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장. 구세주 두변
하진의 앞에 마흔아홉 명의 사람이 남아 있었다.
두변은 대은구도에 종사급 강자가 마흔아홉 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바깥의 세속세계에선 한 문파당 종사급 강자가 한두 명 있는 것도 대단한데, 북명검파의 한 섬에만 종사급 강자가 마흔아홉이나 된다니.
하지만 대은구도에 종사급 고수는 많더라도, 대종사급 강자는 많지 않았다.
천기도 도주 강 노귀가 죽으면서 대은구도에는 도주 하진과 장로 강무심 두 명의 대종사만 남게 되었다.
북명검파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어도 대종사급까지 돌파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대종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상 나이 쉰이 되기 전에 대종사급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 이후에는 대종사가 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다.
그래서 대종사가 된 사람들은 천운이 따른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계표표는 스물아홉에 종사급 강자가 되었고, 이도진도 스물아홉에 종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도진은 종사가 된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도 대종사가 되지 못했고, 향후 5년 안에도 대종사가 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도진은 대종사가 되는 게 평생의 소원이지만, 사실 자신이 대종사가 될 가능성이 3할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흡성대법을 얻어서라도 대종사가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대종사가 되는 것보다 주안술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아름답고 젊길 원했고, 두변이 자신에게 성적인 충동이 들길 바랐다.
마음에 뭔가 짜르르한 게 일어나거나, 두 사람 사이에 공명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의 대화를 할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매일 함께 자고 싶은 의욕이 없다면, 그게 무슨 정인가.
여인들은 서른에는 늑대와 같고, 마흔에는 호랑이와 같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말이 그저 농담이겠지만 이도진에게는 농담이 아닌 듯했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두변과 마흔아홉 명의 종사를 이끌고 대은구도 깊은 곳으로 향했다.
“모두 조심해라. 천년사요가 뱉어낸 독기를 피해야 한다.”
반 시진이 지나고서야 하진 등은 드디어 용혈의 입구에 도착했다.
쿠구구구궁.
용혈 안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천년사요가 정말 이 안에 있다는 생각에 종사들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사제, 이따 내 뒤로 와. 나와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말고.”
이도진이 다시 두변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젠 뭐 대놓고 광고를 하는 수준이었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도 이미 눈치챈 듯 두 사람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하진이 말했다.
“천년사요가 용혈 안에 있지만, 우리의 제자 일천여 명도 이곳에 있다. 우리가 다 죽는 한이 있어도 꼭 이 제자들을 모두 구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는 자가 있다면, 내가 살아있는 한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북명검파의 추살을 피치 못할 것이다.”
하진이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비장하게 말한 뒤, 큰소리로 외쳤다.
“들어가라!”
종사급 강자 마흔아홉 명이 잿빛이 된 얼굴로 쭈뼛거리며 용혈 안으로 들어갔다.
용혈로 들어서자마자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도진은 이때다 싶어서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으로는 두변의 손을 꼭 쥐고서 두변 앞으로 걸었다.
두변은 애써 모른 척하며 걸었다.
쿠구구구궁.
이때, 용혈 전체가 갑자기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우우우우!
용혈 깊은 곳에서 어마무시한 포효가 들려왔다.
“천년사요는 저기 앞쪽 용혈의 깊숙한 곳, 우리와 약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다들 입을 벌려라. 천년사요의 포효 때문에 고막이 터질 수가 있다.”
사람들이 하진의 말에 따라 입을 살짝 벌린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지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지옥으로 향하는 걸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들이 부러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종사급 강자가 마흔아홉이나 되지만, 천년사요를 상대하면서 죄다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 몇백 미터를 더 나아가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대도주 하진이 말했다.
“강 사숙, 절반의 사람을 데리고 왼쪽 갈림길로 들어가시오. 가는 길에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제자부터 구해주시오.”
대은구도 장로 강무심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강무심이 종사급 강자 스물네 명과 강사를 데리고 왼쪽 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도주 하진은 종사급 강자 스물다섯 명과 두변을 데리고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
아우우우우!
천년사요의 포효가 점점 더 가깝게 들리면서 두변의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를 본 이도진이 용혈의 벽에서 수정 하나를 떼어내더니, 비수로 수정을 곱게 갈아서 귀마개를 만들었다.
이도진이 귀마개를 두변의 귀에 꽂아주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지금 좀 괜찮아?”
두변은 이도진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그녀의 입모양을 보고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도진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콰지지직.
용혈이 계속 흔들리더니, 이젠 곳곳에서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돌덩이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이도진은 두변에게 돌덩이가 튀지 않게 검을 휘두르면서 날아오는 돌덩이를 전부 쳐냈다.
불현듯 이도진이라는 여인이 계표표, 혈관음과 어떻게 다른지 느낄 수 있었다.
혈관음은 그의 옷과 음식을 챙겨주면서 정을 나누었고, 계표표는 두변과 부부라기보다는 전우에 가까웠다. 이도진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아주 꼼꼼하게 두변을 챙겼다. 이렇게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애정표현까지 서슴없이 할 줄 아니, 아무리 무심한 사내여도 몇 개월 후면 항복을 외치지 않을까.
하진 등은 용혈의 밑바닥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고, 천년사요와 점점 더 거리를 좁혀갔다.
사람들이 걷는 동안에도 용혈 전체가 격하게 흔들려서 몇몇은 중심을 잡고 서 있지 못할 정도였다.
몇천 미터 앞에 천년사요가 있었다.
천년사요는 자신의 어미를 찾지 못하자 더욱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죽으러 간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고, 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2백 미터를 다가갔을 때, 자욱한 초록색 독 안개가 사람들의 앞길을 막았다.
천년사요가 뿜어낸 독기는 숨으로 들이마시지 않더라도 피부에 닿기만 해도 사람이 죽을 정도로 맹독성이어서 이곳을 뚫고 가는 건 사실 불가능이었다.
희민지가 물었다.
“대도주, 어떡하죠?”
대도주 하진이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용혈의 깊은 곳까지 2천 미터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독 안개만 뚫고 지나가면 천년사요가 보일 텐데!’
“아악! 으아악!”
하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제자들의 비명에 미간을 찌푸렸다.
천여 명의 제자 중 대부분이 용혈 밑바닥에 있었다. 위협을 느낀 제자들은 본능적으로 용혈의 깊은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용혈의 가장 아래쪽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천여 명의 대은구도 제자들이 천년사요에게 발이 묶인 채 겁에 질려서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대도주 하진은 속에 불이 난 듯 초조해졌다.
‘어떡하지!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천년사요가 안에 있는 제자들을 모두 다 죽여버릴 텐데!
전진하는 것도 죽음이고, 후퇴하는 것도 죽음이라니!’
대은구도 하진으로서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이때, 두변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대도주, 제가 가서 사람들을 구하겠습니다.”
대도주 하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이도진도 경악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안 된다고.”
이도진이 아예 두변을 밖으로 잡아끌면서 그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다.
두변이 이도진의 귀에 바짝 다가가서 그녀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해낼 자신이 있어서 그래요. 벽사주가 있어서 독 안개를 뚫고 갈 수 있고, 내 몸엔 교룡의 피가 있어서 천년사요가 나를 어미로 여기고 나를 해치지 않아요.”
“그래도 안 돼.”
이도진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강무심이 내게서 괴수의 알을 빼앗아가려고 하고, 대은구도 하진도 내가 천기도 도주가 된 걸 인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저가 오는 길 내내 너무 티를 내서 우리 사이가 다 탄로났을 거예요. 지금은 위급상황이니까 대도주께서 사저를 벌하진 않을 텐데, 오늘이 지나면 분명히 사저를 벌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나중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이도진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바보예요? 벽사주도 없으면서? 내가 할 수 있다면 진짜 할 수 있는 거예요. 날 믿어봐요.”
두변이 말한 뒤에 곧바로 이도진을 희민지가 있는 쪽으로 밀어버렸다.
“하진 도주, 제가 대은구도의 일천여 명 제자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대신, 앞으로도 도주의 공정함을 잃지 않길 바랍니다.”
두변이 말한 뒤, 벽사주를 입에 물고 빠르게 독기 속으로 사라졌다.
대도주 하진은 무슨 반응을 할 겨를도 없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단호하게 사람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 외부인이라니. 그런데 두변의 무도 수준이 무척 낮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천년사요로부터 제자들을 구하겠다는 거지? 정말 황당무계한 일이로군.’
대도주는 두변이 황당무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의 기개에는 탄복했다.
대도주 하진은 이도진과 두변의 관계를 눈치챘지만, 이 일을 묻어두기로 했다.
이도진은 두변이 독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는 잠시 넋을 놓더니, 이내 갑자기 헉 소리를 내고는, 희민지의 손길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다른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용혈의 밑바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갈림길이 있음을 떠올린 것이다. 이도진은 그 안에 천년사요가 있든 없든, 그저 용혈의 밑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당연히 두변에게는 벽사주가 있으니, 맹독성 독 안개를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용혈 깊은 곳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천년사요 때문에 용혈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두변은 몇 번이고 넘어져야 했고, 천년사요의 포효에 오장육부가 터질 것만 같았다.
으악. 아아악!
계속해서 안쪽에서 대은구도 제자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두변은 더 빨리 속도를 내서 순식간에 수백 미터의 안개 구간을 뚫고 지나갔다.
안개 구간을 나와서 시야가 선명해지는 순간, 그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저, 저게 천년사요라고?’
천년사요는 170미터 길이에 4미터 직경의 몸통을 가진 초대형 괴수였다.
아우우우우!
천년사요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고, 독 안개를 충격파처럼 끊임없이 뿜어댔다.
독 안개에 맞은 대은구도 제자들은 힘없는 지푸라기처럼 허공에 튕겨 나갔고, 피를 토하면서 땅에 떨어졌다.
“아악!”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놀랍게도 두변의 전 정혼녀 방청의가 천년사요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방청의는 처량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무서워서 오줌을 싼 건지 치마 앞이 축축해 보였다.
이때, 두변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임무 개시. 천년사요를 길들이고, 대은구도 일천여 명 제자를 구해서 대은구도의 구세주가 되어라.’
‘두 번째 임무 개시. 방청의를 괴롭혀서 그녀의 잠재된 피학적 성향을 자극하라.’
이 천년사요가 일부러 사람을 해치는 건 아니었다.
천년사요는 대은구도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었다. 다른 괴수들은 몇백 년의 수련을 거치면 지혜가 생기고, 몇몇은 일반인보다 더 똑똑한 지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천년사요는 근친상간의 산물인지라 이미 천 년이나 살았음에도 머리가 정상이 아니었고, 지능 수준은 매우 낮았고 사고회로가 무척이나 단순했다.
이 천년사요는 자신의 어미처럼 교룡으로 변할 수도 없으니, 그저 시간이 흐를수록 몸집만 커지고 힘만 세졌다.
여마두 막추는 원래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몰래 대은구도로 돌아와서 천년사요의 동굴로 들어가서 사요를 미쳐 날뛰게 하는 단약을 먹였다.
이 천년사요는 지능이 굉장히 낮지만, 평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을 잘 듣고 온순한 편인데, 막추가 준 단약을 먹은 직후부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몸집이 거대한 데다 힘까지 장사다 보니, 제 앞을 막고 있던 해저 동굴의 석문, 철문, 비금문까지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고는, 곧장 어미를 찾으러 대은구도 용혈까지 헤엄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