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장: 절세의 지하성
한 중년 사내가 두변 앞에 섰다. 무려 190 정도 되는 키에 머리카락과 수염 모두 까만 남자였다.
“귀빈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중년 사내가 물었다.
“두변입니다.”
“나는 기천농이라 하오. 귀빈은 내가 몇 살인지 맞혀보시겠소?”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역시나 기음음의 일족이 맞구나 싶었다.
“쉰 정도?”
“하하, 나는 이미 일흔아홉이오.”
일흔아홉이 중년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기껏해야 마흔 몇 살쯤 되어 보였다.
“귀빈은 우리 지하성이 어떤 것 같소?”
“신선이 노니는 곳이자 기적의 성 같군요.”
“귀빈은 우리 지하성 입구까지 찾아온 것만으로도 천신만고를 겪고, 수많은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오.”
“엄청난 대가를 들인 게 맞죠. 천여 명 이상이 죽었으니까요.”
“그럼 귀빈은 우리 절세 지하성에서 무엇을 원하시오? 황금? 무기? 보물?
당신은 수백 년 만에 방문한 귀빈이니 과분한 요구가 아니라면 우리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소. 당신이 만족스럽게 떠나게 해줄 수 있소.”
만족스럽게 떠나게 해준다?
그 말투만으로도 대단히 심상치 않았다.
두변은 수천 명을 모두 이주시킬 작정이지만, 이 기천농이라는 사내는 두변조차 이곳에 남는 걸 바라지 않을뿐더러, 며칠 동안 이곳에서 노닐다가 보물이나 황금을 가지고 떠나길 바랐다.
수천 명을 모두 이곳에서 거주하게 만드는 건 확실히 하늘에 오르는 일보다 어려워 보였다.
두변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성주를 뵈어야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무슨 일이든 나에게 말해도 똑같소.”
“나는 이곳의 생사존망, 그리고 당신들 일족의 생사존망과도 관계된 문제로 성주를 뵈어야 합니다.”
기천농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외부인이여, 당신을 우리 성에 들인 것만으로도 크나큰 은혜를 베푼 것이요. 최근 수백 년 동안 당신은 세 번째로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긴 하지만 자중하길 바라오. 일부러 놀랄 만한 말을 해서 사람을 겁먹게 하지 말고.”
“당신들 성주에게 전해주시지요. 국면을 만회하지 않으면 2, 30년 안에 당신들 일족 모두 죽을 것이라고요.”
기천농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변, 당신이 감히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오? 당신에게 알려주겠소. 우리 유성 일족은 비록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몹시 강한 사람들이오. 당신들 외부인들보다 훨씬 더 강하오. 우리도 사람을 죽일 수 있소. 당신은 언사에 주의하시오. 우리가 당신을 죽이도록 몰아붙이지 말고!”
“내가 이곳에 있는 한, 만약 어떤 허언이 있다면 당신들이 나를 천 번, 만 번 찔러 죽일 수 있겠죠. 하지만 내가 말한 건 사실이니, 성주를 뵙게 해주지 않으면 그럼 당신이야말로 지하성의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이겠죠.”
기천농의 안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변했다.
두변은 용신의 심판을 통과했을 뿐 아니라, 녹색 액체를 금색으로 변하게 했다. 그건 너무나 괴상할뿐더러,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를 따라오시오. 당신을 성주부로 데려가겠소. 한데 성주께서 당신을 만날지 여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윽고 기천농이 휘파람을 불자, 잠시 후 하얀 늑대 두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건 진정한 늑대였다. 온몸의 흰 털에 조금도 잡색이 섞이지 않았고, 달리는 속도가 두변의 야생마보다 더 빨랐다. 게다가 달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늑대들은 몹시 컸다.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머리 위까지 무려 180이 넘을 듯했고, 전체 길이가 3미터가 넘을 듯했다.
분명히 전투력이 놀라울 텐데, 지하성의 유성 일족은 이 거대하고 강한 늑대를 길들여서 탈것으로 쓰고 있었다.
“타시오.”
두변은 조심스럽게 거대한 늑대 위에 올라탔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늑대 두 마리가 천갱 최하층에 있는 성주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속도가 몹시 빨라서 두변의 야생마보다 3할이나 빠를 성싶은데, 몹시 안정적이어서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길 양쪽으로 논밭과 과수원, 목장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벼 이삭은 외부 세계보다 두 배 이상 컸고, 딸기는 주먹만 한 크기, 그 외에도 고구마, 망과(芒果: 망고), 여지(荔支: 리치) 등 수십 종류의 과실이 전부 바깥 세계보다 두 배 이상이 컸다.
거대한 늑대가 질주하면서 농촌의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집이 점점 더 늘어나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모든 집이 쾌적해 보이고 사람들도 점점 더 많이 보였다.
지금 바깥세상은 난세라서 많은 평민들이 누렇게 뜬 얼굴에, 야위고 왜소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할 뿐 아니라, 거의 모두가 몹시 젊어 보였다.
피부가 불그스레 혈색이 좋기도 했지만, 근육이 몹시 발달되어 너무 마르거나 뚱뚱한 사람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곳 남자들은 힘과 민첩성 모두 좋아서 천상 전사였다.
천갱을 빙 돌면서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성의 중심에 가까워졌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람들의 옷은 점점 더 호화로워졌다. 게다가 온몸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한 무리씩 순찰을 하며 지나갔다.
기병들이 한 무리씩 일렬로 순찰하는 등 법 집행에 매우 엄중해 보였다.
기병이든 보병이든 갑옷도 화려하고 견고해 보이지만, 손에 든 병기도 몹시 날카로우면서도 강인했다.
그들은 대단히 강력한 군대였다.
이곳은 세외도원이지만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이곳엔 몹시 엄중한 법률이 있을뿐더러, 몹시 엄격한 등급이 있었다.
집들은 점점 더 밀집되는 데다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졌으며, 모든 도로마다 석판이 깔려 있었다.
길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하느라 길에서 한가히 지내는 사람은 몹시 적은 듯했다.
두변이 외부인이라서 많은 이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거기에서 그칠 뿐이었다. 모든 이의 얼굴이 조금 냉담해 보였다. 어쩌면 냉담해 보이는 게 아니라 침착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건 정상적인 상황이리라. 강대한 종족이라면, 더군다나 장수하는 강대한 종족이라면 그렇게 늘 열정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냉혹함, 침착함, 도도함, 고집스러움이야말로 그런 강대한 종족들의 상징이었다.
천갱의 최하층, 가장 핵심 구역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석판이 깔린 광장이 있었다.
앞에 보이는 화려한 건축물들은 동방의 궁전 같기도 하고, 서방의 성 같기도 한 것이 웅장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성주부로, 밖에는 무사 수백 명이 빼곡하게 서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신은 밖에서 기다리시오. 내가 들어가 보고를 올리겠소.”
기천농은 거대한 늑대에서 내려와 화려한 성주부로 들어갔고, 두변은 바깥 광장에서 기다렸다.
무사 수백 명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고정되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일각의 시간 동안 무사들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곳은 몹시 엄혹한 법을 가진 세계였고, 군기는 더욱더 가혹해 보였다.
장장 반 시간을 기다리니, 기천농이 성주부에서 나왔다.
기천농이 말했다.
“들어가시오. 소성주(少城主)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외부인 두변, 소성주 앞에서는 일부러 놀랄 만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오. 그분이 묻는 말만 대답하시오. 우리는 몹시 엄혹한 성이니, 소성주께 무례를 범하면 당신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이윽고 기천농이 두변을 데리고 성주부로 들어갔다.
겹겹이 이루어진 정원을 가로질러서 큰 보루(堡壘) 앞에 도착하니, 부드러운 양탄자가 바깥 계단까지 깔려 있었다.
물론 두변을 맞이하기 위해 깔아놓은 건 아니고 본래부터 그렇게 호화스러웠다.
들어가는 도중에도 수많은 아름다운 시녀와 환관, 노비를 보게 되었는데, 모든 이가 걸으면서 소리를 내지도 않을뿐더러,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은 냉혹하고 엄숙한 성주부였다.
이윽고 대전인지, 대청인지 모를 곳에 진입했다.
이곳이 왕궁은 아니고 성주부에 불과하니 대전이라고 말하는 건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왕부의 대전보다도 웅장하고 거대해서 아무래도 대청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당치 않아 보였다.
웅장한 대청의 계단에 비길 데 없이 준수할 뿐 아니라 냉담하고 거만하며 존귀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화려한 은색 비단 장포를 입고, 머리에 은관(銀冠)을 쓰고 있었다.
진정한 절정의 미남자라고 할 만했다. 그는 예상의 사형 기란정의 준수함을 넘어섰다.
온몸에서 강인함이 느껴지는 것뿐 아니라, 냉혹한 권력까지 충만해 보였다.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이 들게 만들었다.
그가 아마 이 성의 소성주일 것이다.
“외부인, 네가 역사상 용신의 심판을 통과한 세 번째 사람이자, 녹색 액체를 금색으로 만든 그 사람인가? 이름이 두변이라고?”
소성주의 목소리는 몹시 냉혹하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넌…… 아직도 환관인가? 그러면서 또 온전한 환관은 아니고?”
두변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것도 알아볼 수 있지? 어떻게 알아본 거야?’
소성주가 말했다.
“네가 기천농에게 말했다지. 우리에게 망족의 위기가 생겼고, 스무 해 안에 지하성의 사람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몹시 분노한 상태이다. 물론 네가 고의로 그런 경악스러운 말을 했기 때문에 내가 직접 너를 접견하게 만들었지. 난 지금 격앙된 분노를 품고 너를 접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대청의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느낌이 들었다.
소성주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외부인 두변, 너에게 세 마디를 말할 기회를 주마. 네가 세 마디로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너는 처형당할 것이다. 네가 우리 일족을 저주하고 무례를 범한 벌을 주겠다. 네가 만약 세 마디로 나를 설득한다면 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말을 끝내고 그가 손짓을 하자, 무사 수백 명이 쏟아져 나와서 두변을 겹겹이 포위했다.
두변은 단숨에 그들의 무공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 무사 수백 명 가운데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이라야 두변과 비슷할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두변보다 강했다. 명령만 떨어지면 그들은 두변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소성주가 말했다.
“네게는 세 마디를 말할 기회밖에 없다. 네 모든 재주와 운을 다 사용해서 나를 설득해 보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
이제 두변을 검증할 시간이었다.
두변이 말했다.
“첫 번째, 제 일족인 4천여 명은 이곳 지하성에 들어와 살아야 합니다.”
소성주의 비길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이 갑자기 실룩이더니, 무시무시한 살기가 치솟았다.
“두 번째, 당신들 지하성에 배신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당신들을 멸족시킬 배신자입니다.”
소성주의 몸에 살기가 더욱 짙어지더니 힘차게 오른손을 들었다.
“외부인 두변, 네가 앞서 한 두 마디는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을뿐더러, 도리어 내 분노를 더 돋웠다. 내 오른손이 떨어지면 나의 강대한 무사 수백 명이 너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너에게는 마지막 한마디를 할 기회가 남았다. 단 한마디뿐이다.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너는 온전한 시체를 찾을 수도 없이 죽을 것이다!”
최후의 한마디만 남았다.
그 말이 두변의 운명과 그의 휘하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두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깊이 숨을 한번 들이켰다. 고개를 들고 꼿꼿이 서자 표정이 슬쩍 오만하게 변했다.
그가 세 번째 한마디를 말했다.
“최근 2, 3년간 영아가 요절하는 확률이 점점 더 높아졌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이유도 없이 코피를 흘리며, 어떤 이들은 수명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늙어 죽지 않았습니까? 일부 장소의 채소와 과일이 점점 더 이상해졌지 않았습니까? 크기가 점점 더 커지며, 심지어 조금 기형적으로 나지 않았습니까?”
두변의 세 번째 말은 몹시 길어서 엄격한 의미로 볼 때 한마디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성주는 그 말을 듣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