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장. 거절
두변이 다시 침묵했다.
영도현이 물었다.
“네가 태생이 고자라고 들었다.”
“예.”
“북명검파 내부로 들어오면, 반년 이내에 네가 정상적으로 부인을 맞이하고 아이를 낳게 해줄 수 있다. 내가 예상을 네 부인으로 사혼해 주마.”
예상 선자요? 운중사를 죽인 그 여인? 막추가 말한 북명검파의 제일 미인?
막추 스스로도 자신의 미모에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북명검파의 제일 미인은 자신이 아니라 예상 선자라고 했었다.
게다가 예상 선자는 북명검파 천도맹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천도맹은 대녕 제국 세속 무도의 최대 맹약 조직으로, 이도전의 천도회, 패도회, 무당패, 화산검파가 천도맹의 구성원이었다.
“예상이 너보다 아홉 살 많은데, 두 사람의 사주팔자 합이 굉장히 좋더군. 네 정신에서 예상에게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두변은 또 한 번 놀랐다.
‘아니 어떻게 내 생각까지 읽을 수 있어?’
“둘이 만나게 된다면, 예상이 사명감이 강한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예상 선자가 종주의 따님입니까?”
“내 양녀이자, 직계 제자이다.”
두변이 갑자기 물었다.
“영 종주, 기음음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 기음음은 내 사저였지만, 감정적인 이유로 북명검파를 배신하고 나가서 천마교를 설립했다.”
두변은 더욱 놀랐다.
기음음이 북명검파의 제자였고, 영도현의 사저였다고?
“내 부인 기염염은 기음음의 쌍둥이 자매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두변은 이제야 모든 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북명검파가 왜 천마교를 없애려고 했는지, 기음음이 왜 서쪽 세계까지 끌어들여서 무도를 제패하려고 했는지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그녀는 북명검파를 완전히 없애고, 영도현이 자신의 앞에서 참회하는 것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기음음은 결국 패배했고, 북명검파에 의해서 천마교는 파멸했다.
영도현이 그해에 미남계를 이용해서 기음음을 해치려고 했던 것과 천마교를 없애려고 했던 건 전부 기음음의 거짓이었다.
기음음은 자신이 북명검파의 배신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은폐했다.
배신자가 새운 문파이니, 북명검파가 천마교를 없애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의천도룡기>(依天屠龍記)>에서 6대 문파가 명교(明敎)를 합심해서 없애려고 했던 것처럼, 북명검파는 그저 배신자를 처단하려 했을 뿐이다.
“두변, 만약 네가 북명검파 종주 후계자가 되기로 하고 세속 세계와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한다면, 나는 천도맹에서 예상을 불러와서 너와 혼인을 맺게 할 것이다. 그 이후로 너는 북명검파에 완전히 은둔해서 무도 세계에 몸을 담아야 할 것이다.”
북명검파의 제일 미인인 예상 선자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는 건 무척 매력적인 조건이긴 했다. 게다가 북명검파의 도움이 있다면, 반년 이내에 정상적인 남자가 될 수도 있고.
북명검파 종주 후계자가 된 뒤,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북명 종주가 된다면 그 위풍은 천윤제보다 더 대단할 것이다.
대녕 제국의 천윤제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매 순간이 지옥 같지만, 북명검파의 영도현은 무림의 제왕인 데다 천하 무도인에게 신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세속 세계와 완전한 단절은 의부, 황제를 배신하는 것이고, 혈관음, 계표표와 자신의 사명을 버리는 일이었다.
두변이 이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시스템이 짜준 계획에 따르지는 않게 되었다고 해도 사명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변이 허리를 숙여서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종주의 뜻깊은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세속 세계와 단절할 수 없고, 의부, 황제 폐하를 배신할 수 없으며, 제 사명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영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대녕 제국을 중흥으로 이끌고,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이 내 꿈이기도 했다. 흠, 그럼 네 선택은 내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세속 세계로 돌아가는 것인가?”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변, 강무진 이전의 천기도 도주가 누구였는지 아느냐?”
두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종주이십니까?”
“그렇다. 역사상 천기도 도주 세 명이 북명검파 종주가 되었는데, 내가 그중 한 명이다. 그래서 나도 점복술을 조금 할 줄 알지. 다만 나는 강무진과 달리 점복술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지 않고, 내가 점복술을 할 줄 안다는 것조차 잊고 산다.”
두변은 뭔가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깨달았다.
영도현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굉장히 먼 곳에 있고, 너를 만나기 위해서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다. 나는 내가 본 미래를 있는 힘을 다해 만회하고 싶다. 네 미래를 봤는데, 아주 모호하지만 끔찍했다. 네게서 북명검파의 파멸을 본 것 같다.”
두변은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북명검파는 반쪽 세계의 입구를 수호하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북명검파가 파멸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러니 내가 마지막으로 묻겠다. 세속 세계와 완전히 단절하고, 우리 북명검파의 종주 후계자가 되지 않겠는가?”
영도현은 두변에게 그 어떤 위협도 하지 않았다.
영도현으로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두변을 죽여버릴 수도 있지만, 종주의 존엄을 지키고자 두변을 회유하고 있었다.
두변은 고뇌에 빠졌다.
두변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었고, 북명검파의 종주 영도현을 존중했다. 대은구도 도주 하진 덕분에 북명검파에 대한 인상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의부, 혈관음, 계표표, 황제를 버릴 수 있을까.
아니, 두변은 절대로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만약 왼쪽에는 세속 세계, 오른쪽에는 북명검파를 올려둔 천칭이 있다면, 두변에게는 세속 세계 쪽이 훨씬 더 많이 기울어진 사람이었다.
꿈속 세계는 그에게 천하제일이 되라고 했지, 북명검파의 제일이 되라고 하진 않았다.
두변은 북명검파 종주 영도현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종주, 저는 세속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포기하고 버릴 수 없습니다.”
영도현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걸 위해서 생명을 대가로 치를 수 있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세속 세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네.”
두변의 단호한 답에 영도현이 탄식했다.
“하지만 너를 세속 세계에 돌려보낸다면, 미래에 북명검파가 파멸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오늘만큼 내가 점복술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원망한 적이 없다. 미래는 미래가 되면 알게 되는 것인데, 뭐하러 미리 알려고 했을까.”
영도현이 조용해졌다.
쿠구구궁.
거대한 수정석이 옆으로 움직이더니,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장이 흐르고 있었다.
몇천 도를 넘는 암장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수 있고, 누구든 이곳에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죽게 된다.
“두변, 만약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의지가 굳다면, 암장 아래로 몸을 던져라.”
화아아악!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밀실의 벽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하고, 두변이 서 있을 곳이 점점 더 좁아졌다. 이대로 서 있다가는 벽에 그대로 눌려 죽을 것이다.
“죽음으로 네 의지를 증명해라.”
두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다시 눈을 뜬 두변은 동굴 아래에서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흐르는 암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쉰 뒤, 몇천 도에 달하는 암장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번에 두변이 뛰어내린 암장은 더 이상 정신적인 환상이 아니라 실제 암장이었다. 주변에 벽이 밀리는 것도 전부 실제였다.
암장과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작열감은 대단해져만 갔다.
온도가 점점 더 높아질수록 죽음과 점점 더 가까워지는 셈이었다.
그때 열기가 솟구치면서 두변은 곧바로 혼절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같고, 찰나가 지난 것 같기도 했다.
두변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
두변은 대은구도 대전에 누워있었고, 옆에는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할 말이 매우 많은 듯했으나 끝내 탄식 한 번만 뱉고 말 뿐이었다.
“이것은 영도현 폐하께서 네게 주신 서신이다.”
대도주 하진이 서신 하나를 건넸다.
서신은 몹시 특수한 종이인데, 얇은 정석을 절삭해서 만든 듯했다.
두변, 너는 내게 너의 의지를 보여줬다.
나는 네게서 미래 북명검파의 괴멸을 보았다. 하지만 대점복술(大占卜術) 제2조에 의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죄를 가지고 현재의 사람을 처벌하면 안 된다고 했다. 강무진이 널 죽이지 않았으니, 나도…… 당연히 널 죽일 수 없다.
거기까지 읽은 두변은 마음이 흠칫 떨렸다.
미래의 죄를 가지고 현재의 사람을 처벌하면 안 된다라!
듣기에는 실행하기 몹시 쉬운 말 같지만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큰 도량을 가져야 할까?
네가 북명검파를 떠나 세속 세계로 돌아가면 북명검파에 있던 네 모든 신분은 전부 사라진다. 하지만 네가 북명검파로 다시 돌아오면 너는 여전히 천기도주가 된다.
강무진이 네게 남긴 모든 것은 다 너 개인에게 속한 것이다. 천기도에 속한 게 아니니 북명검파가 그걸 박탈할 권한은 없다.
그 말은 선대 천기도주 강무진이 남긴 모든 보물의 계승권이 두변에게 있음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었다.
상황이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니 북명검파는 항상 널 위해 대문을 열어놓겠다. 예상은 3년 안에 정혼하거나 시집가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다시 만나자.
두변이 마지막 한 글자를 다 읽었을 때 앞에 있던 모든 글자가 전부 사라지고는 종이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두변은 경외감에 동북쪽 방향을 향해 깊이 절을 올렸다.
그때 하진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두변 사제, 어째서이지? 나는 영도현 폐하께서 이토록 한 사람을 중시하는 건 보지 못했건만.”
“사람이 속세에 몸을 두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두변의 말에 도주 하진이 다시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했다.
“네 모든 물건은 다 이곳에 있다. 빠진 게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해 봐라.”
두변 옆에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괴수의 알 두 개와 벽사주 한 개, ‘환양대법’ 비급 한 권, 또 천기도주 강무진의 물건 몇 개와 대은구도에서 포상으로 받은 건곤혼원단 한 알이 있었다.
물론 흡성대법의 행방에 관해 이도진이 두변에게 써준 편지는 진작 두변이 읽고 난 뒤 불태워 버렸다.
“빠진 것 없이 전부 있습니다.”
대도주 하진이 물었다.
“이도진 쪽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할 텐가?”
두변은 그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리움을 남겨두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그럼 내가 자네를 배웅하지.”
이윽고 두 사람은 해변에 도착해서 작은 배에 올랐고, 대도주 하진이 앞에서 노를 저었다.
작은 배는 줄곧 동쪽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두변은 알아서 눈을 감고 명상 상태에 들어가서 대은구도를 떠나는 길을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다.
몇 시진 뒤.
“도착했다.”
하진의 목소리에 두변이 눈을 뜨니 조용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두변의 야생마가 조용히 그곳에 서 있다가 두변이 나타난 걸 보고는 환호하며 울부짖었다.
두변이 배에서 내리자 대도주 하진이 말했다.
“두 사제, 미래가 어찌 되든 나는 여전히 네가 대은구도에 은혜를 베풀어준 것에 감사하고 있다.”
두변이 답례하며 허리를 굽혔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것입니다.”
대도주 하진은 노를 저어서 또다시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두변 사제, 잊지 말아라. 북명검파에 돌아오기만 하면 너는 바로 천기도주가 될 것이다. 그 자리는 계속 너를 위해 남겨두마.”
짙은 안개 속에서 하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변은 백사장에 서서 바다 위의 짙은 안개를 바라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북명검파의 대은구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 양 느껴졌다. 그동안 시간이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은구도에 진입하기 전에 북명검파라는 존재는 두변에게 수수께끼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북명검파가 이 세계의 블랙홀 같은 존재라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두변은 북명검파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된 기분이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여전히 없음을 깨달았다. 북명검파라는 수수께끼는 전보다 더 신비로웠고 여전히 예측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두변이 더 높은 위치에 서야만 그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