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302화 (302/648)

302장: 피의 맹세

이건 절대로 두변의 목소리가 아니라 북명종주 영도현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젊은 시절 영도현의 목소리.

이건 두변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꿈속 시스템이 제어한 결과였다.

그러니 찰나 간에 두변마저 놀라서 얼이 빠졌다.

막추가 그 소리에 놀라서는 검을 쥔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이 흐릿해서 환각이 나타난 걸까?’

그녀는 머리를 한참이나 흔들더니, 제 자신이 영도현을 너무 그리워하고 사랑한 나머지 환각이 나타났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검을 힘차게 휘두르며 두변을 두 동강 내려고 했다.

이번에는 두변도 시스템에게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재빨리 얼굴에 두른 천을 벗어서 가면을 드러냈다.

영도현의 젊은 시절의 얼굴.

순식간에 여마두 막추는 완전히 넋이 나가서, 손에 든 날카로운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눈을 계속해서 비볐으나, 영도현이 계속해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랬다. 그녀 기억 속에 있던 영도현과 똑같았고, 그녀가 사랑한 영도현과 똑같았다.

비록 북명검파에서 수십 년을 지냈지만 20년이 넘도록 영도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영도현의 모습은 항상 젊은 시절의 영도현이었다.

“영랑(寧郎),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죠? 정말 당신인가요?”

막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스템이 두변에게 젊은 시절 영도현의 음색을 내도록 만들었다. 무한한 매력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막추, 너는 꿈을 꾸는 게 아니다. 정말로 나야.”

막추가 그에게 달려들더니 두변을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렸다.

뜨거운 혓바닥이 파고들면서 미친 듯이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몹시 열정적이었지만 또 몹시 풋풋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녀의 첫 입맞춤이었다.

이 여인은 이 나이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첫 입맞춤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영랑, 영랑, 아, 나의 영랑. 당신은 드디어 나야말로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나요? 마침내 나를 찾아온 건가요?”

막추는 깊이 입을 맞춘 뒤 제 옷을 벗어 던지고 두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두변은 놀라서 온몸이 굳었다.

‘이 여인의 정신병이 너무 심각한 거 아닌가?’

사실 막추는 지금 이성이 전무했다. 그녀는 환각 가루를 너무 많이 흡입해서 자신만의 아름다운 꿈속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시스템!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기왕 반항할 수 없으면 눈을 감고서 즐겨라. 막추가 이도진보다 더 젊고 더 아름다우니, 네게 좋은 일 아닌가.’

‘좋기는 개뿔! 난 이 여자가 무섭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막추가 화염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득 차오른 감정을 필사적으로 방출하려고 했지만……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돌 틈에 박힌 듯한 늙은이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지 않나.

‘안심해라. 그는 눈이 멀어서 볼 수 없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여마두 막추가 미친 듯이 두변과 얽히며 사랑을 나누려고 하자, 돌 틈에 박힌 노괴물이 냉랭하게 말했다.

“머뭇거리지 말아라. 내 말을 기억해. 서른두 명 중에 단 한 명만 살 수 있고, 나머지는 다 죽어야 한다. 살아남은 그 사람만이 흡성대법을 계승할 수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막추가 멈칫했다.

그 다음 순간, 노괴물이 갑자기 번쩍하더니, 두변과 막추 앞에 나타났다. 비록 눈은 멀었지만 이곳에 두 사람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노괴물이 두변과 막추의 머리 위로 그 촉수 같은 손을 들이밀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촉수가 벌어지는데, 그 안에는 사람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이가 있었다.

막추는 무공이 극도로 대단했다. 전성기일 때 그녀의 무공은 아마도 눈앞에 있는 이 노괴물보다 조금 약한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종사 서른 명을 죽여서 내력을 9할이나 소진했다. 게다가 너무 많은 환각 가루를 흡입했고 ‘영도현’과의 재회로 인해 머리가 흐리멍덩해졌다. 이성을 완전히 잃으면서 전투력이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노괴물에게는 또다른 괴수까지 있었다.

그가 두변을 죽이려고 한다면 막추는 그를 막는 게 몹시 어려울 것이다.

노괴물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해라. 둘 중 단 한 명만 살 수 있다. 아니면 전부 죽거나.”

지금 여마두 막추에게 아주 조그마한 이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무공이 극도로 강한 영도현이 어떻게 살해당할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겠나? 어째서 그녀의 보호가 필요하겠나?

하지만 지금 여마두 막추에게는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사랑뿐,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자신의 환각에 빠져 있었다.

“영랑, 당신은 기염염 그년을 아내로 맞이한 걸 후회하나요?”

막추가 두변을 바라보며 절절하게 물었다.

시스템이 두변의 목소리를 영도현의 목소리로 통제하고 있었다.

“후회하오. 막추, 난 후회했소. 당신이야말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오. 이제야 나는 알겠소. 내 진정한 사랑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여마두 막추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 뒤 그녀가 다시 두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내가 당신 앞에 무릎 꿇고서 당신에게 나를 사랑해달라고, 나를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했어요. 이제 당신은 잘못을 알았나요? 후회를 하나요?”

영도현의 젊은 시절 목소리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절절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막추, 내가 잘못했소. 정말로 후회하오. 나는 당신을 선택했어야 했소. 당신을…….”

그 순간 막추는 한평생 원했던 걸 전부 이뤘다.

그녀가 흡성대법을 얻으려 했던 이유는 천하무적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영도현을 쓰러뜨린 뒤, 그가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영랑, 내가 한평생을 기다린 가치가 있네요. 나는 당신에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나야말로 당신을 가장 사랑한 여인이라는 걸.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을 수도 있어요.”

그녀가 두변에게 깊이 입을 맞췄다.

“잘 살아있어요. 내가 지옥에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게요.”

이윽고 여마두 막추가 벌떡 일어나더니, 암장의 강을 향해 뛰어내렸다.

“안 돼!”

두변이 고함을 지르며 재빨리 뛰어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암장 아래에는 막추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암장의 소용돌이뿐이었다.

암장의 온도가 천 도가 넘으니 어떤 이든 무엇이든 떨어지면 순식간에 녹을 것이다.

조금 전, 이 모든 일이 너무나 빨리 일어났다.

두변이 반응할 겨를도 없었고, 막추의 행동도 너무 빨랐다.

심지어 그녀는 옷을 입지도 않은 채 곧바로 뛰어내렸다.

두변에게 남은 건 그녀가 암장에 뛰어내리던 순간의 아름다움뿐이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흩날리면서 희민지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얼굴 가득 행복함에 젖어 있었다.

한 세대를 풍미한 여마두가 이렇게 죽었다고?

노괴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녀 간의 정이란 게 대체 무엇이길래, 생사를 걸게 만드는 것일까. 젊은이, 이게 다 자네가 지은 죄라네.”

두변은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게 내가 지은 죄라고?

당연히 아니지!

막추는 수십 년 전부터 영도현에게 빠져 있었다. 두변은 오늘 촉매제를 이용해서 그 인과를 활성화시켰을 뿐이다.

막추가 목숨까지 바치면서 제가 사랑한 사람을 위해 양보했다는 사실이 몹시 감동스럽기는 했지만, 동시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이 정도까지 미칠 수 있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최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막추가 흡성대법을 손에 넣게 된 후 천하에 해를 끼치는 결과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래……. 이게 최선의 결과로군. 그녀는 몹시 행복하게 죽었으니까.”

돌 틈에 박혀 있던 노괴물이 말했다. 물론 그는 지금 더는 돌 틈에 있지 않고 두변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노괴물의 두 다리는 장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반 척(尺 약 16.66cm) 길이도 안 될 정도로 완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는지 후천적으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노괴물이 말했다.

“후천적으로 오그라든 것이다. 나는 사공멸(司空滅)이다. 흡성대법의 전수자이자 북명검파 북종의 전수자지.”

두변이 조용히 대답했다.

“사공 선배를 뵙습니다.”

노괴물 사공멸이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서른두 명 가운데 단 한 명만 살 수 있다.”

“이제 저 한 사람만 남았군요.”

그건 확실히 기묘한 결과였다. 서른두 명 중에서 무공이 가장 약한 두변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동으로 최후의 승리를 획득했으니.

노괴물 사공멸이 말했다.

“만약 내가 서른두 명 중에 어찌 되었든 최후의 결과가 너 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는 믿겠나?”

두변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의 단어 하나, 구두점 하나까지 믿지 않았다.

“사실이 그렇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었다. 내가 서른한 명을 데려온 건 전부 널 위해 그들을 순장시킨 것이다. 흡성대법의 계승, 북종의 계승은 항상 의식을 치르는 느낌이 필요하고, 강한 생명 수십 개를 사용해서 전승을 부각시켜야 하지. 우리 북종은 세력이 몹시 위축되었지만 최고로 중요한 이 순간에 비장한 느낌이 아주 조금도 없어서는 안 되니까.”

두변은 속으로 그 말에 더욱더 냉소했다.

‘내가 영도현 가면을 가져왔다는 것을 당신이 미리 알았다고요? 당신은 여마두 막추가 나머지 종사 서른 명을 전부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까? 여마두 막추가 기꺼이 희생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겠습니까? 나는 여전히 당신의 내뱉은 반 마디뿐 아니라 마침표조차 믿지 않습니다.’

노괴물 사공멸이 말했다.

“나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않는 걸 알지만 모든 게 다 상관없구나. 이제 너는 무릎 꿇고 맹세를 해라. 한마디씩 나를 따라 말해라.

나는 맹세합니다! 북명검파 북종의 역대 선조의 유지를 계승해서 남종 반역자들을 소멸시키는 걸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북종이 북명검파의 정통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죽어서야 그 임무를 마치겠습니다. 남종을 소멸하고 북종을 회복하겠습니다!”

두변은 이 노괴물 사공멸이 말한 모든 글자가 입에서 소전체가 되어서 나온 뒤에 몸으로 파고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맹세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맹세합니다! 내 평생의 정력을 사용해서 북종 잔여 세력을 찾아 그들을 다시 북종 휘하에 단결시켜서 남종을 공격하겠습니다. 북명검파의 정통을 탈환해서 남종 반역자들을 깨끗이 소멸시키겠습니다!”

그 맹세가 입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소전체가 빛처럼 나오더니 다시 체내로 파고들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이건 피의 맹세이지. 모두 내력 현기와 혈무(血雾)로 만든 것이다. 이 맹세가 체내에 새겨질 경우, 영원히 그걸 지울 수 없고 영구적으로 신체에 흔적을 남긴다.’

노괴물 사공멸이 말했다.

“날 따라 피의 맹세를 하라. 그런 뒤 내가 흡성대법 비급을 너에게 전수해줄 수 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피의 맹세를 하면 안 된다. 절대, 절대 안 돼. 숙주, 네가 예전에 내 말을 여러 번이나 듣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절대로 저 피의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는 어째서 혈서를 읽지 않느냐?”

“저는 읽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괴물 사공멸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네가 감히? 네가 감히 안 읽겠다고?”

이윽고 그가 실성하기라도 한 듯이 필사적으로 손발을 휘저었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지만 고강한 무공을 가진 이라서, 사람의 피부를 찢어놓을 듯한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한참이 지나서야 노괴물 사공멸이 물었다.

“어째서 읽지 않는 것이지?”

“저는 이 속에 있는 선과 악, 정사(正邪)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정사를 구분할 게 있다고? 영도현은 위선자이며, 사람의 감정을 속이는 놈이다. 도덕군자인 양 점잔을 뺀 가짜 성인이지. 너는 운중사를 아느냐?”

두변이 놀라며 답했다.

“압니다.”

“운중사는 내 제자다. 헌데 너는 그의 또 다른 신분을 아느냐?”

“모릅니다.”

“그는 영도현의 사생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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