신적 환상에서 봤던 두 괴수보다도 훨씬 큰 것이, 정말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해저 괴수였다.
대은구도 도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났군. 막추 그 미친 여인이 도망치기 전에 천년사요(千年蛇妖)를 풀어버린 모양이군.”
천년사요라!
일단 천년사요가 대은구도에 올라가게 되면 치명적인 재앙은 불가피했다.
대은구도는 북명검파와 세속세계의 유일한 연결고리인지라, 대은구도가 파멸하게 되면 북명검파도 재난 수준의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두변의 머릿속에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신규 임무 시작. 대은구도를 구하는 구세주가 되어라.’
두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려 천년사요인데요? 제가 백 명이 있어도 천년사요를 죽이지 못할걸요.’
‘벽사주가 있으니까 맹독에 중독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년사요는 그 교룡의 후손이다. 네 몸속에 교룡의 피가 있으니까, 천년사요가 너를 해치진 못한다. 이번 임무는 네가 대은구도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임무 포상: 대은구도 도주의 감사, 북명검파에 큰 공을 세운 공신, 북명검파 장로회를 통과한 천기도 도주 자리.’
쿠구구구궁.
두변 등은 대은구도에서부터 2백 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천년사요가 대은구도에 대살육을 벌이는 장면이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무도 고수들의 오감으로 바다 전체의 전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우우우!
천기도가 또 한 번 격하게 흔들렸다.
여마두 막추가 천년사요를 풀어버린 탓에 천기도 지하에 있는 초대형 괴수도 자극을 받아서 요동치고 있었다.
두변이 말했다.
“대도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얼른 대은구도로 돌아가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천년사요를 빨리 진정시키고 원래 있던 땅굴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강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이 뭘 할 수 있다고! 천년사요는 너처럼 무도 수준이 낮은 사람 천 명이 달려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아. 지금 넌 도망치려는 거잖아.”
대은구도 하진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서 강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은구도는 자신의 영역인지라, 천년사요가 대은구도에서 수백, 수천 명 사람을 죽이게 된다면, 도주 자리는 당연히 빼앗길 것이고,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어진다.
천년사요를 풀어주고, 천년사요가 날뛰게 자극한 것도 여마두 막추지만, 하진은 도주로서 막추가 대은구도를 배신한 것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진이 말했다.
“일단 이 얘기는 뒤로하고, 대은구도로 돌아가서 사람부터 구하지.”
하진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두변, 우리와 함께 대은구도로 돌아가야 한다.”
두변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두변 등은 배를 탈 겨를도 없이 대은구도 도주와 함께 바다를 가로질러서 달리기 시작했다.
두변도 능파미보를 시전하여 파도를 밟으며 달렸다.
이때, 두변의 손에 매끈한 무언가가 닿았다. 이도진이 그의 손을 잡은 것이다.
‘저기 사저, 조심 좀 합시다.’
두변이 조심스럽게 손을 빼냈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도진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도진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변의 무도 수준이 너무 낮아서 데려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 사저, 데려가는 것이라면 옷깃만 잡아도 충분한데, 굳이 손까지 잡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왜 자꾸 손끝으로 내 손바닥을 간지럽혀요!’
이도진의 애정 공세에 두변이 진땀을 빼는 동안, 희민지가 이를 눈치챘다.
희민지는 고고하기만 하던 이도진이 이 지경이 될 줄 몰랐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슬며시 두변과 이도진의 앞을 가리고 달렸다.
드디어 대은구도에 도착한 두변 일행의 앞에 나타난 광경은 지구 종말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대은구도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섬의 곳곳에 초록색 독기가 뿌옇게 떠 있었다.
대은구도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도망가기 위해 앞뒤를 다퉈가며 바닷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진이 나타나자, 대은구도의 열댓 장로들과 수십 명의 사도들이 구세주를 만난 듯 하진을 에워쌌다.
“대도주! 누군가가 천년사요를 풀었는데 무언가에 극심한 자극을 받은 모양입니다. 정말 미쳐 날뛰고 있어요. 대은구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피시키고 북명검파 장로회에 이를 보고해야 합니다.”
하진이 물었다.
“얼마나 죽었소?”
지금 하진이 가장 궁금한 건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였다.
만약 이미 몇백 명이나 죽었다면, 도주 자리를 내려놔야만 하고, 수천 명이 죽었다면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지금까지 서른아홉 명이 죽었습니다.”
장로 한 명이 대답했다.
하진은 아직 목숨을 잃지 않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인명피해가 크진 않군. 참 다행이오.”
하진이 다시 물었다.
“천년사요는?”
장로가 대답했다.
“용혈(龍穴)에 들어갔습니다.”
“뭐라?”
하진이 경악했다.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용혈은 그 천년사요의 어미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천년사요 어미가 교룡으로 변하던 그 날, 천기도 도주 강 노귀가 다른 사요를 유인해서 두 사요가 싸우게 했고, 두 사요는 결국 강 노귀의 의도대로 모두 죽어버렸다.
이 일이 바로 강 노귀가 교룡의 피를 얻게 된 계기였다.
북명검파에서 이 일을 알게 되자, 천기도의 도급을 두 단계나 격하시키고 대은구도의 감시와 통제를 받게 했다.
그때 북명검파에서 강 노귀를 죽이지 않았던 건, 그가 점복 대사이고 천기를 엿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북명검파는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으니 죽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 천년사요가 자신의 어미를 찾기 위해 용혈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은구도에서 곧 다가올 북명검파 종주 영도현의 예순 생신을 맞아 행사 하나를 열었다는 점이었다.
용혈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지심수정(地心水晶)이 한 알 만들어진다. 지심수정은 별다른 쓰임새는 없지만, 매우 희귀하고 아름다워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은구도에서 이 진귀한 지심수정을 영도현 종주의 생신 선물로 바치기 위해서 일천여 명의 제자들이 용혈 안으로 들어갔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은 지심수정을 찾는 제자에게 건곤혼원단(乾坤混元丹) 한 알을 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건곤혼원단은 원래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계의 에너지로 만들어진 진귀한 단약이었다.
대은구도도 10년에 한 알만 배정받을 수 있었고, 이 단약을 먹게 되면 직접적으로 근맥과 단전을 개조해서 복용자의 체질을 영구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체질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건곤혼원단을 먹게 되면 종사나 대종사를 돌파할 수 없던 사람이 그 수준을 돌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건곤혼원단은 이 세계에서 무척 진귀한 것이었고, 특히 옥진 군주 같은 사람에게 무척 필요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 귀한 건곤혼원단을 얻기 위해서 대은구도의 일천여 명 제자가 용혈 안에서 지심수정을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년사요가 용혈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하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용혈은 대은구도의 지상에서 해저 깊은 곳까지 거대한 미궁처럼 이어져 있는데, 천년사요는 용혈에서 더욱 강력해지는 특성이 있다. 게다가 이 천년사요는 근친으로 인해 태어난 생물인지라, 머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천년사요가 사람을 죽이고자 한다면, 용혈 안에 있는 일천여 명의 제자들은 도망칠 곳도 없이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은구도 도주인 자신도 죽게 된다. 북명검파 장로회에서 자신을 죽여서 죄를 물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천여 명의 제자가 용혈에 갇혀 있건만, 천년사요가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을 구하러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든 들어가기만 하면 천년사요에게 물려 죽을 게 뻔하니까.
“하늘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하진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탄식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명령을 내렸다.
“대은구도에서 무도 수준이 종사급 이하인 사람들은 전부 배를 타고 섬을 떠나거라. 당장! 그리고 종사급 이상인 사람들은 전부 나를 따라 용혈로 들어가서 제자들을 구한다.”
이 모습을 본 두변은 하진에게 존경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두변은 이도진이 말해줬던, 대은구도 도주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공 수준이 아니라 공정함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만약 무공 수준으로 도주를 뽑는 것이었다면 여마두 막추나 천기도 강 노귀가 대은구도의 도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진이 내린 명령은 그가 왜 도주인지 증명하는 셈이었다.
하진의 명령에 따라 일천여 명의 대은구도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대부분은 종사급 미만인 사람들인지라,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배를 타고 대은구도를 떠났다.
“두변, 너도 얼른 가.”
이도진의 말에 강사가 두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가긴 어딜 가! 가더라도 내 아버지가 남긴 모든 보물을 줘야 떠날 수 있다.”
두변이 하진을 향해 말했다.
“전 떠나지 않을 겁니다.”
하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진은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두변의 손을 세게 꼬집으면서 그에게 도망가라고 눈치를 줬다.
“아니면, 이따 용혈에 들어간 뒤에 남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도망칠까?”
이도진이 두변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두변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이도진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미쳤어요? 그럼 우린 죽을 때까지 북명검파의 추격을 당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