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장: 퇴위란 붕어다
꿈속 시스템이 말했다.
‘숙주, 충신이 되려면 내놓아야 할 대가가 몹시 크다. 하지만 그에 따라 얻는 이익도 가장 크지!’
두변이 냉랭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압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요.’
바로 그때, 옥진 군주가 재빨리 달려와서 말했다.
“두 대인, 원천조가 3만 5천 대군을 이끌고 남녕부를 수복했다고 합니다.”
두변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복은 개뿔! 일전에 방계 집단과 여씨의 비밀 협상 때, 남녕부를 여씨에게 분할해준다고 했으니, 지금 수복한다고 말하는 건 원천조의 대군이 당분간 그곳을 빌려 쓰겠다는 것이지!’
여씨의 10만 대군이 백색성과 3백 리 거리에 있었다.
원천조의 3만 5천 대군은 남녕부에 주둔했으니 백색성과 6백 리 거리였다.
이번 전투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방계 집단은 역시나 온 세상의 비난도 꺼리지 않고 암암리에 여씨와 두변을 동서로 협공하는 형세를 만들어 버렸다.
그 말은 앞으로 이 수백 리 구역에서 20만 대군끼리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규모 전투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10년 전, 막씨 토사를 섬멸한 전장보다 더 큰 규모의 대전이 벌어질 것이다.
대녕 제국, 천윤 23년, 6월 9일.
여씨 대염 왕국의 10만 대군이 백색성에서 50리 거리에 있으니, 이미 대단히 가까워졌다.
원천조의 3만 5천 대군은 계속 북상해서 선화현성(宣化縣城)을 수복하며 그곳에 진주했으니, 백색성과 4백 리 거리에 바싹 접근했다.
그날 밤, 두변은 달게 잠을 잤다.
휘하의 수만 대군 가운데 순찰하며 경계를 서는 부대를 제외하고 모든 이도 잠을 푹 잤다.
다음 날,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질 무렵.
두변은 의부, 옥진 군주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갑자기 탁자 위의 잔과 그릇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릇 안에 든 양젖도 끊임없이 흔들렸다.
쿠구궁.
대지가 작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과 그릇, 젓가락이 떨리더니, 나중에는 탁자 전체가 다 흔들렸다.
쿠구궁.
성벽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을 쳐다봤다.
그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방대한 규모의 군대가 눈에 들어왔다.
여씨의 10만 대군이 새까맣게 끝없이 펼쳐진 채 성 밑까지 쳐들어왔다.
내각 대신 장사지가 또다시 황제의 서재 밖으로 찾아왔다.
“광서 순무 두강, 광서 제독 원천조가 공동으로 광서 동창 천호 두변이 무고하게 계왕 세자 영충요를 잔인하게 죽인 일을 탄핵했습니다. 황족을 모살하는 건 모반과도 같으니, 폐하, 청컨대 그에게 죄를 내려주시옵소서!”
장사지가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서재 안에 있는 황제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했다.
내각 대신 장사지가 또다시 아뢰었다.
“광서 동창 천호 두변이 황족 구성원을 모살했으니 이는 모반과도 같습니다. 청컨대 폐하, 그에게 죄를 내려주시옵소서!”
서재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각 대신 장사지가 세 번째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두변이 황족 구성원을 모살하였으니, 폐하, 청컨대 그에게 죄를 내려주시옵소서!”
한참이 지나서야 안에서 천윤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운주는 성지를 작성해라. 계왕의 세자 영충요가 나약하고 무지해서 짐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계왕의 자리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 종인부에게 영충요의 황족 신분을 파면해서 서인으로 낮추라고 명하라.”
내각 대신 장사지는 황제의 말에 흠칫 놀랐다.
장사지가 두변을 고발하러 온 이유는 우선은 원천조가 군대를 이끌고 두변을 공격하는 데에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두변과 황제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황제를 골탕 먹이려는 마음에서였다.
혼군, 보았나? 네가 총애하는 두변 환관 놈이 얼마나 방자하면 황족 구성원까지 죽였다. 오늘 그가 감히 계왕의 세자 영충요를 죽였다면 내일은 너 천윤제까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정말로 눈이 삐었구나. 그런 방자하고 오만한 놈을 총애하다니, 이런 마음으로.
그런데 뜻밖에 황제는 여전히 두변에게 아무런 징벌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리어 영충요의 지위를 서인으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장사지가 보기에 황제는 내심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일 뿐 아니라 두변에게 더할 나위 없이 분노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지금 두변은 서남에 있는 황제의 목숨을 구해줄 유일한 지푸라기이니, 참을 수밖에 없을 뿐.
이어서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성지를 작성해라. 짐은 이강 군주를 딸로 거둘 터이다. 그녀를 이강 공주로 책봉한다.”
그 말을 듣고 장사지는 더욱더 얼이 빠졌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장사지! 짐이 비록 황궁 밖으로 나가기는 어려우나 내 눈과 귀가 아직 멀지 않았다. 영충요가 어리석고 우둔해서 간신에게 이용당했다. 전투가 임박한 중요한 순간 두변을 모해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강 군주가 직접 대의를 위해 친족을 참살했다. 짐은 그 일로 마음이 무척 아프다. 계왕 아우가 어떤 영웅인데 뜻밖에 그런 불초한 아들을 낳았다니. 너희는 두변과 짐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싶더냐? 헛수고를 했구나!”
장사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두변이 황족 구성원을 참살하라고 명령을 내린 건 모반과도 같습니다. 그런 죄를 지었는데도 폐하께서 그를 엄벌하지 않으시면 얼마나 눈과 귀가 어두운 겁니까?”
“짐은 네가 무엇을 얻고 싶어하는지도 안다. 두강과 원천조가 두변을 공격할 명분을 얻게 하고 싶겠지. 헛수고 말거라. 너희는 짐에게서 두변에게 불리한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내각 대신 장사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대녕 왕조의 선조들이여, 모두 똑똑히 보십시오. 대녕 제국의 강산은 이미 이처럼 망가졌습니다! 보잘것없는 엄당이 황족 구성원을 모살하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다니요! 나라가 나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두변을 죽이지 않으면 엄당이 제멋대로 활개를 치고, 나라가 곧 망할 겁니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장사지, 더는 날뛰지 말고 돌아가라! 두변 쪽에서 대전이 곧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나?”
두변이 패배하면 제국의 서남부가 함락되고, 황제는 죄기소를 써서 천하에 해명해야 한다. 그 뒤 퇴위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황제가 퇴위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경성에서 정변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런 상황은 태자에게 극도로 불리했다. 황제의 성격을 봐서는 자신의 아들을 궁지로 몰지는 않을 것이다.
군신들이 황제에게 퇴위를 압박한 뒤로, 태자는 매일 반나절씩 황제의 서재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머지 반나절은 전부 자신의 태자부 안에 들어가 대문을 굳게 닫은 채 아무도 접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태자는 이미 세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번번이 모두 구조되었다.
태자는 매번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절대로 군신들의 도구가 되고, 부황의 퇴위를 압박하는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아 했다.
게다가 태자도 이미 십여 차례나 상주서를 올렸다. 자신은 덕이 박해서 제국의 군왕이 될 자격이 없으니, 황제 폐하께서 그의 태자 자리를 폐위해달라고 청했다.
몇 달간 그가 보여준 모습은 흠이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와 같은 편에 서서 군신들에게 대항하려고 노력했다.
일전에 황제가 중한 병을 앓았을 때, 본래 태자가 줄곧 천윤제를 대신해서 조회를 관장하고 감국(監國: 일시적으로 천자의 권한을 대행하다.)을 맡았다.
하지만 황제가 군신들과 반목한 뒤로 그는 즉시 감국 자리를 사직하고, 더는 조금도 조정 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두변이 패배한다면 태자를 위해서라도 정변이 일어나지 않게 황제는 퇴위할 것이다.
장사지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완전히 가버렸다.
장사지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변의 패전 소식을 듣는 순간 황제는 퇴위할 테니까.
게다가 그가 황제의 성격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천윤제는 절대로 태상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황제에게도 크나큰 치욕일뿐더러, 태자가 몹시 불효한 것으로로 비칠 테니까.
그가 생각하는 퇴위란 붕어였다.
이번 전투에서 두변은 의심할 여지 없이 패배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번에 장사지가 황제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시체가 되어있을 테니, 서거한 황제를 보게 되리라.
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태자를 위해서라도 경성에 정변이 일어나게 둘 수 없었다.
일단 정변이 일어난 뒤에 태자가 등극하게 되면 그가 불효를 행한 것이라고 몰릴 것이다. 태자가 등극하지 않고 다른 황족이 등극한다면 태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게다가 천윤제는 절대로 치욕스럽게 퇴위해서 태상황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더욱더 태자를 궁지로 몰게 되는 것일 테고.
그러니 두변이 패전한 소식이 들려오면 천윤제는 가장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고서 태자가 정상적으로 즉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때, 황제는 지도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지도는 두변이 그린 걸 진남공이 황제에게 바친 것으로, 천윤제는 처음으로 이 지도를 보았을 때 자신이 얼마나 놀랐었는지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작년의 일이었지만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백색성은 너무 작아서 이 지도에서도 거의 찾기 힘들 정도로 보잘 곳 없는 곳이다. 그런데 그 작은 곳에서 제국의 운명, 또 황제인 그의 생사가 결정된다니.
천윤제가 웃으며 말했다.
“두변, 우리가 정말로 인연이로구나.”
내가 너와 생사를 함께할 줄이야. 정말로 인연이로구나.
황후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목어(木魚: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걸어 두고 쳐서 소리를 내는 법기法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보살님, 보우해주십시오. 백색성을 잃지 않고 두변이 패배하지 않도록 보우해주십시오.”
이연정도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마를 바닥에 단단히 붙이고 주먹을 움켜쥔 채.
지금 그는 황제가 폭군이 아닌 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황제가 전혀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진남공 수중에 10만 대군이 있고, 영설 공주에게도 1만 5천 대군이 있었다. 요동 쪽 동강 참장 장은룡에게는 1만 8천 대군이 있을뿐더러, 두변에게도 3만여 대군이 있었다.
황제가 장악한 군대는 거의 20만에 가까운 정예 군대였다. 만약 황제가 조금이라도 혼군이었다면 그 군대들에게 전부 경성 부근을 둘러싸고 지키라고 명령을 내리면 된다.
여진 제국이니 안남 왕국이니 상관하지 않고, 대녕 제국 따위 힘겹게 지탱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만 원한다면 그 20만에 가까운 정예 군대를 가지고 있는데 누가 그에게 퇴위를 압박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강산이 이민족의 손에 떨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들을 모두 파견해서 제국의 국면을 지탱하게 했다.
그에 비해 어떤 이들은 겉으로는 위엄있어 보이는 반면, 자신만을 생각할 뿐이다. 필사적으로 이득을 챙길 궁리만 하며, 필사적으로 제국의 토대를 빼내서 자신의 군대를 양성한다. 그러니 얼마나 후련하게 많은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방계 집단 배후의 주인은 어째서 곧바로 모반해서 황위를 찬탈하지 않을까?
바로 영씨가 계속 이 난장판을 힘겹게 지탱하게 만들어서 아주 조금씩 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황위를 찬탈한다면 자신이 곧바로 여진 제국 등을 상대해야 하니까.
고축장 광적량 완칭왕(高築墻 廣積糧 緩稱王: 높은 담을 쌓고 식량을 비축하면서 천천히 패권을 잡는다. - 이선장李善長이 주승朱升의 말을 빌려 주원장朱元章에게 바친 책략 세 가지)이라 했다. 이런 도리를 방계 집단 배후의 주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