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장: 병력이 있으면 위세가 따라온다
진남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했을 때, 황제의 성지를 전달하며 검각후에게 2만을 출병시키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검각후 장문소는 황제가 군비 2백만 냥을 주면 대군을 즉시 출동시키겠다고 했다.
‘2만 대군을 동원하는데 2백만 냥을 달라고? 왜 돈을 그냥 뺏지 그래?’
결국 진남공이 장문소에게 출병시키라고 한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출병하기 전 진남공은 친히 사천에 들러서 몹시 겸손하게 자신을 아우라고 칭하면서 여씨를 잘 감시하다가, 만약 여씨가 모반을 꾀하면 검각후가 출병해서 그들을 막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당시 검각후 장문소는 꽤 만족해서는 단숨에 승낙했었다.
그렇지만 정작 여씨가 모반을 했을 때, 장문소는 병사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선성후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어서 황제가 그에게 성지를 몇 번이나 내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체 만 체로 일관하면서, 여여해가 운남과 귀주 두 성을 점령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최근에 내린 성지에서 황제는 극도로 엄중한 말투로 장문소를 호되게 책망하면서, 그에게 출병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장문소는 8만을 거느리고 전략적인 요지인 서주(敘州)에 들어가 주둔했다.
서주의 위치는 현대 지구의 의빈(宜宾: 사천성 남부의 도시) 정도로, 귀주, 운남과 모두 몹시 가까웠다.
물론 그건 그가 황제의 말을 갑자기 잘 듣게 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여담이 귀주를 함락시키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사천을 자신의 지반이라고 여기는 검각후로서는 여씨가 귀주와 운남을 뺏는 건 상관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의 사천을 건드리는 건 절대 못 볼 일이었다.
현재 여담의 대군이 사천에 가까이 오니, 검각후 장문소로서는 당연히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아서야 했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군벌과 토호(土豪)의 심리였다. 제멋대로 굴면서도 식견이 얕아 근시안적이었다.
검각후가 8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주에 주둔하니, 여여해는 한순간 몹시 긴장했다. 그런데 왕태자 여담의 병력은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데다, 연달아 두 성을 빼앗아서 기세등등해진 차였다. 당연히 기세 방면에서 패배할 리가 없으니,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장문소와 대치했다.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두변을 없애버릴 계획인 여씨는 왕태자 여담의 주력 대군 15만 명을 회군시켜 남하하게 했고, 여담은 고작 6만 대군을 거느리고 검각후의 8만 대군과 대치하게 했다.
그 사이 아직 정식으로 전투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수백 명 간의 소규모 전투가 잦아지면서 각자 승패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장문소는 한 걸음도 국경을 넘지 못했다.
여여해가 그 일을 알게 된 뒤에 깔보듯이 말했다.
“문을 지키는 개에 불과하니, 염려할 바는 못 된다.”
그 순간 여여해는 두변이라는 어린 호랑이를 섬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명을 내려서 운남에 진수하는 여여호로 하여금 5만 군대를 거느리고 회군하라고 했다.
이로써 여여해의 수중에는 직접 관장하는 대군이 30만 이상이 되었다.
이 30여 만 대군이 끊임없이 대염 왕성에서 집결해서 곧 두변과 최후의 결전을 치를 것이다.
두 달 가까운 고생스러운 기나긴 여정을 거친 끝에, 선성후 육전(陸展)의 7만 대군이 마침내 호남 경내에 들어왔다. 이들이 남하하면 두변과 합류할 수 있고, 서진(西進)하면 여씨 대염 왕국이 점령한 귀주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선성후의 군대는 귀빈 한 명을 맞이했다. 두강의 동생인 두쟁, 두변의 여섯째 숙부였다.
“선성후, 당신은 황제 쪽에서 군비를 얼마나 받으십니까?”
두쟁의 직접적인 물음에 육전이 답했다.
“30만 냥을 받소.”
두쟁이 곧바로 은표 뭉치를 건넸다.
“이건 35만 냥이니, 당신의 대군은 움직이지 말고 호남에 진수하시지요.”
선성후 육전이 말했다.
“내 가족이 이연정에게 잡혀갔소. 내가 나아가지 않으면 황제가 내 일가를 죽일 거요.”
두쟁이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는 곧 굶어 죽을 겁니다.”
“황제가 굶어 죽기 전에 내 일가를 죽일 수 있소.”
두쟁이 냉랭해진 얼굴로 은표 한 뭉치를 또 꺼냈다.
“10만 냥을 더 드리겠습니다. 대장부가 어찌 처자가 없을까 걱정하겠습니까. 선성후는 아직 젊지 않으십니까? 더군다나 황제가 당신의 일가를 죽일 수 있어도, 당신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건, 황제가 당신의 일가를 죽일 수 있지만 다른 이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적나라한 위협이었다. 황제가 육전 당신의 일가를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방계도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선성후, 이번에 두변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누가 감히 방해한다면 정말로 그의 일가를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죽여야 합니다.”
그날 밤, 선성후 육전은 하룻밤을 멍하니 앉아 손에 든 몇십만 냥의 은자를 바라봤다.
황제가 전력을 다해 30만 냥을 쥐어짜냈는데, 방계가 또 45만 냥을 던져주었다.
“허허, 병력이 있으면 위세가 따라온다더니, 전투 한번 치르지도 않았는데 수십만 냥을 벌었구나. 대장부가 어찌 처자식을 얻지 못할까 봐 걱정하겠는가. 황제 폐하, 당신은 자신도 지키기 어려우니, 두변, 그 소환관 놈의 생사 따위는 상관하지 마시구려.”
하루 뒤, 선성후 육전은 병으로 쓰러졌다. 대군은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는 더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천, 서주부.
사천 제독, 검각후 장문소는 진서 백작, 백색 지부, 백색 총병 두변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당연히 이문회가 두변의 말투로 쓴 것이었다.
편지에는 장문소 후작의 영웅적인 역사를 수천 자가 넘는 문장으로 되짚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대녕 제국 서남부를 떠받드는 기둥이라고 부르면서, 후배인 두변이 그의 지휘를 따르길 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어서 편지에는 장문소 후작이 곧 쉰다섯 생신을 치른다고 전해 들었으니, 이에 특별히 황금 1만 냥을 생신 선물로 바친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변은 검각후 장문소가 운남성으로 출병하길 바란다고 간청했다. 운남성에는 현재 여씨 대장군이 없으며, 그곳에 있는 병력은 고작 비정규군 몇만뿐이니, 검각후가 불세출의 공을 세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편지에 적혀 있지 않지만 검각후 장문소가 출병해서 여씨를 견제하기 바라며, 여여해의 수십만 대군이 모두 집결해서 함께 두변에게 공격을 퍼붓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간이라도 내어줄 듯한 말투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두변이 공격을 받으면 이어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건 검각후의 사천이라고 말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난 검각후 장문소가 담담히 물었다.
“정말로 황금 1만 냥을 보내왔더냐?”
심복이 고했다.
“받았습니다. 황금 1만 냥이 맞습니다. 그 소환관이 큰돈을 썼더군요.”
검각후가 말했다.
“황금은 받되 두변의 사자는 쫓아내거라. 소환관 놈이 내 앞에서 점잖은 척하며 백작이라고 칭해? 내가 제국을 종횡무진할 때, 그놈은 아직도 제 아비의 불알 속에 있었다. 불알도 없는 놈이 뭐가 대단하다고!
종이를 가져와라!”
그 사이 큰일을 다 본 검각후 장문소가 다시 말했다.
“됐다. 필요 없다. 두변 환관 놈의 편지를 쓰자꾸나. 뒷면은 깨끗하니까.”
그는 두변이 그에게 준 편지를 사용해서 엉덩이를 닦았다.
악룡채.
막씨 구세력의 수령, 열세 산채의 두목 막오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산골짜기 안에 구대진으로 매복하면, 부홍빙이 거느린 군대가 얌전히 그쪽으로 파고들 것이라고.
하지만 어디 일이 그렇게 쉽게 진행될까.
부홍빙은 산골짜기 입구에 도착한 순간 즉시 위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발견했다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저곳이 매복하기 몹시 적합한 곳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지만 그곳은 악룡채의 입구라서 악룡채를 공격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었다.
“멈춰라!”
부홍빙이 명령을 내리자, 낭기병 3백 명과 절세 지하성의 무사 3천 명이 즉시 산골짜기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이곳에 진을 치고 주둔하라.”
막씨 구세력의 수령 막오가 깜짝 놀랐다.
‘속지 않아? 내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두윤이 말했다.
“두변 그 환관 놈의 수하인 여장군이 몹시 예민한 감각을 가졌나 보구려. 그 여인이 위험을 감지했으니, 이 주머니 진형 안으로 파고들지 않을 것이오.”
막오가 서늘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빌어먹을, 교활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한데 저쪽은 긴 여정을 거쳤으니 양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저쪽은 소진할 양식이 없는 반면, 우리는 충분하지요.”
워낙 교활한 막오는 절대로 먼저 출격해서 제 사람들을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리 제 쪽 병력이 부홍빙보다 다섯, 여섯 배나 많다지만 말이다.
저쪽이 거북이처럼 등껍질에 계속 숨어있으니, 부홍빙으로서는 몹시 난처했다.
공격하자니 그들의 매복에 당한다.
공격하지 않자니, 그녀가 가져온 식량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두변과 여여해의 결전이 머지않았으니, 이곳에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양쪽은 반나절을 대치했다.
막오는 부홍빙이 오늘은 공격하거나 매복된 포위망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단 악룡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그 안에는 열두 명이 가득 앉아있었는데 다들 막씨 구세력의 나머지 수령들이었다. 모든 수령이 각자 큰 산을 하나씩 점거하고는, 산을 개척해서 악마의 열매(양귀비)를 심었다. 덕분에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금은 장신구로 치장하면서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막오가 말했다.
“두변, 그 소환관 놈의 수하 년이 우리 포위망에 파고들어 오지 않는다. 한데 상관없지. 우리가 먼저 사람을 보내 퇴로를 끊어놓은 다음, 식량을 다 소모할 때까지 기다려서 단숨에 없애버리면 되니까 말이야.
빌어먹을, 이 몸이 그렇게 신경 써서 구대진을 배치했는데, 들어오지를 않아?”
곧 막오와 나머지 열두 채주가 모여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막오는 물을 마셨다. 이런 시기에 취하면 안 되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수령, 성화교의 사제가 성화교군 3천 명을 거느리고 도착해서 대수령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때 광서 순무 두강의 사자 두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대수령, 그 사제가 성화교군 3천 명을 거느리고 부홍빙의 3천 대군을 공격하라고 하면, 우리는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겠소.”
막씨 구세력의 수령 막오가 큰소리로 웃었다.
“일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두변과 여 대왕이야말로 철천지원수니까 말입니다. 그 성화교의 사제를 들라 하라!”
잠시 후, 성화교의 사제가 성화교 고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악룡채 산굴 안으로 들어왔다.
두변은 온몸을 검은 두봉 안에 감싼 채 두 눈만 드러냈지만 성화교 사제가 워낙 그런 분장이니 허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막오는 성화교의 사제 두변을 보더니 갑자기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 마음은 연화(蓮火)와 같소!”
몹시 명백하게도 그건 암호를 맞춰보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성화교와 막씨 구세력만의 특수한 암호였다.
두변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막 대수령은 설마 마련교에 귀순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쌍방의 암호는 ‘내 마음은 성화(聖火)와 같아서 온 세상을 정화시킨다.’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두변이 쉰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온 세상을 정화시킨다, 아닙니까! 막 대수령은 우리 성화교를 모독하고, 전혀 성심을 보여주지 않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막오가 어찌 성화교 사제를 이대로 보낼 수 있을까. 그는 성화교군 3천 명을 속여서 부홍빙의 절세 지하성의 무사 3천 명을 공격하게 만들어야 했다.
막오가 급히 말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내가 말이 헛나왔소.
사제, 지금 당신들의 철천지원수인 두변의 군대가 바로 산골짜기 밖에 있소. 총 3천 명이오. 당신과 내가 연합해서 두변 그놈의 대군을 없애버리면 어떻겠소?”
두변이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좋습니다.”
“사제, 당신의 성화교군이 용맹하고 천하무적이니, 그럼 당신들이 선두에 서면 어떻소?”
막오의 말에 두변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더니 두변이 막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막오라는 자는 무공이 고강해서 준종사급이었다. 막씨의 구세력 가운데 무공이 가장 높은 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두변이 자신과 손바닥을 마주 잡고 약속을 맺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귀신처럼 교활한 그는 몰래 손을 뒤로 해서 장갑을 두 겹이나 꼈다. 가죽 장갑 한 겹, 철장갑 한 겹. 이렇게 하면 온갖 독에도 당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그렇게 정했소!”
막오가 두변과 손바닥을 맞잡은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아주 작은 하얀 지옥불이 두변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왔다.
막오가 깜짝 놀랄 겨를도 없이 그의 오른손이 불타고 있었다.
“으아아아!”
그 순간 그는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두드리면서, 그 화염을 꺼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지옥불은 꺼지지 않았고 도리어 온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한 비명이 고작 3초간 이어졌다.
펑.
거대한 흰 불꽃이 확 치솟더니, 막오는 불에 타서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놀라서 넋이 나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두윤이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너, 너는 성화교의 사제가 아니구나. 너는 대체 누구냐?”
두변이 가면을 벗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촌 형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말을 끝낸 뒤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솩.
순식간에 두변의 그 사촌 형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