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92화 (292/648)

292장. 북명 종주의 후계자

닷새 뒤.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두변의 앞에 나타났다. 하진의 표정은 무척 엄숙하기도, 신성하기고, 흥분되어 보이기도 했다.

“두변, 얼른 준비해라. 신성하신 북명검파 종주 영도현 폐하께서 두 사제를 직접 만나고자 하신다. 사제가 세운 공훈이 무척 크니 아마 엄청난 포상을 하사하실 것이다.”

‘영도현 폐하라니? 무슨 뜻으로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 거지?’

두변은 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북명검파의 종주가 무도의 제왕이라는 걸 떠올렸다.

북명검파의 내부, 심지어 북명검파가 통치하는 무림 세계에서는 영도현을 무제(武帝)라고 부른다.

‘천하 무림의 제왕, 북명검파의 종주 무제 영도현이 나를 직접 만나겠다고?’

두변은 영도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천마교주 기음음이 몇십 년 전엔 천하에서 제일 강한 여인이었고, 적어도 대녕 제국에는 그녀의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기음음은 영도현을 맹목적으로 사랑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고, 그녀의 천마교는 결국 북명검파에 의해 파멸했다.

물론 지금은 기음음이 예닐곱 살 어린아이가 되었지만, 두변은 그녀가 수십 년 전에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두변이 감탄할 정도로 강하고 아름답던 기음음도 영도현을 사랑했다.

그리고 막추를 생각해보자.

막추는 머저리 여왕 막한보다 더 아름답고, 미인이 운집한 대은구도에서도 제일 미인이라 할 만했다.

무공으로 논하자면, 여마두 막추는 대은구도의 제일 고수이고, 대도주 하진조차도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 한다.

그 막추마저 영도현에게 열렬하게 구애했지만, 실패한 뒤에는 아예 실성한 듯 여마두 막추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니 영도현은 두변의 상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사람이지 않겠나.

두변이 사내구실을 제대로 하게 된다고 해도, 북명 종주이자, 무림의 황제에 비할 바가 안 될 것이다.

게다가 북명검파 제자들의 눈에는 영도현은 신과 같은 존재일 것이고.

두변은 갑작스럽게 무제 영도현을 만나러 가게 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그때, 두변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품에서 지심수정을 꺼냈다.

“이게 바로 지심수정이라는 건가요? 천년사요가 이걸 채집해서 제게 줬습니다.”

사실 천년사요가 직접 지심수정을 채집한 건 아니고, 방청의가 채집한 것을 천년사요가 빼앗은 것이다.

지심수정은 정말 아름다웠고 다이아몬드보다 투명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밝은 빛을 내뿜었다.

대도주 하진이 말했다.

“두 사제가 직접 종주께 바쳐도 된다.”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종주의 생신 선물로 대도주께서 직접 바치시지요.”

대도주 하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두변이 건넨 지심수정을 받아왔다.

그가 대전 안으로 들어가더니, 수정으로 된 병을 하나 가져와서 두변에게 건넸다.

“이건 건곤혼원단이다. 대은구도조차도 10년에 한 알 배정받을 수 있는 귀한 것이지. 건곤혼원단은 영구적으로 체질을 향상할 수 있는 원단인데, 두변 사제가 지심수정을 찾았으니 이 건곤혼원단을 사제에게 선물하겠다.”

두변이 깜짝 놀랐다.

“이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대은구도의 제자가 아니잖습니까.”

“두 사제도 지금은 대은구도의 일원이지. 천기도가 대은구도의 소속이니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변이 예를 표한 뒤, 건곤혼원단을 받아왔다.

“두 사제, 나를 따라오거라.”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두변을 데리고 대은구도 대전 안으로 들어가더니 대전의 중앙에서 비밀의 문 하나를 열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타고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두변은 경악했다.

‘이 아래는 만 장 깊이의 심연과 들끓는 암장(巖漿: 마그마)만 있을 텐데?’

두 사람은 계단을 타고 계속해서 내려가서는 천 미터 아래까지 이르렀다.

이곳은 진정한 의미의 지하라 할 수 있었고, 바로 아래에 있는 암장 때문에 주위의 온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의심이 많은 두변은 대도주 하진이 자신을 암장에 던져버리려고 이곳에 데려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석문 하나가 나타났고, 하진이 장치 몇 개를 돌리자 거대한 석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석문 너머에는 밀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밀실이라기보다는, 이계의 에너지가 침투한 땅굴을 밀실로 개조한 곳이었다.

밀실의 중앙에는 족히 3미터는 되는, 거대하고 투명한 수정이 서 있었다.

두변은 깜짝 놀랐다.

‘영도현이 이곳에서 나를 보자고 한다고?’

대도주 하진이 말했다.

“두 사제,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하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나간 뒤, 석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밀실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밀실 안에는 투명한 수정과 두변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고, 불빛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림 제왕 영도현을 이런 환경에서 만난다고?’

두변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거대한 수정이 갑자기 환하게 빛나더니 수정 중앙에 빛이 차츰 모이면서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미치도록 준수하고, 패기가 넘치는데, 동시에 심오하고 점잖은 문아(文雅)한 분위기의 중년 사내가 두변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내를 보는 순간, 두변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의 본능적인 첫 번째 반응은 이러했다.

‘이 사람은 천윤제보다 훨씬 더 황제 같구나!’

이 중년 사내의 매력은 정말 지구든 우주든 무엇이든 뚫어버릴 정도였다. 누구든 이 사내의 옆에 있으면 전부 오징어로 보일 것이다.

계청주도 나름 사내의 매력과 기개가 넘치는 사람인데, 이 사내 옆에 서게 되면 왠지 모르게 속이 좁고 비겁해 보일 것이다.

그 정도로 사내는 정말 산과도 같고, 바다와도 같은 기백을 풍기고 있었다.

두변은 영도현이 수정을 통해서 모습을 보인 걸 보고, 그가 아주 먼 곳에 있음을 짐작했다.

아주 먼 곳, 어쩌면 천 리 밖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수정을 통해서 모습을 보인 거지? 대녕 제국에서 이런 게 가능하다고?

북명검파가 이렇게 대단하다고? 아니면 이계 에너지가 침투된 이 땅굴이 대단한 건가? 천 리 밖의 사람을 수정을 통해 영상 송출을 할 정도로?

아니면, 영도현이 대단한 건가?

두변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수정을 빤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두변, 천기도 도주 자리의 계승과 관련해서 북명검파 장로회를 거쳤다. 너를 정식으로 북명검파 천기도 도주로 임명한다. 하지만 전 도주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탓에 천기도는 앞으로도 대은구도의 통제와 관리를 받는다. 네가 더 많은 공훈을 세우게 되면 천기도는 다시 독립할 수 있다.”

영도현이 말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영도현의 목소리는 무척 평화로워서 계청주보다 더 평온했다.

영도현은 일부러 자신의 위엄을 내세우는 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이 일만으로 너를 찾은 건 아니다. 네 천부적 재능은 평범하지만, 타고난 천운 덕분에 대은구도의 일천여 명 제자들의 목숨을 구하고 큰 공훈을 세웠더군. 내가 너의 과거를 알아보니, 문화 예술 쪽으로도 조예가 깊고, 겉으로 보기에는 간악하고 이상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아주 정직한 사람이더군. 조금 속이 좁고 과격한 것만 빼면 말이다.”

영도현이 말하다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미래의 북명검파 종주 자리를 두고 경쟁할 마음이 있는가?”

두변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림의 제왕이자, 북명검파 종주인 영도현이 자신을 만나는 이유가 이 일 때문인 건가.

두변은 자신이 대단하기도 하고 천운이 따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북명검파의 종주라니.

심지어 현 종주가 자신에게 제안한 것이니, 이건 꿈결에서도 믿기지 않을 일이었다.

“너무 놀랄 필요 없다. 지금 너는 아주 약하지만, 천형을 받고도 죽지 않는 걸 보니 천운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걸 뜻하지. 일국의 제왕이나 북명검파의 종주가 되려면, 무공 수준이나 품덕을 보는 게 아니라, 그에게 따르는 운을 봐야 하거든.”

두변은 영도현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지구에서도 한 나라의 황제가 되는 것은 개인의 능력 덕분이 아니라 운 덕분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천기도의 전 도주인 강무진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내가 그를 감금했고, 천기도의 등급을 강등했다. 하지만 그자는 위대한 점복 대사이고, 천기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었다. 그가 너의 천기를 엿보았기에 죽었고, 천기도 도주 자리를 네게 물려줬겠지. 이건 그자가 내게 전하는 마지막 간언이었고, 나는 그자의 죽음과 점복술을 존중한다.

북명검파 종주 후계자가 된다고 해서 네가 종주가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후계자는 경쟁하는 것이니, 네가 경쟁자들 사이에서 특출나야만 종주가 될 수 있다.”

두변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만약 제가 북명검파 종주 후계자가 된다면, 영원히 북명검파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걸 뜻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바깥의 세속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야 하고, 대은구도에서 머무를 수도 없다. 너는 북명검파 내부로 들어와서 가장 엄격한 훈련을 받게 될 것이고, 특수한 임무가 있지 않는 한 절대로 세속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두변이 북명검파의 후계자가 된다면, 그는 엄당의 모든 것과 대녕 제국의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한다.

두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엄당에서의 신분과 대녕 제국에 미련이 있는 것이냐?”

영도현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두변은 영도현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제 시야가 너무 좁아서 지금 가진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고, 대녕 제국의 흥망은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역사의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르는 것일 뿐, 무도만이 영원한 것이라고.

그런데 영도현의 다음 말은 다시 한 번 두변을 놀라게 했다.

“내가 영씨라는 걸 아느냐?”

두변은 흠칫 놀라면서 불현듯 한 가지를 떠올렸다.

영도현이 말을 이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 나는 대녕 제국의 황족이고 내 조부는 대녕 제국의 함녕제(咸寧帝)다.”

두변이 화들짝 놀랐다.

함녕제! 태조의 손자이자, 대녕 제국의 3대 황제!

그러나 백여 년이 지나고, 진왕(晉王)이 황위를 찬탈하면서 그 이후의 대녕 제국 황제는 진왕 혈통이 되었고, 함녕제는 대녕 제국의 금기가 되어서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함녕제가 패배하고 도망친 건 벌써 130년 전의 일이었다.

함녕제가 영도현의 조부라니!

두변이 아직 놀라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영도현이 이어서 말했다.

“북명검파 전체가 이 몸의 육순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난 올해 예순다섯이다. 나는 어렸을 때 대녕 제국의 추살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워낙 몸이 약하기도 해서 어머니께서 나를 북명검파에 보내실 때 나를 다섯 살 어리게 말하셨다. 나이가 많은 아이는 무도를 배우기엔 너무 늦었다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미 한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내 사존께서 내 나이를 눈치채셨지만, 이를 영원히 숨겨주셨다. 그 덕에 나는 북명검파에서 영원히 다섯 살 어린 나이로 살고 있지.

내 조부께서 쉰의 나이에 내 부친을 가지셨고, 내 부친께서도 쉰의 나이에 나를 가지셨다. 삼대독자인 내가 나의 사명을 위해 다시 황위를 되찾아야 할까? 조부와 부친께서는 평생을 황위를 되찾는 데에 심혈을 쏟으셨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두변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북명검파 종주의 의미가 더욱 위대해서입니까?”

영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북명검파는 동쪽 세계 전체를 수호해야 하니, 적어도 이 세계의 반쪽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에 비하면 대녕 제국의 흥망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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