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장: 예상 선자
“너는 그 애의 천부적인 무도가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 그 애가 얼마나 천재인지 알아? 스물여섯 살에 종사를 돌파하고, 서른두 살이 돼서 대종사 경지를 눈앞에서 돌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도현의 제자 예상의 손에 죽어버렸다.”
두변은 그 말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스물여섯에 종사를 돌파했다고? 서른두 살에 대종사 돌파를 눈앞에 뒀고?
운중사, 그 악질이 그렇게 강했다고?
“너는 운중사가 어째서 반드시 죽어야 했는지 아느냐? 바로 그가 영도현의 혼외자였기 때문이다. 만일에 대비해서, 영도현이라는 무림 제왕의 명성에 해가 될까 봐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두변은 어이가 없었다.
무림 제왕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게 뭐 어떻단 말이지?
영도현이 치정을 일삼기라도 했나? 아니잖아!
두변이 영도현의 위치에 앉았다면 적어도 절세 미녀 예닐곱 명을 맞아들였을 것이다. 혼외자라고 해도 집으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그 모친까지 함께 집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물론 굳이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을 죽일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괴물 사공멸의 말을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
운중사가 노괴물 사공멸의 전수자라면 북종의 전수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북명검파는 반드시 그를 죽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도 즉시 죽여야 했을 것이다.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된다고 하지 않나.
“너는 여전히 그 피의 맹세를 읽지 않을 것이냐?”
“그렇습니다. 제가 그 속의 선악과 옳고 그름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괴물 사공멸이 노호했다.
“무슨 선악? 무슨 옳고 그름? 어린애나 옳고 그름을 찾지, 어른은 이해득실을 따질 뿐이다!”
이윽고 노괴물의 두 큰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뻗었다. 내력을 다해 훅하고 빨아들이자, 그 순간 비급 한 권이 곧바로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이게 바로 흡성대법의 비급이다. 이건 전설의 비급이자 천하 최강의 비급이지. 북명검파를 대표하는 보물이기도 하고. 흡성대법을 얻기만 하면 20년 뒤에 너는 천하제일 고수가 될 수 있다. 너는 설마 그걸 원하지 않느냐?”
이게 바로 흡성대법 비급이구나!
흡성대법 비급은 다른 일반적인 비급과는 다르게 두루마리 형태였다. 정석을 절삭해서 종이처럼 만든 두루마리인데, 그것도 고작 절반에 불과했다.
북명대법이 둘로 나누어졌다고 들었다. 그게 뜻밖에 이런 방식으로 찢어져서 나누어졌을 줄이야.
두변은 당연히 갖고 싶었지만 시스템이 그에게 절대로 피의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엄숙하게 경고했었다. 두변으로서는 당연히 시스템의 뜻을 따라야 했다.
두변이 여전히 고개를 젓자, 노괴물 사공멸이 냉랭하게 말했다.
“기왕 그렇다면 나를 무정하다고 탓하지 말아라. 그럼 이제 죽어라!”
그러더니 사공멸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두변의 머리를 움켜쥐고 살짝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두변의 머리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네가 이 맹세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널 죽이겠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북종을 통일하고, 남종을 소멸시킨다, 북명검파의 정통성을 탈환하고, 영도현을 소멸시킨다고 맹세해라!”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안 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돼!’
두변은 눈을 감고 오히려 웃었다. 이미 오늘의 상황이 이렇게 벌어질지 간파하고 있던 차였다.
“그럼 네가 이제 죽어줘야겠구나.”
노괴물 사공멸이 냉랭하게 말하더니, 두변의 머리통을 쥐어서 터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휙.
주위에 매혹적인 향기가 깔리면서 온갖 꽃들이 만발한 장소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남자 둘과 여인 하나.
중년 사내와 청년은 한 명은 회색 장포, 한 명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특히 청년의 풍모는 담담하고 신선 같은 것이 제법 영도현 같기도 했고,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그에 비해 여인은 긴 치마를 입고 있는데, 얼굴에 면사(面紗: 얼굴을 가리는 베일)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두 눈만 보이는 것이 몽환적이기만 했다. 그녀의 눈빛은 차디찬 연못 같기도 하고, 푸른 바다나 가을 물결 같기도 했다.
여인이 분명히 그곳에 서 있으면서도 구름 위에 우뚝 솟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몹시 가까운 거리에 있건만 요원한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이름을 알리지는 않았지만 두변은 거의 단숨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영도현의 의녀(義女)이자 직계 제자, 북명검파의 제일 미녀인 예상 선자이리라.
“사공멸?”
예상이 묻자 노괴물이 경악을 금치 못하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웃었다.
“이렇게 너희 북명 남종을 불러들였을 줄이야. 하늘의 뜻이군, 하늘의 뜻이야!”
예상 선자가 말했다.
“사공멸, 너는 총 295항목의 사람을 죽이는 중죄를 범했고 북명검파를 분열시켰다. 나는 북명검파를 대표해서, 천도맹을 대표해서 너를 사형에 처한다.”
사공멸이 큰소리로 하하 웃었다.
“영도현이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이미 천하를 종횡무진했다. 날 죽이고 싶다고? 고작 너희 세 명이 나를 죽이겠다고?”
그는 움츠러진 두 다리로 힘차게 뛰어오르더니 수십 미터 높이를 날아올라서 독수리처럼 세 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사공멸이 지금은 불구가 되어 내력과 현기가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막추 여마두보다 더 고강한 무공을 가졌으니 두려울 만했다. 거기에 아까 그 괴이한 괴수까지 있으니 어쩌면 예상 선자 등 세 사람은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중년 남자가 갑자기 특이한 지팡이를 꺼내 드는데, 지팡이 끝에 달린 괴상한 보석에서 이상한 빛이 나고 있었다.
솩.
그 강대한 괴수가 빛에 쪼인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더니, 빛에 닿는 부분이 갑자기 부식하면서 짓무르기 시작했다.
“아오오오오아!”
악에 받쳐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던 괴수는 온몸이 한마디씩 무참히 짓무르더니, 마지막에는 암장에 그대로 빠져버렸다.
거대한 문어와도 같던 괴수가 이렇게 연약한 면이 있었다니?
이쪽에서 예상 선자가 노괴물 사공멸과 홀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청년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입으로 무언가를 조용히 읽고 있었다. 특별한 범어(梵語) 같기도 하고, 두려운 저주를 읊는 것 같기도 했다.
세 사람은 이곳에 오기 전에 사공멸을 제대로 파악하고 온 게 분명했다.
노괴물 사공멸은 두 다리가 움츠러든 데다가, 두 눈마저 멀어버려서 귀와 정신 감응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러니 그의 귀가 특히나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북명검파의 청년 제자가 외우고 있는 주문이 전적으로 사공멸을 통제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사공멸의 온몸의 근맥이 불끈 솟아오르더니 온몸의 진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 사이 예상 선자는 마치 꽃 그림자처럼 노괴물 사공멸을 둘러싸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꽃 그림자가 십여 개에서 수십 개로 늘어나서는 사공멸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끊임없이 검무를 추고 또 추었다.
심지어 그녀는 정면 공격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결국에는 화려하게 흐드러진 꽃과, 차디차고 날카로운 검영(劍影)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사공멸의 몸이 계속해서 부풀어 올랐다. 이건 몹시 두려운 신호였다. 현기 내력이 근맥 밖으로 새어나가서 근육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멸(滅)!”
예상 선자가 순식간에 멈추는 순간, 수십 개의 화려한 그림자가 하나로 돌아왔다.
공중 가득하던 검영이 순식간에 걷혔다.
“멸!”
가부좌로 앉아서 주문을 외우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천둥소리처럼 일갈했다.
“아아악! 난 승복 안 해. 승복 못 한다고! 너희는 부정한 수단을 썼어. 너희는 나와 광명정대하게 싸우지 않았어. 난 인정 못해!”
노괴물 사공멸이 울부짖었지만, 그의 몸은 점점 더 팽창해서 이제 한계치까지 이르렀다.
펑!
그의 더할 나위 없이 추한 몸이 갑자기 터져버렸다. 말 그대로 분골쇄신이라, 바닥에는 시신이라고 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두변은 그 장면을 보고 놀라서 넋이 나갔다.
북명검파에 뜻밖에 저런 살해술이 있다고?
저 노괴물 사공멸은 흡성대법의 전수자로 절정의 무공을 가졌고, 심지어 막추 여마두보다 더 대단한데, 저렇게 쉽게 예상에게 죽임을 당한 거야?
예상은 심지어 직접 공격하지도 않았잖아!
고작 영도현의 의자이자 제자일 뿐인데도 저 정도로 강하다면, 영도현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노괴물 사공멸이 산산조각나서 죽은 뒤, 흡성대법 비급 두루마리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떨어졌다.
예상 선자가 상자 하나를 꺼내서 공중에서 흡성대법 두루마리를 받아 담아서는 그 중년 남자에게 건넸다.
“이사형, 보세요.”
중년 남자가 그걸 건네받은 뒤, 그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확인하고 그 기운을 맡더니 말했다.
“아마 맞을 거다. 이게 바로 흡성대법의 비급이다.”
예상 선자는 정석 상자를 닫은 뒤 밀랍 인장을 찍었다. 흡성대법 비급을 철저히 봉인해버린 것이다. 영도현에게 넘겨주기 전에 절대로 상자를 열지 말라는 말이었다.
북명검파의 청년 제자가 말했다.
“천부적인 무도 재능도 떨어지고, 혈맥도, 근골도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무리해서 흡성대법을 수련하려고 시도하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지. 종주 폐하께서 우리를 조금 지도해주셨을 뿐인데도 손쉽게 반역자 사공멸을 없앨 수 있었어.”
예상 선자가 북명검파의 청년 제자를 보며 말했다.
“기란정(紀蘭亭) 사형,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너와 나는 사남매라서 한 몸이나 다름없는데 감사하다고 말할 게 무어냐.”
기란정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이윽고 예상 선자가 두변 앞에 다가가서 물었다.
“두변 귀하?”
북명검파에서 만났다면 그녀는 두변을 천기도주라고 불렀을 것이다.
두변은 제 눈앞에 서 있는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북명검파에서는 두변이 승낙만 하면 이 여인이 그의 아내가 된다고 했었다. 심지어 그가 거절하기까지 했는데도 영도현은 여전히 3년 안에 예상 선자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니 두변이 그 3년 안에 그녀를 원하기만 하면 그녀는 언제든지 두변의 정혼녀가 될 것이다.
두변은 그에 대해서는 승낙도, 거부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청년이 다가와서 말했다.
“두변, 네가 종주 폐하를 사칭한 것은 죽을 죄다!”
예상 선자가 말했다.
“두변 귀하, 당신은 어떻게 흡성대법의 행방을 알게 된 건가요? 혼자서 알게 된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가 알려준 건가요? 만약 다른 이가 알려줬다면 그자는 누군가요? 그 반역자가 누군지 자백하면 일부 공을 세운 것으로 가늠해서 속죄할 수 있어요.”
행방을 알려준 자가 이도진이라는 걸 자백하라는 뜻이었다.
두변이 말했다.
“아무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막추에게서 흡성대법의 행방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예상 선자가 말했다.
“흡성대법은 북명대법의 일부이자 우리 북명검파를 대표하는 보물이에요. 당신은 북명검파의 일원으로서 어째서 위에 보고하지 않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려고 했죠?”
두변이 냉소했다.
“예상 선자,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은데 말이죠. 영도현 종주가 나더러 북명종주의 후계자가 돼서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지만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나는 북명검파를 떠났으니 더 이상 북명검파의 일원도 아니고요. 그러니 북명검파를 위해 흡성대법을 빼앗아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죠.”
북명검파의 청년 제자 기란정이 적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두변을 노려보았다.
“천도맹의 예상 선자를 모독하고 북명종주를 사칭했으니, 내가 북명검파를 대신해서 너를 사형에 처하겠다!”
기란정이 단칼에 두변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그 순간!
콰과과광.
그와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무시무시한 암장이 백 미터 높이로 치솟으면서 열풍이 불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