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장. 이도진의 최후
두변이 다시 가서 천년사요를 진정시키자, 천년사요가 다시 조용히 눈을 감고 몸을 엎드렸다.
방청의에게 돌아온 두변이 갑자기 그녀의 옷을 전부 다 벗겨버렸다.
방청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두변!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환관 주제에 뭘 하려고. 네가 감히?”
애석하게도 방청의는 입만 움직일 뿐, 두변의 손길에 반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두변은 속으로 그녀의 몸매를 감탄했다.
방청의는 고전적인 동양 미인의 몸매를 가졌다. 몸의 곡선이 유려하고 풍만했으며, 피부는 도자기처럼 깨끗하고 매끈했다.
두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여기저기서 밧줄로 쓸 만한 몇 개를 주워왔다. 그리고는 밧줄로 방청의를 꽁꽁 묶어서 돌기둥에 매달아둔 뒤, 그녀를 허공에서 두어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두변!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방청의가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두변이 채찍을 찾아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깊은 동굴에 채찍이 있을 리 만무했다. 대신 바닥 깔개로 엮어서 쓰는 대나무 줄기를 찾아왔다.
두변이 대나무 줄기를 높이 치켜들더니, 허공에 매달린 방청의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아악!”
방청의가 비명을 질렀다.
두변이 말했다.
“내가 널 살려줄 수는 있지만 복수는 꼭 해야겠어. 네년이 나 두변을 평생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하게 해주지.”
두변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방청의를 대나무 줄기로 연신 채찍질했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방청의가 어디 이런 괴롭힘을 당해 본 적이 있을까. 그녀는 채찍질이 너무 아파서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렀다.
너무 아파서 두변을 욕하거나 저주하고 싶을 때마다 천년사요가 눈을 슬그머니 뜨고 방청의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통에 방청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청의는 실신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명을 지르다 말고 울음을 터트렸고, 이내 잘못을 빌었다.
“제발 그만 때려. 내가 잘못했어. 응? 잘못했다고!”
오랫동안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던 방청의는 결국 혼절해버렸다.
두변은 상처투성이인 방청의를 밧줄에서 풀어낸 뒤, 차가운 물이 고인 웅덩이에 던져버렸다.
“악!”
방청의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정신을 차렸다.
뼈마디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상처가 닿자,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방청의는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었다.
두변이 방청의를 물 밖으로 끌어낸 뒤 그녀의 턱을 쥐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이 순간을 기억해. 알겠어?”
방청의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지?”
방청의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먹였다.
“부딪힐 일 없게 하고, 멀리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할게.”
두변이 방청의에게 옷을 던져주었다.
“그래, 옷을 입고 당장 꺼져.”
방청의는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손에 힘이 없어서 옷을 제대로 쥐지도 못했다. 보다 못한 두변이 방청의에게 옷을 다 입혀준 뒤에 다시 소리쳤다.
“지금 당장 꺼져!”
방청의는 고통스러워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지만,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밖으로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두변과 천년사요에게서 멀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시스템! 이제 됐어요?’
기이한 불빛이 대답했다.
‘충분하다. 방청의의 뇌리에 오늘의 기억이 각인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네 모습이 방청의의 뇌리에 점점 더 강하게 새겨질 것이고, 무료함을 느낄 때마다 오늘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두변이 흠칫 놀랐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아니었어요?’
‘난 그저 책에 나온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방청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변!”
“왜?”
방청의가 대답 없이 흐느껴 울기만 하자, 할 수 없이 두변이 바깥 쪽으로 나갔다. 방청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다.
“왜 아직도 안 간 거야? 나한테 덜 맞은 건가?”
두변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방청의가 고개를 들고 두변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오늘 일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알아들었어?”
그리고는 다시 벽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더니, 다리를 절뚝이면서 엉엉 울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방청의는 울다가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걷다가를 반복했다. 몇 분 후, 방청의가 드디어 두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변은 뒤돌아 가면서 천년사요를 다시 해저 동굴로 돌려보낼 방법을 생각했다. 그때, 두변의 몸 뒤에서 아주 치명적인 살기가 느껴졌다. 두변은 몸을 돌려서 확인할 겨를도 없이, 천년사요가 있는 동굴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살기 가득한 기운이 두변을 덮쳐왔다. 살기 가득한 기운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하나는 대종사급 강자 대은구도의 장로 강무심의 기운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사급 강자 강사의 기운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길을 통해 이곳까지 왔다가, 두변을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저놈이 문도 없는 지옥을 향해 제 발로 가는구나!’
강사가 속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어렵게 얻은 기회를 틈타 두변을 죽이고, 천기도 강 노귀가 남긴 보물도 빼앗을 생각이었다.
대도주가 두변의 행방을 묻는다면, 천년사요가 두변을 잡아먹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것보다 더 완벽한 증거 인멸이 어디 있을까.
강무심과 강사가 두변을 향해 덮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두변의 등을 막았다. 다름 아닌 이도진이었다.
강무심과 강사가 손을 들던 찰나, 이도진은 두변에게 피하라고 외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두변의 등을 감싸 안았다.
퍽, 퍽.
대종사급 강자 강무심의 장력과 정상급 종사 강사의 장력이 동시에 이도진의 등을 공격했다.
두 사람이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두변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던 터라, 이도진조차도 두 사람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다.
“쿨럭.”
이도진이 피를 토하면서 두변의 등에 쓰러졌다.
이때, 동굴 안쪽에 있던 천년사요가 포효하면서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 나왔다.
갑자기 천년사요가 나타나자, 강무심과 강사는 혼비백산해서 재빨리 뒤로 돌아 도망치기 바빴다.
두 사람이 경공을 이용해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천년사요의 속도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천년사요에게 따라잡히자, 강무심은 혼자 도망치기 위해서 강사를 천년사요에게 던져버렸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친자식이잖습니까!”
강사가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천기도 강 노귀가 강사를 보자마자 그를 죽이려고 했던 건, 그의 부인이 바람이 났었고 그 바람난 상대가 바로 강 노귀의 쌍둥이 형제인 강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람난 아내가 강무심과 낳은 아들이 강사이니, 강 노귀가 치를 떨면서 강사를 죽이려 할 밖에.
강무심은 참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셈이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친자식을 매정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천년사요가 곧바로 입을 쩍 하고 벌렸다.
강사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숨겨두었던 암기를 전부 날리고, 내력을 몽땅 실어서 장력을 날렸다.
아우우우우!
이때, 천년사요가 고개를 휙 털면서 포효했다.
천년사요의 강력한 기운이 모든 암기를 튕겨 냈고, 강사 또한 수십 미터 밖까지 튕겨 날아갔다.
푸슉, 푸슉, 푸슉.
강사가 쏘아낸 암기들이 그의 온몸에 그대로 우수수 꽂혔고, 고개가 한쪽으로 꺾인 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강무심은 자기 자식을 버린 틈을 타서 수백 미터 밖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천년사요는 몇 초 만에 그를 따라잡았다. 대종사급 경공도 천년사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깜짝 놀란 강무심은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자신이 대종사급 무도 강자이고 천년사요가 무척 멍청하니, 잘하면 승산이 있으리라 여겼다.
“으아아!”
강무심이 소리를 지르면서 천년사요의 칠촌 급소를 향해 검을 찔렀다.
천년사요가 가볍게 그의 검을 피하자, 강무심이 곧바로 몸을 틀어서 천년사요를 뛰어넘어 두변을 향해 달려갔다.
교활한 강무심은 천년사요에게 눈속임용 공격을 하고 두변을 인질로 붙잡을 생각이었다.
천년사요의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건 맞지만, 좁은 통로에서 거대한 몸집을 돌리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강무심은 이때다 싶어서 더욱 빠르게 두변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일단 이도진을 찔러 죽인 뒤, 두변의 무공 근맥을 망가트리고 두변을 인질로 삼아서 천년사요를 협박할 생각이었다.
강무심은 이미 천년사요가 두변과 무척 친밀하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그러니 두변을 인질로 붙잡기만 하면, 천년사요도 제 말을 듣게 될 것이고, 어쩌면 사요의 천년 묵은 구슬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구슬만 얻게 된다면, 이미 대종사급 강자인 강무심의 무도 수준은 더욱 폭발적으로 향상할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해야 살길이 보이고, 곤경에 처해도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해야만 더 큰 수확을 얻는다고 했다.
강무심이 대종사가 되고, 대은구도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의 교활함과 연륜 덕분이었다.
강무심의 검 끝이 이도진과 점점 더 가까워져 갔지만, 안타깝게도 강무심의 회심의 일격은 수포가 될 모양이었다.
천년사요가 강무심의 등을 향해 초록색 독 안개를 뿜어냈다. 강무심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강무심은 몸 안으로 스며드는 독기를 내력으로 밀어내려고 바닥에서 뒹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맹독성인 기운이 강무심의 체내에 순식간에 스며들면서 그의 근맥을 미친 듯이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강무심의 몸이 차츰 마비되더니, 이내 손끝 하나 까딱할 수도 없게 되었다.
두변이 이도진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변의 두 눈동자가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두변은 쓰러져 있는 강사에게 다가가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 날 죽이지 마. 두변, 날 살려줘. 천기도는 네 것이고, 천기도에 있는 모든 보물도 다 네 거야! 제발!”
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두변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샥, 샥, 샥.
강사의 몸이 여덟 토막이 되었고, 완전히 죽어버렸다.
이번에는 강무심에게 다가갔다.
강무심은 중독되어서 온몸의 근맥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입과 혀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두변이 검을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강무심은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그저 평온한 얼굴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두변, 가까이 와 보게.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북명검파에 관한 아주 중요한 비밀이지. 북명대법이 두 개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흡성대법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고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나?”
두변이 강무심의 목에서 검을 서서히 떼어냈다.
강무심의 눈빛에 기쁨이 스쳤다.
“내 입이 점점 더 마비돼서 말을 하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조금 더 가까이 와 보려나? 누구든 죽기 전엔 진실된 말을 한다지 않아. 이리 가까이 좀 와 보게.”
두변은 강무심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검을 거두더니, 새빨개진 눈으로 무언가를 찾다가 어디선가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왔다.
강무심의 두 눈에 드디어 공포가 어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변, 뭘 하려는 거지? 북명대법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아?”
“너희 같은 놈들의 말은 단 한 글자도 믿지 않아.”
두변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덩이를 높이 치켜든 뒤, 강무심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콰직.
대종사급 강자이자 대은구도 장로 강무심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버렸다.
“착하지. 이리 와서 이것들을 먹어버려.”
두변이 말하자, 천년사요가 강무심과 강사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두 사람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다시 이도진의 곁으로 돌아온 두변은 그녀를 다시 다정하게 품에 안았다.
두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이마에 자신을 뺨을 비볐다.
이도진은 울컥울컥 피를 토해냈고, 두변을 바라보던 눈빛이 점점 더 따뜻하고 어려지더니, 마지막엔 꼭 헤어지기 아쉬운 어린아이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제발 죽지 말아요.”
이도진을 힘껏 끌어안던 두변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여인을 위해서 울어본 적 있어?”
이도진이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이도진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우리 나이대의 여인이 젊은 사내를 만나게 되면, 밤엔 그를 대왕처럼 모시지. 사내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온갖 애교를 부리고. 그리고 낮엔 사내를 아들처럼 챙겨주고 따뜻하게 보듬어줘. 그렇게 반년이 지나면, 사내는 다른 여인들이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게 된대. 이건 내가 아는 어떤 선배가 알려준 거야. 선배의 부군이 선배보다 훨씬 더 어리거든.”
두변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느꼈어요. 사저는 촘촘한 그물망처럼 나를 붙잡아서 내가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었잖아요.”
“난 곧 죽어. 강무심, 강사 그 악독한 놈들이 내 오장육부를 다 터트려서 네가 날 살리진 못해. 하지만 난 정말 죽고 싶지 않아. 두변, 나 죽고 싶지 않아.”
이도진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호흡이 점점 더 힘겨워졌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나 정말 죽고 싶지 않아. 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인데, 아까 여기 오는 길에도 미래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가득했는데. 네가 진정한 사내가 되면, 난 아이를 적어도 두 명 낳고 싶었어. 주안술을 열심히 수련하면 10년 뒤에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정말 죽고 싶지 않아. 나 정말 죽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