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장: 신분을 증명해라.
19대 북명 종주 임유천이 말했다.
“어서, 어서 너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거라. 지옥불을 내뿜어봐. 지옥불을 내뿜어라!”
두변은 내심 감격해서는 내력을 모아서 평소처럼 지옥불을 방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아주 조그마한 지옥불조차 내놓을 수 없었다.
연거푸 시도해봤지만 전혀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럴까? 밖에서는 분명히 쉽게 지옥불을 방출할 수 있었는데?
세상의 균열 안에서는 지옥불이 나오지 않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죽어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암흑 물질이 지옥불까지 포함해서 모든 걸 집어삼켜버린 걸까?
19대 종주 임유천은 더할 나위 없이 감격한 눈으로 두변이 어서 지옥불을 내뿜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어서, 어서! 북명 선조의 예언과 취지를 위해서 우리 몇 사람은 아직 죽기도 전에 세상의 균열로 뛰어들었다. 바로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어. 선조의 유언에서 사명의 주인이 세상의 균열에 발을 디디고, 죽음의 동굴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면 열반해서 다시 태어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저를 기다려서 무엇을 하는 겁니까?”
“‘북명대법’을 너에게 넘기고, 모든 기운을 너에게 넘겨서 네가 열반해서 다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서지. 왜냐하면 너는 겁난을 한 차례 만날 텐데, 우리만이 네가 그 겁난을 헤쳐나가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너를 강하게 변화시켜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지옥의 문에 한 번 다녀오게 만들어야 하지.”
“지옥의 문이요?”
두변이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래, 나는 그 사명의 주인이 몹시 강할 것이라고 예상했어. 한데 너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군. 나는 너처럼 낮은 무공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사명의 주인이 되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구나.
자, 어서, 네가 북명 선조께서 예언하신 그 사명의 주인이라는 걸 증명하거라. 그래야 내가 즉시 다른 선대 종주들을 소집해서 북명대법을 너에게 전수하고, 우리의 남은 기운을 너에게 전해주니 말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까?”
“적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데다가, 우리의 기운이 끊임없이 흩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기준점이 넘는다면 우리도 어쩌면 네가 열반해서 다시 태어나게 도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북명검파, 신전.
지금 영도현은 외로이 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갑자기 녹색 번개가 힘차게 내려치는 것이, 마치 하늘 전체를 찢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건 번개가 아니라 일종의 강력한 기운이었다.
정말 번개였다면 세찬 천둥소리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영도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초읽기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나? 마침내 그게 오려는 건가?”
풍운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상, 이 꽉 막힌 아이 같으니라고. 너에게 많은 일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줄 수가 없구나…….
사명의 주인은 세상의 균열에 발을 디디고, 죽음의 동굴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서 열반하며 다시 태어난다라…….
선조시여, 당신의 그 말은 실로 몹시 유치하게 들리는군요. 너무 현묘해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데 저는 내심 그 예언을 정말로 믿고 싶지 않습니다! 강자라면 누구도 그걸 믿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동영 제국, 강호성(城)의 바깥 바다.
그곳에는 온 바다를 가릴 정도의 거함이 연달아 한 척씩 몰려들었다.
모든 거함에 화포 수십 내지 백 대가 장착되어 있었고, 모든 거함에 동방 연합 왕국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화포가 전부 강호성을 조준하고 있었고, 성 안 곳곳이 화염에 휩싸였다.
아직도 곳곳이 불타고 있었지만 전투는 이미 끝이 났다.
막부의 장군이 가장 큰 함선에 공손하게 올랐다.
그 거함은 웅장하고도 화려할뿐더러, 산처럼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막부의 장군은 한 번도 이렇게 큰 함선을 본 적이 없었다.
거함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한 장군은 비길 데 없이 잘생긴 젊은이에게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뵈옵니다. 저희 동영 제국은 동방 연합 왕국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그 비길 데 없이 잘생긴 젊은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동영 제국? 동방 연합 왕국?
우리를 동방 연합 제국이라고 이름을 바꾸거나, 너희들을 동영 왕국이라고 이름을 바꿔야겠군.”
이윽고 젊은이는 한마디도 더 꺼내지 않고, 파리라도 쫓듯이 손을 흔들어 막부의 장군을 내쫓았다.
잘생긴 젊은이가 거대한 지도 앞에 서서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안남 왕국과 대녕 제국이라는 사이좋은 형제만 남았군. 아버지, 곧입니다. 우리가 곧 동방의 주인이 될 겁니다.
두변, 나는 이 권력의 유희를 곧 끝내려 하는데, 너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세상의 균열 안.
임유천이 말했다.
“어서, 어서 지옥불을 시전해서 네 신분을 증명해라. 다른 선대 종주들을 소집해서 너에게 북명대법을 전수하고, 또 우리 기운을 너에게 전해주어야 한단 말이다.”
두변이 이를 악물고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옥불을 내뿜을 수 없습니다.”
19대 북명 종주 임유천이 안색이 바뀌면서 물었다.
“어째서? 왜? 너는 이름이 뭐지?”
“두변입니다.”
“두변, 북명 선조께서 하셨던 예언을 대다수는 믿지 않는다. 그분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만이 그 예언을 믿었지. 한데 이곳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우리도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더구나. 점복술이란 것이 신기한 것이기는 하지만 예언이 너무 오래되었다. 북명 선조의 예언은 사람들이 도저히 믿기 어렵지. 너는…… 우리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지 말거라.
북명 선조의 예언에 지옥불 외에도 용린(龍鱗)도 있었다. 네게는 용린이 있어서 어느 창칼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다고 하셨다. 어서 내게 용린을 보여 봐라.”
두변은 내력을 운용해서 평소처럼 교룡의 비늘이 올라오게 하고 싶었다.
몹시 간단한 일이라서 예전이라면 순식간에라도 할 수 있을 일이었다. 지옥불처럼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두변은 교룡의 비늘을 전혀 내보일 수가 없었다.
내력을 응집하려고 하니, 내력이 완전히 텅 비었을 뿐 아니라, 단전 전체가 빈 느낌이었다.
그 암흑 물질이 마치 모든 걸 철저히 집어삼켜버린 것 같았다.
“그것도 없어?”
임유천이 냉랭하게 물었고, 두변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손을 펼쳐 보였다.
“두변, 너는 우리가 이 세상의 균열에서 무슨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이 세상의 균열을 지키는 겁니다.”
“그렇다. 이 세계의 균열을 지키는 것이다. 비록 지금 세상의 균열은 닫혀 있지만 그럼에도 몹시 무서운 생물들이 그곳을 뚫고 들어왔다. 그런 생물을 우리는 매마(魅魔)라고 한다. 우리의 임무는 이 죽음의 동굴을 지키고, 이 균열을 지키며, 이 세계에 침입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매마를 참살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두변은 안색이 변했다.
“너는 매마가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느냐? 아주 멀리서도 사람 마음을 알 수 있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게다가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
두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9대 북명 종주 임유천이 말을 이었다.
“네가 선조께서 예언하신 사명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아직 네가 지옥불을 내뿜을 수도 없고, 용린을 전개할 수도 없다. 그럼 단 한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 너는 매마가 변신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명의 주인이 지옥불을 방출하지 못할 리도 없고, 용린을 시전하지 못할 리도 없지.
매마를 만나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완전히 참살하는 것이다!”
19대 북명 종주 임유천이 등 뒤의 검을 뽑았다. 지금 그 검은 빛 한 줄기에 불과했다.
“원래 모습을 드러내라. 연기로 사라져라, 매마여!”
북명 전 종주 임유천이 두변을 겨누고 맹렬하게 검을 베었다.
일단 그 검에 맞으면 결과는 하나뿐이었다.
혼비백산하는 것.
그런데 그의 검이 두변의 정수리에 떨어지는 순간, 임유천이 갑자기 소리쳤다.
“너의 머릿속에 있는 건 뭐라고 부르지?”
“꿈속 시스템입니다!”
두변이 거의 본능적으로 대답하자, 임유천이 검을 멈추고는 오랫동안 두변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일은 너무나 중대하다. 우리 북명검파의 전임 종주 다섯은 선조의 유언을 위해서 아직 죽기 전에 세상의 균열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사명의 주인이 도착하는 걸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 북명대법과 일신의 모든 기운을 그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니 반드시 그의 신분을 확실히 해야 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무슨 결말을 맞을지 너는 잘 알 것이다.”
두변은 그가 말한 그 끔찍한 결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대 종주가 공연히 희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들의 무도 수준도 공연히 낭비를 하는 셈이 된다.
임유천이 말했다.
“아니, 너는 그 결말에 대해 여전히 충분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매마가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고 했지 않으냐.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도 알지. 만약 그것이 강한 기운을 얻게 되면, 심지어 이 세계의 균열에서 출구를 찾아내면 우리 세계로 파고들 수 있다.”
두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우리 행성에 있는 이세계의 첩자가 되겠군요.”
“그래. 그 매마들이 우리 세계로 파고들면 가장 두려운 첩자가 될 것이다. 그것들이 일단 우리 세계에 잠입하면 동방이든 서방의 패주가 돼서 거대한 권세를 장악할 수 있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들의 궁극적인 사명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한 힘을 이용해서 우리 세계의 균열을 완전히 찢어버려서, 이세계의 마귀가 미친 듯이 우리 세계에 밀려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세계는…… 완전히 멸망할 뿐 아니라, 우리 문명 전체가 완전히 궤멸하지.”
“그럼 지금 우리 세계에 침입한 매마가 있습니까?”
“우리 북명 종주들은 죽기 전에 세상의 균열에 뛰어들어서 이 굴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간 이곳을 뚫어 들어오려고 시도한 모든 매마는 미리 우리에게 간파당해서 죽임을 당했지. 그러니 당분간은 아직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매마들이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다. 얼마 전에도 매마 한 놈이 하마터면 우리를 속여서 우리 세계에 침입할 뻔했거든.”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누구로 변한 겁니까?”
“그것이 내 제자 영도현으로 변했었다. 이번 대의 북명 종주로 내가 가장 신임하는 제자라서 내가 그를 종종 그리워했지. 결국 매마가 내 마음을 읽고 영도현의 생김새와 형체를 알게 됐다. 그래서 영도현의 모습을 가장했지. 정말로 거의 똑같아서 하마터면 그것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마터면 그것이 우리 세계에 파고들 뻔했어.”
상상해보자. 또 다른 영도현이 이 세계에 들어오면 무슨 결말을 맞을까?
“그럼 어르신은 나중에 어떻게 간파하셨습니까?”
“영도현의 머리카락. 내 기억에 영도현은 머리카락이 일부 하얗게 셌거든. 예전에 기음음의 일 때문에 말이다. 매마가 영도현으로 변신했을 때도 그 흰 머리카락들이 있었지. 하지만 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도현이 반드시 마음속에 얽힌 그 일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때문에 그 흰 머리도 점차 사라져서 완전히 까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매마의 흔적을 간파하게 된 것이다.”
두변이 영도현을 떠올려보니 확실히 검은 머리카락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