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305화 (305/648)

305장: 이리 와요

선실 안.

두변은 내심 조금 긴장했다. 그가 곧 펼쳐 보려고 하는 건 전설적인 비급이었기 때문이다. 북명검파를 대표하는 보물, 아무리 그게 일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두변은 흡성대법의 학습 난이도에 대해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해로로 가면 대략 이틀 뒤에야 염주항에 도착하니, 이틀 내내 명상 세계에서 비급을 배우려고 했다.

그런데…….

흡성대법 비급을 펼치는 순간, 이것이 이전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이 두루마리는 대단히 길어서 대략 십여 미터 정도가 되었다.

둘째, 그 위의 글씨가 몹시 작고 그림도 매우 작아서 극도로 복잡해 보였다. 게다가 두루마리 위의 글씨와 문안은 여러 층으로 나뉘었다. 가장 표면의 한 겹은 문자와 도안이고, 그 아래에 복잡한 문안이 있는데 기이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두변은 정신력을 모아서 글씨 아래에 있는 문안을 제대로 관찰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문안들이 수많은 빛으로 변하더니 두변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 전체가 갑자기 빛을 내뿜더니 그대로 두변의 체내로 파고들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단전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된 거지?

휙, 휙, 휙, 휙, 휙.

너무나 많은 정보가 두변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고, 너무나 복잡한 기운이 두변의 단전 안으로 밀려들었다.

잠시 후, 두변은 오히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면서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이 되었다.

이게 바로 이세계의 비급 두루마리인가?

두변이 예전에 배운 전설적인 비급, 육맥신검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럼, 그건 육맥신검 원본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 흡성대법 비급 두루마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비급은 천지의 원기를 끊임없이 집어삼켜서 자신의 글자와 문안 속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세계의 원본 두루마리는 배울 필요가 없이 곧바로 머릿속과 단전 속으로 파고들어서 근맥과 신체를 개조한다.

어쨌든 이세계의 원본 비급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소프트웨어의 원리에 관해서는 알 필요도 없이, 설치 완료 후에 바로 사용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대녕 제국 세계의 비급은 조잡한 편이라서 깊이 이해하고 점진적으로 배워야 했다.

어쩐지 북명검파의 북명대법이 둘로 나뉘어져서 흡성대법이 종적을 감추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이미 북명대법을 배운 종주들이 외운 내용을 다시 묵사하면 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 비급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니, 설령 다시 외운 걸 써낸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다.

모든 과정에서 두변의 두뇌는 시종일관 텅 빈 것 같았다.

흡성대법 비급이 수십 년간 집어삼킨 천지 기운이 아주 조금씩 두변의 근맥을 개조하고, 단전을 개조했다. 그런 뒤 이 공법을 두변의 체내에 깊숙이 새겨놓았다.

애초에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한 시진, 두 시진, 세 시진, 어느덧 다섯 시진이 지났다.

두변이 또다시 흡성대법 비급 두루마리를 살펴보니 표면층의 문자와 도안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빛을 잃어버렸다. 그에 비해 두 번째 층의 도안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왜냐하면 기운이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어째서 모든 세대의 북명종주만이 북명대법을 배울 수 있었는지 알 듯했다. 왜냐하면 이 비급은 수십 년간 천지 기운을 집어삼켜야만 한 사람이 배울 정도의 기운이 충분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두변은 체내에 있는 이 흡성대법이 온전한 게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걸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흡성대법이 무공 경지 향상에 너무나 뚜렷한 결과를 보여주니, 다들 참지 못하고 그걸 사용하려고 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목이 말라서 독이 든 술을 마셔 갈증을 푸는 상황과 같았다.

“적의 기습이다. 적의 기습이야!”

바로 그때, 밖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슉, 슉, 슉 슉.

이어서 쇠뇌가 공중을 긋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두변은 몹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해역은 전적으로 대녕 제국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일 것이다. 두변이 탄 배는 동창과 진남 공작부 깃발을 걸고 있었다. 대체 누가 간덩이가 부어서 그에게 공격을 퍼붓는 걸까?

해적인 걸까?

그럴 리 없었다. 이 해역 최대의 해적은 혈관음의 혈교방이었다. 동창은 그들의 절대적인 맹우이니, 두변은 그들의 남자 주인인 셈이었다.

삐걱, 삐걱.

두변은 바깥에서 해선을 포위하는 소리와 투석기 소리를 들었다. 거리가 몹시 가까워서 수백 미터에 불과했다.

적군은 해선이 총 네 척인 데 반해, 두변 쪽은 온전한 부대가 아니라 해선 단 한 척뿐이었다. 아무래도 안남 왕국의 전쟁이 너무 긴박하게 펼쳐지기에 두변을 광서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전함 부대를 빼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배에 탄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두변이 갑판으로 올라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들은 누구길래 감히 진남 공작부와 동창의 해선을 공격하려 드는 겁니까? 모반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역시나 그 말을 듣고 해선 네 척에 장착된 투석기가 동작을 멈췄다.

이윽고 해선 하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귀하가 바로 동창의 천호 두변인가요?”

그 목소리에서 두변은 많은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우선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도 진지했다. 그런데 두변은 누구인가? 여인이라면 백전백승의 백전노장이자 인간쓰레기가 아닌가.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말투에서 음란함을 읽어내고 말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름다운 부인이 하늘거리는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그 몸매, 그 눈빛, 그녀의 구석구석 모든 곳이, 나는 사내라면 누구나 다 지아비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아름다운 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우선 내 소개를 하죠. 나는 임묘선이에요. 마련교 단주죠. 내게 또 하나의 신분이 있는데 바로 임악선의 사촌 누이에요. 그 외에 또 하나의 신분은 바로 임악선의 아내죠. 두변 대인, 와서 이야기를 나눠요.”

두변이 공수하며 말했다.

“임 부인, 당신의 부군은 망나니더군요. 당신을 등지고 밖에서 엉망으로 굴고 있었습니다. 제가 벌써 당신 대신 그를 죽였으니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름다운 부인이 말했다.

“내 부군은 남자 망나니이고, 나는 여자 망나니예요. 우리는 각자 노는 걸 좋아해서 그는 정부들을 거둬 키우고, 나도 정부들을 거둬 키웠죠. 한데 우리는 청매죽마(靑梅竹馬)라서 서로에게 두터운 감정을 갖고 있어요. 그가 나를 수없이 구해줬듯이 나도 그를 수없이 구해줬죠.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해요.

이 난세에 우리는 서로를 목숨처럼 여겼는데 당신이 그를 죽였어요. 내가 몇 달간 대녕 제국 절반을 찾아 헤맨 건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죠.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도무지 당신을 찾지 못했어요. 찾으려 할 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더니 신경 쓰지 않으니 오히려 알아서 내 앞에 나타났군요.”

아름다운 부인 임묘선은 원한이 뼈에 사무친 모습에, 아름다운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버렸다.

이, 이런 감정은 너무나 복잡하지 않은가.

이들 부부는 신체적으로는 서로를 엉망으로 배신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또 서로를 목숨처럼 여기고 더할 나위 없이 금실이 좋았다. 이걸 보고 할리우드 스타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임묘선은 가슴을 칼로 후비는 듯 아팠다. 남편 임악선에게 절절한 감정을 가진 만큼 두변을 향한 원한이 치솟았다.

두변이 말했다.

“임 부인, 너무 상심하지 마시지요…….”

그러는 동시에 최고 속도로 멀리 도망치라고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1초 뒤, 상대방의 배에서 벌어진 장면에 두변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건강미가 넘치는 화끈한 몸매를 가진 절색의 여인이 누군가에게 밀려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인은 온몸이 특수한 밧줄로 묶여 있는 데다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뭔가에 홀린 듯 두 눈마저 흐릿했다.

계표표?

계표표가 뜻밖에 마련교 수중에, 임묘선 저 악녀 수중에 떨어지다니!

“두 대인, 그녀는 당신의 여인이겠죠. 내가 이 여인을 잡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나요? 그녀는 무공이 참 고강하더군요. 이렇게 젊은 종사라니, 대단히 부러울 지경이죠. 한데 그녀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는데 지나치게 정의롭더군요. 그러니 쉽게 함정에 빠졌죠. 독을 쓰고, 함정에 빠뜨리기도 해서 최후에는 내가 직접 나서서 그녀를 잡았죠.”

임묘선이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그때 잘생긴 사내 하나가 갑판 위로 걸어 나왔다. 그는 온몸에 흰옷을 입었는데, 눈가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이 방탕함과 사악함이 가득했다.

“백련화가 두변 대인을 뵙겠소이다.”

그 잘생긴 청년 공자가 두변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백련화, 두변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운중사가 사라진 뒤, 무림에서 그의 추종자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바로 부녀자를 더럽히는 강간범 말이다.

이 백련화는 그중 두각을 보였던 사람이다. 어려 보이만 이미 서른 몇 살이 넘었다. 그는 수완이 악랄하고 사악해서 그에게 짓밟힌 여자는 며칠 뒤 열 살이나 늙어 보인다고 했다.

뜻밖에 저자도 마련교에 들어갔다니.

백련화가 임묘선의 뒤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누이, 내가 계표표에게 군침을 흘린 지 아주 오래 됐지 않아. 최근 며칠간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거든. 오늘은 내가 그녀를 먹게 해줄 수 있겠어?”

임묘선이 물었다.

“며칠이나 먹으려고?”

“열흘 정도? 그녀는 무공이 대단히 고강하니 체내에 정화된 기운이 분명히 넘치지 않겠어? 그러니 열흘은 빨아먹어야지. 하하, 마련교에도 감사하고, 그 강 노귀에게도 고맙고 그러네.”

여기 또 음기를 채집해서 양기를 보충하는 그 수법을 쓰는 자가 있구나. 그래서 백련화가 이토록 어려 보였구나. 강 노귀 그 미치광이가 환양대법까지 밖으로 누설한 건가?

백련화가 음흉하게 말을 이었다.

“하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인간 탕약이 되는 게 너무 안타깝네. 한평생 잠자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한데 그녀에게는 무서운 아버지가 있으니 아무래도 조금 재미를 보고서 바로 죽이는 게 좋겠지. 내가 최근 며칠이나 참으면서 아무 여인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열흘간 그녀를 백 번은 먹어야겠어.”

임묘선이 두변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두변 대인, 당신의 여인을 구하고 싶나요? 그럼 이리로 와요.”

그때 계표표의 아름다운 눈은 이미 흐릿했다. 이건 분명히 임묘선이 그녀에게 약을 먹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변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새로운 임무 개시: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고서 계표표를 구하라.

흡성대법을 사용해서 마련교 단주 임묘선과 백련화의 내력을 집어삼켜라!’

“이리 와요…….”

마련교 단주 임묘선이 두변을 향해 끊임없이 손짓을 했다.

“좋습니다.”

두 배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곧 몇 미터 길이의 판자를 두 배 사이에 걸쳐두었다.

“대인!”

진남공의 병사 한 명이 만류했다.

“괜찮다.”

두변이 웃어 보인 뒤, 판자를 건너 임묘선의 배에 도착했다.

“세상에 정이 무엇이길래, 사람에게 생사를 걸게 만들까!”

임묘선이 잔인하게 웃더니 두변에게 다가와 병을 하나 꺼내서 두변의 코밑에 대고 흔들었다.

이상한 향기가 콧구멍 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두변은 순식간에 혼절해 버렸다.

아니, 혼절한 척했다. 벽사주를 입에 머금고 있어서 혼절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