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장: 전율적인 공연
의형 이릉이 무사 4천 명을 이끌고 남쪽에서 달려왔을 때, 두변은 당황했다. 이릉의 임무는 천보현을 지키는 것이었다. 즉 백색성과 절세 지하성 간에 물자를 막힘없이 전달하며, 특히 식량을 보급받는 것이었다. 백색성 안에는 병사들뿐이니, 모든 식량은 절세 지하성에서 운반해와야 했다.
이릉이 임무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왔을까?
박빙의 전투를 치를 때, 승부를 결정하는 건 종종 비교적 우연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또 많은 필연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홍빙의 무사 7천 명이 사륭석 부대 2만여 명에게 승리를 거둔 건 필연적인 요소였다.
그러니 서쪽 성벽의 전투는 도살이면서도 우아하고 질서정연했다.
무사 7천 명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끊임없이 적군을 살육해나갔다.
장장 3시간 걸친 전투 끝에, 그들의 앞에는 더 이상 야수 같은 적군이 달려들지 않았다. 적군이 전부 죽어버린 것이다.
5리 길이의 성벽은 피로 씻어낸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성벽 아래로 시체가 반 미터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그건 춥지 않아도 몸서리가 쳐지는 장면이었다.
3시간 동안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는 건 군대의 체력이 극도로 가혹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 적어도 대녕 제국의 다른 군대는 3시간 동안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기란 몹시 어려웠다.
사륭 부족의 대왕 사륭석은 성벽 아래에 자신의 군대가 모조리 처박혀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처음에는 가슴이 사무치고 제 몸을 매섭게 칼로 그은 것처럼 아팠다.
그런 뒤, 철저히 냉랭해졌다.
중간에 그는 철수 명령을 내려서 자신의 만군을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약을 마신 군대는 이미 미쳐 날뛰고 있었다. 죽기 전까지 그들은 필사적으로 앞으로 돌진하려고만 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적만 있었고 살육밖에 몰랐을 것이다. 지능이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떨어졌을 테니.
성벽 위, 두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두변의 상대는 이제 자신이 아니리라.
사륭석은 참지 못하고 작년 일을 떠올렸다.
그때 두변이 얼마나 나약했던가. 사륭 부족까지 달려와서 여씨를 공격하러 출병해달라고 자신에게 간청했다. 그걸 위해서 두변은 구두사신의 동굴 안으로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륭석이 잠시 두변에게 감탄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당시 사륭석은 처음부터 출병할 작정이었다. 최병정과 최부 남매를 이용해서 대숙청을 완성한 뒤, 여씨 손을 빌려서 부족장 수십 명을 모조리 죽였다. 이로써 그는 사륭 부족을 통일한 뒤, 만군 2만여 명을 거느리고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여씨의 영지에 쳐들어갔다.
그는 아직까지도 두변이 그때 자신에게 탄복하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사륭석은 자유롭게 진퇴를 거듭해서 여씨의 영지를 몇 번이나 쳐들어갔다. 그 시기는 그에게 가장 위풍당당한 순간이며, 그의 인생에서 정점의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황제도 더할 나위 없이 감격해서 사륭석을 사륭의 토사로 봉해주었다.
하지만 작위를 내리는 성지가 오는 도중, 그는 마음을 바꿔버렸다.
사륭석은 또다시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째서 여씨에게 투항했던가.
그가 여씨에게 투항한 건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 자신의 지혜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변이든 황제든, 여씨든 자신의 손바닥에서 가지고 놀며, 대단한 공연을 펼쳐서 사륭 부족을 완전히 통일시킨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여씨 휘하로 들어가긴 하지만, 여완완이라는 절세미녀를 정복한 뒤 어느 날 비둘기가 까치집을 차지하듯이 자신이 서남 토사 연맹의 수괴가 되고, 대염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 말이다.
게다가 그가 여씨에게 투항한 더 큰 이유는 여완완 때문이었다. 여완완을 처음 보는 순간, 저 여인을 반드시 정복하고 말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렇지만 여씨가 서남 토사 연맹을 통일한 뒤에, 사륭석은 자신의 무게감이 점점 더 줄어들 뿐 아니라, 자신이 쥔 힘도 점점 더 약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그의 신분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씨의 대염 왕국이 건립된 뒤, 그는 곧바로 서남 토사의 수령이 되었을뿐더러, 공작에 봉해졌으니, 여여해, 여여룡의 바로 아래 지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태자가 출정할 때는 부원수 두 명 중 한 명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여완완을 정복하는 것이었고, 차후에는 여씨까지 군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힘이 점점 약해지면서, 여완완과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여여해와 마주하게 되면, 두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경외감을 느껴야 했다.
사륭 부족의 통일이라는 대단한 공연을 펼칠 때, 그는 자신의 인생도 막이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그건 마지막 공연이었고, 그때부터 그는 평범해졌다.
그에 비해 두변은 예전에는 언급하기도 하찮은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출병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걸고 도박까지 해야 했다. 사륭석은 분명히 출병을 결정했건만 원숭이를 놀리는 것처럼 두변이 목숨을 건 공연을 펼치는 걸 지켜봤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두변의 상대가 될 자격조차 없어졌단 말인가?
이렇게 얼떨결에 성벽 위가 이미 비어버리고 제 군대는 모조리 죽었단 말인가?
이제, 이렇게 모든 걸 잃어버린 걸까?
우매한 사륭석은 이를 힘껏 악물고서 여완완의 군진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성화교군 최정예 무사 2천 명이 있었고, 수많은 성화교 고수가 있었다.
여완완이 냉랭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에 왜 온 거지? 전장은 어떻게 됐고?”
사륭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죽었다. 전멸했다.”
여완완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당신의 군대가 다 죽었는데 당신은 어째서 여기서 멀쩡하게 서 있는 거지? 두변이 저기 있으니 달려가서 싸워!”
사륭석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완완 곁에 있는 성화교의 고수 수십 명이 검을 뽑았다.
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참수하겠다!
여완완이 사륭석이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사륭석에게 만군 2만여 명이 있었을 때도 그는 미친 듯이 그녀에게 구애했다. 심지어 누차 참을 수 없는 행동까지 하면서 화마 성녀로서의 지고무상한 그녀의 위엄을 모독했었다.
그런 야심가가 자신의 군대까지 가지고 있으니, 최고의 방법은 그를 전장에서 죽게 한 뒤 그의 군대를 빼앗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사륭석은 물끄러미 여완완을 바라보더니, 검을 뽑아 들고 성벽 위에 있는 두변을 향해 달려갔다.
각각 세 성벽에서 치러지는 전투 가운데 가장 처절한 쪽은 이문회 부대가 속한 북쪽 성벽으로, 그곳은 지옥과도 같았다.
전투가 치러지고 2시간 뒤, 성벽 위에는 나무든 돌덩이든 끓는 기름이든 전부 다 쓰고 남은 게 없었다. 그 2시간 동안 여여룡 부대는 무려 5천여 명이나 전사했을 뿐 성벽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성벽 위의 모든 물자를 다 쓰고 난 뒤, 여여룡 부대의 대군이 파도처럼 성벽 위로 밀려들어서 장렬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군대의 진정한 전투력을 시험할 순간이었다.
절세 지하성의 무사들은 외부의 무사들보다 전투력이 훨씬 강하다는 게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1대 3의 전투였고, 전투는 초조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여여룡 부족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처참하게 죽고 있었지만 양쪽은 시종일관 막상막하의 태세를 유지했다.
이문회 부대의 무사 8천 명 가운데에서도 대규모 사상자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사상자는 갈수록 늘어만 났다.
물론 여여룡 부대의 사상자가 더 많았지만 그의 부대는 인원수가 훨씬 많지 않은가.
그러니 백병전을 치르더라도 북쪽 성벽이 유난히 장렬하고 피비린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조한 상황은 곧 정리될 것이다.
왜냐하면 부홍빙 쪽의 전투가 끝났으니까.
이문회와 부홍빙의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우위를 점한 반면, 여여룡 부대는 연속으로 패퇴하기 시작했다.
두변이 지키는 남쪽 성벽.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서 두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불사자의 기적을 펼친 게 뜻밖에 전세를 역전시킬뿐더러, 강대한 성화교군 2만 명의 사기를 이토록 떨어뜨릴 수 있었다니.
이릉이 거느린 4천 대군이 점점 가까워졌다. 두변은 대군이 천 미터 앞까지 가까워지고서야 그들이 절세 지하성의 무사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 자부심이 넘치는 발걸음, 저 건장하고 큰 키, 저 선명한 색상의 갑옷! 저들이 절세 지하성의 무사가 아니면 누구일까.
이릉 의형에게 천보현을 지키라고 맡긴 대군은 대부분 청룡회의 제자, 동창의 무사, 계왕부의 기병 등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절세 지하성 무사들이 함께 온 것일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릉 의형의 절세 지하성 수천 대군이 성화교군 뒤쪽으로 쳐들어왔다.
살아남은 성화교군 1만여 명이 순식간에 앞뒤로 협공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여완완이 탄 마차가 빠르게 언덕 위로 이동했다.
그녀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대군을 보고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내가 패배하는 건가?
이 내가 뜻밖에 패배하는 거야?
내게 10만 대군이 있고, 최고로 뛰어난 성화교군 2만까지 있는데도 패배하는 거야?’
성화교군이 이렇게 대규모로 출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 번에는 2, 3천도 안 되는 성화교군을 거느리고 여여룡의 수천 대군과 합류해서 사륭석의 기고만장한 2만 대군을 격파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전투에서는 성화교군이 대규모로 출전한 만큼 단 한 번도 질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옆에서 대사제 한 명이 말했다.
“성녀, 곧 앞뒤로 협공당할 테니 대군이 전멸할 위험이 있습니다. 반드시 즉시 철수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정예 부대를 전부 잃을 수 있습니다.”
철수라고?
이대로 철수한다고?
안 돼, 절대로 안 돼!
내가 두변에게 패배한다고?
줄곧 그녀는 두변 앞에서 우월감에 충만해 있었고, 심지어 몇 번이나 두변의 생사를 자신의 손바닥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 패배를 한다니. 그것도 그보다 세 배나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그에게 패배를 한다고?
절대로 안 돼!
그녀는 전력을 다해 대세를 만회하려고 했다.
여완완이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여여룡 부대도 아직 패배하지 않았어. 우리 군대는 여전히 두변보다 많아. 나는 아직 이 국면을 만회할 수 있다! 내 친위군까지 전부 나가라. 생사를 걸고 마지막 승부를 겨뤄라!”
대사제는 경악하고 말았다.
여완완 곁에 있는 성화 친위대 2천 명은 당연히 최정예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 최후의 힘이었다. 만약 그 군대까지 잃어버리면 화마 성녀는 마지막 체면까지 잃는 셈이었다.
“성녀!”
대사제가 재차 설득하려고 했지만, 여완완은 이미 단호했다.
아직 그녀는 절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성화교군은 전투력을 잃은 게 아니라 사기를 잃었을 뿐이니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올리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산 위에 서서 요염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절세마녀와도 같은 요염한 춤이었다.
별안간 그녀의 곁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화염이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수많은 화염이 일제히 떨어졌다.
여완완은 가득한 화염 속에 휩싸였는데도 무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 화염 갑옷을 한 겹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불길이 산 위에 거인 형상을 만들어서 천신이 강림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완완은 바로 그 거인의 화염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사방 곳곳에 울려 퍼지는데, 목소리가 완전히 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하고 힘찬 남자 목소리였다.
“화신의 뜻이다! 가짜 신의 사자 두변을 주살하라!”
그리고는 하늘에서 더 거센 화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전율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