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장: 소군 전하의 뜻
이연정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면 됐소. 그러면 됐소. 폐하께서는 인자하고 도량이 넓으셔서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오. 관건은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는 것, 또 어지러운 걸 바로잡는 것이지.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소?”
그 중년 대신이 놀라더니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관, 알겠소, 알겠소이다!”
“폐하께서는 천룡재 서재에 계시오. 그곳으로 가면…….”
이연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중년 대신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미친 듯이 달렸다. 그가 달리는 동시에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폐하, 폐하. 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신, 고발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천고에 남을 성군이십니다. 신의 무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잠깐 사이에 그 대신은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빠른 속도로 황제의 서재 앞으로 달려가서 털썩 무릎을 꿇은 뒤, 그 상태로 앞으로 기어가서 필사적으로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신, 죄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장내에 있는 다른 대신들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내심 그 대신을 한없이 경멸하면서 몰염치하다고 욕했다.
이연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내각 대신 장사지의 자백서를 꺼내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도충모!”
이름이 불리자, 대신 하나가 재빨리 달려나와서 황제의 서재로 마구 달렸다. 그도 미친 듯이 달리면서 울부짖었다.
“폐하, 신, 죄를 지었습니다. 신, 죄를 고발하려고 합니다!”
“허동!”
또 대신 한 명이 재빨리 뛰쳐나오며 황제의 서재로 달리며 외쳤다.
“신,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몰염치한 대신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시간이었다.
이름을 불리자마자 즉시 뛰쳐나와서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진상을 고발하고, 방계과 선을 긋겠다고 맹세했다.
십여 명의 이름을 불렀는데 이들은 예외 없이 전부 쫄아서 방계를 배반했다.
이연정이 냉소하며 말했다.
“남은 사람이 아직도 너무 많군. 당신들은 굳이 내가 이름을 부른 뒤에야 죄를 인정하겠소? 그럼 내 한마디 묻겠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제자리에 남아있으시오.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뛰어가서 황제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인정하시오. 그리고 진상을 고발하고, 극악한 세력과 명확히 선을 그으시오.”
남아있던 문무 대신들이 눈이 빠져라 두회를 쳐다보고 다시 방검지를 쳐다봤다.
“당신들이 말하는 전쟁은 어떻게 됐소? 어째서 아직도 전투를 개시하지 않는 거요?”
“우리는 곧 목이 떨어질 것이오. 당신들 방계가 전쟁을 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배신할 것이오. 목숨이 최고로 중요하오!”
하지만 두회와 방검지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검지는 분노로 온몸이 다 떨렸다.
이연정이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셋을 거꾸로 세겠소. 제자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걸 인정하고, 다들 폐하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셋!”
“둘!”
“하나!”
남아있던 대신 백여 명이 전부 놀라서 흩어지는 새떼마냥 황제의 서재로 벌떼처럼 달려갔다.
“폐하, 신, 죄를 지었습니다. 신, 잘못했습니다!”
“폐하, 신, 진상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두회가 눈을 감았다.
예상했던 장면 그대로구나. 정말이지 예상과 어찌 이리 같을까.
기개 있는 관원들은 전부 내쫓은 뒤, 이익 때문에 방계와 엮인 관원들만 남았는데 그들이 무슨 절개를 지키길 기대한단 말인가?
비록 사람들은 돈도 좋아하지만 목숨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들이 무엇인들 배신하지 못할까.
이연정이 두회와 방검지 앞까지 걸어가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들에게 이야기를 하나를 해드리지요. 두변과 여완완이 대전을 치른 뒤, 성안에 2만여 명밖에 남지 않은 데다 화살도 거의 다 썼습니다. 굴림 나무와 돌덩이, 기름도 다 써버렸다는군요.
원천조의 3만 5천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어떤 이는 두변에게 전장을 청소하지 말고, 원천조의 대군에게 바닥 가득 쌓인 시체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어떤 이는 두변에게 전장에 있는 시체들의 수급을 베어서 쌓아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두 제안의 목적은 같았습니다. 모두 원천조에게 겁을 주어서 그가 차마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두변은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전장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모든 시체를 묻어버렸습니다. 겁을 주려는 아무런 행동도 없었고, 아무런 위협의 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결사적으로 전투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한데 원천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백색성에 도착해서 그곳을 한번 보더니 즉시 병력을 물렸다는군요.”
방검지의 얼굴이 실룩였다.
이연정이 말을 이었다.
“전쟁이라는 건 말로 위협하거나 겁을 먹게 하는 건 조금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싸우면 그만이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결심이 섰지만 당신들에게는 없군요. 당신들에게 전쟁을 시작할 권한도 없겠군요. 당신들 소군의 뜻을 기다리고 있겠죠.”
방탁이든, 두회든 전쟁을 시작할 권한이 없었다.
이연정이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돌아가서 당신들 소군의 뜻을 기다리시지요. 그자의 뜻이 싸우는 거라면 선전 포고할 것 없이 곧바로 전투를 개시하면 됩니다!”
말을 끝낸 이연정은 그대로 뒤를 돌았다.
두회와 방검지의 위협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제는 단계적인 승리를 거뒀다. 날카로운 검이 드리우자 모든 대신이 다 배반하며 일제히 황제 앞에 무릎 꿇고 동정을 구할 뿐 아니라, 방계와 선을 그었다.
집에 돌아온 방검지가 말했다.
“아버지, 전하께서는 아직도 뜻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방탁은 줄곧 정원에 앉아서 동남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소군의 뜻이 오지 않으면 그는 병사 한 명도 움직일 수 없었다. 소군의 뜻이 도착해야 즉시 명령을 내려서 정예 3만여 명이 즉시 황궁에 뛰어들어서 닥치는 대로 죽일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방탁이 물었다.
“너희의 위협은 실패했느냐?”
두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검지가 말했다.
“그 기회주의자들은 전부 배신하고 황제 앞에 무릎 꿇고 애걸했습니다.”
방탁이 말했다.
“최악의 일이 이미 일어났으니, 그럼 이제 아무 상관도 없겠구나. 개전을 해서 황궁을 쳐부수면, 그 기회주의자들은 우리 앞에 무릎 꿇고 애걸할 것이다. 그때 그들은 황제도 직접 죽이려 들 것이다.”
방검지가 말했다.
“적어도 이번 결전에서는 황제가 승리했습니다.”
방탁이 말했다.
“두변도 첫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자신이 멸망할 운명을 바꿀 수 있다더냐? 바로 오늘, 그자도 끝장날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귀에 거슬리는 새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매 한 마리가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왔다.
“왔구나, 왔다. 소군 전하의 뜻이 왔구나!”
방검지가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백색성 안.
잡혀온 무사 수천 명은 신병이 되어서 엄청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절세 지하성의 무사들에게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짓밟힐뿐더러, 정말로 죽을 듯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지금 기음음은 고작 다섯 살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변에게 이미 찰싹 달라붙어서 매일 밤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두변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변은 내심 괴로우면서도 안타까워서 웬만하면 항상 기음음을 안고 있었다.
부상병들을 치료할 때든, 아니면 군대를 시찰할 때든, 그것도 아니면 회의를 개최할 때, 심지어 사공엽의 실험실에 갈 때조차 그는 기음음을 안고서 같이 갔다.
그날도 기음음을 안고서 사공엽의 지하 실험실로 향해서는 숨을 죽이고 사공엽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변은 사공엽이 개발하고 있는 대량 살상 무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절세 지하성에서 가져온 오염된 우물물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는 건 알지만, 어떻게 해야 그 에너지를 방출하는지, 어떻게 오염된 우물물을 이용해서 대량 살상 무기를 제작하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사공엽은 지난번에 열세 시진 동안이나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다가 특별한 영감을 찾은 듯했다. 그런 뒤 새로운 실험이 다시 시작되었고 곧 엄청난 돌파구를 찾은 모양이었다.
지금, 사공엽의 실험은 마지막 고비에 들어가 있었다.
사공엽은 여러 가지 복잡하고 위험한 절차를 거쳐서 오염된 우물물에서 완전히 어둡고 무거운 액체를 분리해냈다. 게다가 그건 살짝 흔들면 바로 고체로 변하는데, 그 실험이 이미 열다섯 시진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사공엽은 한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서 그 특수한 암흑 물질을 아주 조금씩 추출했다.
두변은 조금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공엽의 손이 아주 조금만 떨려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장장 열다섯 시진 끝에 아주 조금씩 추출한 액체를 정석 병에 넣으니 마침 절반 정도가 채워졌다. 대략 5밀리미터 정도였다.
“후우…….”
결국, 마지막 암흑 물질 한 방울까지 추출해냈다.
사공엽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온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단 한 글자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혓바닥을 포함해서 온몸이 완전히 마비됐기 때문이다.
두변이 다가가서 암흑 물질이 담긴 그 작은 병을 들었다.
‘이렇게 조금밖에 안 되나.’
그때 그건 이미 고체로 변한 상태였는데, 살짝 흔들자 다시 액체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실험실 전체에 괴상하면서도 강한 기운이 가득 찼다.
두변 곁에 있는 기음음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동자가 괴이하게 붉어지면서 온몸이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그 괴상한 기운이 그녀를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동시에 두변도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다. 아주 강한 기운 두 가닥이 실험실에 뛰어든 게 느껴진 것이다. 그건 대종사급 고수만이 지닐 수 있는 기운이었다.
“두변, 북명검파 장로회의 명을 받들어 너를 체포하러 왔다. 명을 거스른다면 가차 없이 죽이겠다!”
냉혹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림자 두 개가 곧바로 사공엽의 지하 실험실 안에 나타났다.
한 명은 은포 판결자, 한 명은 흑포(黑袍)를 입은 사람, 그 두 사람이 북명검파가 보낸 대종사급 고수였다.
흑포를 입은 사람이 말했다.
“나는 대은구도의 새로운 장로이자, 천기도의 대리 도주 임천루(任天樓)라고 한다.”
두변이 북명검파에 없으니 천기도주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이에 눈앞의 흑포를 입은 사람이 대리 도주가 된 모양이었다.
은포 판결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북명검파 장로회의 명을 받들어 두변을 체포하겠다. 명을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사살하겠다!”
두변은 지금 이 시기에 백색성을 떠날 수 없었다. 그가 이 시기에 떠난다면 백색성은 완전히 끝장나고 만다.
두변은 힘껏 도룡검을 뽑았다.
그렇지만 그가 상대해야 할 건 대종사급 고수 두 명이었다.
“명을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사살한다!”
순식간에 북명검파의 대종사급 고수 두 명의 날카로운 검이 지옥의 쇠사슬처럼, 죽음의 심연처럼 두변을 뒤덮으려는 순간이었다.
검은 매가 방검지의 팔에 내려앉았다. 그것의 발톱에 작디작은 정석 관(管)이 고정되어 있는데 그 안에 밀서가 담겨 있었다.
방검지가 그 작은 관을 빼서 아버지 방탁에게 건넸다.
방탁이 그걸 받아서 가볍게 돌렸다. 관을 잘못 돌리면 안에 있는 밀서가 완전히 훼손되고 만다.
안전하게 관을 열자 그 안에는 특수한 종이가 말려 있었다.
“전하의 성지를 삼가 받들겠습니다!”
방탁, 두회, 방검지 세 사람이 동남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건 부러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한 행동이었다.
이들 세 사람 모두 해외에 있는 제국을 보고서는 전대미문의 충격을 받았고, 주군과 소군에 대한 경외감과 충성심이 뼈에 새겨질 정도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그제야 소군의 밀서를 열었다.
순간, 방탁은 놀라서 넋이 나가서는 꼼짝을 하지 못했다.
두회가 물었다.
“소군께서는 어떤 뜻을 가지셨소?”
방검지도 물었다.
“즉시 출병해서 황제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황제를 바꾸라고 하셨습니까?”
방탁은 고개를 저은 뒤 소군의 밀서를 펴서 보여줬다.
밀서는 텅 비어 있어서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 이건 무슨 뜻이지?’
‘소군이 쓰는 걸 잊은 건가? 분명히 가리키는 바가 있을 텐데?’
두회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그분의 뜻을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