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장: 세상의 균열
무려 두 시진 뒤, 황금 집 안.
북명검파의 다섯 종주가 두변의 주위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영도현을 제외하고 북명검파는 총 19대의 종주가 있었다. 물론 다른 견해가 있기는 했다. 몇 대 종주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북명검파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 총 다섯 명의 종주만 세상의 균열 안에 있었다.
12대 오애지, 13대 구양노, 15대 축천한, 18대 언불멸, 19대 임유천 말이다.
이 다섯 종주만 북명 선조의 예언을 믿으며 받들었기 때문에, 죽기 전에 세상의 균열로 뛰어들었다. 한편으로는 균열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북명 선조가 예언한 그 사자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최초에 뛰어든 종주 입장에서는 무려 400년이나 기다린 셈이었다.
여기 있는 북명 종주 다섯 명은 모두가 세상의 최고 고수였다.
모두가 무도 세계의 황제이며, 동방 무도계의 지배자였다.
그런 그들이 아무리 사후라도 여전히 막강한 힘으로 세상의 균열을 지키고 있었다.
임유천이 말했다.
“이쪽 두변은 자신이 북명 선조가 예언한 사명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데 체내에 암흑의 기운이 그의 모든 생기와 힘을 송두리째 집어삼켜서 용린을 드러낼 수 없고 지옥불을 내뿜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나머지 종주 네 명은 침묵했다.
임유천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매마로 인한 위기를 막 겪지 않았습니까. 매마가 영도현으로 변신해서 하마터면 우리 모두를 속여넘겨서, 온 세상에 두려운 위기를 가져다줄 뻔했습니다.
허니 눈앞의 이 두변은, 진정한 예언 속 사명의 주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매마의 최후의 음모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가장 짧게는 매마와 수십 년을 전투했고, 가장 길게는 수백 년이나 전투를 치렀으니, 매마가 얼마나 음험하고 교활한지 아실 겁니다.
만약 이자의 신분을 확신할 수 없다면 절대로 북명대법과 무공 수준을 전수해서는 안 되겠지요.
지금 두변은 지옥불을 찾아서 자신이 불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만약 그가 연기로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지옥불을 집어삼키면 그가 선조께서 예언하신 사명의 주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데 지옥불은 적의 세계 쪽에 있는 균열에 가깝습니다. 저쪽 세계의 차원에 가까워지면 우리의 힘은 끊임없이 약해지는 반면, 적의 힘은 끊임없이 강해집니다.
이제,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세계의 적에 가까운 그쪽 균열로 다가가서 지옥불로 두변의 신분을 검증해야 할지를 말입니다.
어르신께서 결정해주십시오.”
임유천이 12대 종주 오애지를 바라보며 말하자, 오애지가 대꾸했다.
“세상의 균열에 왔는데 연륜 따위는 논해서 무엇하나? 모두가 평등하니, 거수를 해서 결정하자.”
잠시 망설인 오애지가 손을 들었다.
“나는 두변을 데리고 다른 쪽 균열로 향해서 지옥불에서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일에 동의하겠네.”
이어서 18대 종주 언불멸이 손을 들었다.
19대 종주 임유천도 즉시 손을 들었다.
15대 종주 축천한이 말했다.
“우리가 그쪽에 가면 힘이 대대적으로 약해질 겁니다. 만약 우리가 전멸한다면 균열 입구를 지킬 자가 없어져서, 매마가 끊임없이 우리 세계에 들어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재난적인 결말을 맞을 겁니다.”
13대 종주 구양노가 말했다.
“북명 선조의 예언에 따르면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명의 주인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사명의 주인은 지고무상한 존재니, 이번에 우리가 반드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뒤, 그도 손을 들었다.
15대 종주가 두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세계의 균열에 가까운 곳에 가면 정말로 전멸할 수 있는데, 그러면…….”
결국 15대 종주도 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모든 건 선조의 예언을 위해서, 사명의 주인을 위해서, 온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북명검파의 다섯 종주가 전부 손을 들었고, 두변은 제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북명검파의 나머지 종주 십여 명은 선조의 예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이는 곧바로 두변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 다섯 종주는 선조를 전적으로 믿을뿐더러, 선조에게 충성을 바쳤다. 기꺼이 세상의 균열이라는 괴상한 곳에 남아서 처음 본 이른바 사명의 주인을 위해 희생을 하려고 했다.
12대 종주 오애지가 말했다.
“기왕 결정했으니 그럼 출발하자꾸나!”
이윽고 다섯 종주가 일어나서 검을 뽑아 들고 두변을 가운데에 놓고 보호하면서 황금의 집을 나서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여담은 몹시 바쁜 게 분명했지만, 병적으로 바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침착해질 수 없었다. 자신을 쉬게 할 수 없었다. 일에 매진하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는 고통에 빠져들었다.
그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지 않은가.
바로 몇 달 전에, 그는 대염 왕국의 태자로서 대군을 거느리고 서남 전체를 파죽지세로 휩쓸었다.
형세가 매우 좋긴 했지만 여씨 대염 왕국의 수많은 문제를 알고 있었고, 대염 왕국의 토대가 애초에 떳떳하지 않음도 알았다. 하지만 사천을 함락시키기만 하면 모든 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대염 왕국도 당분간 확장을 멈추고 내정 문제에 착수할 생각이었다. 또 대규모 무능한 군대를 없애고, 정예 군대를 육성하는 정책에 몰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씨 가문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에서 두변이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나버렸다.
여담이 가장 경애하던 아버지 여여해가 죽었을 뿐 아니라, 그의 대군이 전멸하다시피 했고, 대염 왕국은 멸망해버렸다.
여씨 가문은 가장 휘황찬란한 순간에 모든 게 끝나버렸다.
그는 아버지를 잃었을 뿐 아니라, 여씨의 대업과 거의 모든 걸 잃었다.
왕태자에서 대녕 제국의 참장으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담이 심리적인 격차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것이 거짓일 것이다.
게다가 고통이란 몹시 무서운 것이었다. 그가 모든 걸 막 잃었을 때는 오히려 무감각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부터 고통은 그제야 발효되기 시작했다.
그 고통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들어서 그 고통에 저항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여담은 매일 미친 듯이 바쁘게 일을 해서, 기진맥진하도록 자신을 괴롭혔다. 그래야만 매일 밤 침상에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미쳐서 발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다. 그런 단어를 알았으면 그는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오늘은 직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조금 빠른 나머지, 잠에 드는 시간까지 아직 한 시진 반이 남아 있었다. 여담은 두려웠다. 그 한가하고 조용한 시간에 마음이 또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질까봐 두려웠다.
그러니 그는 미친 듯이 무도 수련을 했다. 백여 근짜리 대검을 휘두르며 장장 반 시진도 넘게 미친 듯이 수련했다. 그런 뒤 옷을 벗어서 야위면서도 단단한 상반신을 드러냈다.
대염 왕국이 멸망한 뒤, 그는 이십 근이나 야윈 상태였다.
“와라!”
그가 큰소리로 일갈하자, 무사들이 다가와서 두껍고 큰 쇠사슬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등을 후려쳤다.
짝, 짝, 짝, 짝.
쇠사슬들이 그의 몸을 때리는 게 아니라 돌이나 강판을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이건 자학이자, 발산의 일종이었다.
그의 아내는 문 뒤에 숨어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본래 여담의 첩실 중 한 명으로, 그것도 절세미녀 중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첩실이었다.
옥진 군주를 처로 맞이하겠다고 맹세한 여담은 그간 정실 처를 두지 않았었지만, 두변에게 투항한 뒤 많은 첩실 중에서 한 명을 골랐다. 아들을 낳았을뿐더러, 가장 다정하고 현숙한 여인을 정실로 삼았다.
여인은 여담을 너무도 사랑했고 남편이 마음속에 품은 고통을 알았다. 하지만 어느 것으로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아내인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직접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들고, 아들을 잘 기르며, 따뜻한 가정으로 고통스러운 여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길뿐이었다.
두껍고 큰 쇠사슬이 여담의 등에 장장 반 시진이나 미친 듯이 내려쳤다.
이 정도면 얼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여인이 문 밖으로 나가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군, 식사하세요. 아이가 기다리다 지쳤겠어요.”
“아, 그래.”
여담이 말했다.
예전에 그는 이 여인에게 몹시 냉혹하고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 첩실이 많은 만큼 본체만체했고, 때때로 여인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여인의 얼굴과 신체 특징만 기억할 뿐이었다.
예를 들면, 오늘 밤은 엉덩이가 큰 첩실더러 잠자리 시중을 들라 해라든가, 또 내일은 가장 키가 작은 첩실더러 오라고 해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매번 절세미녀의 여인과 잠자리를 갖더라도 그후 즉시 걷어차 버렸다. 그 여인이 아무리 그의 품에 더 있고 싶어 해도, 그는 즉시 맨몸으로 여인을 떠나면서 같은 침상에서 자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게 했다.
여담은 잘 때도 큰 침상 하나를 독차지해야 했다. 심지어 꿈을 꿀 때도 검무를 추며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그에게 다정함이란 있을 수 없었고, 평생 왕 행세를 해야 했다.
하지만 두변에게 투항한 뒤, 그는 아내에게 다정해졌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군왕이 아니라 군왕의 부하이기 때문이었다.
부하이자 주구인 사람은 횡포를 부릴 권한이 없었다.
여인은 찬물을 그의 몸에 몇 번이나 끼얹고는 그의 몸의 물기를 다정하게 닦아주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여담은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다.
그는 어둠을 싫어할 뿐 아니라 심지어 두려워했다. 어두컴컴한 것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아내도 그 점을 알기에 매일 집 안을 환히 밝혔다. 두껍고 큰 촛불을 백 개나 밝혔으니 몹시 낭비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문회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큰 야명주를 여러 개 보내주기도 했다.
여담은 예전에 식사할 때면 예법을 따지면서 왕의 기질이 드러나게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나운 맹수가 음식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기만 했다.
“꺄르륵!”
네 살배기 아들이 아버지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더니 꺄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제 아비를 따라서 더 크게 베어먹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여담이 크게 베어먹고 많이 먹으면 아들도 더 크게 많이 먹었다. 아들이 그렇게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들어야 여담의 마음속 그늘을 쫓아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집에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또 익숙한 사람이었다. 예전에 서남 토사 연맹이었던 어느 작은 토사의 먼 친척 자제였다. 여담의 뒤를 따르며 함께 지냈던 사람으로, 서남 토사 연맹 중에서 보기 드문 서생이었다. 그는 2년 전에 토사 연맹을 떠나 바다로 갔었다.
뜻밖에 그가 지금 여담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여담이 그에게 말했다.
“말하지 말아라. 식사를 마친 뒤에 다시 얘기하자.”
그 사람은 구석에 서서 여담 일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반각 뒤 식사가 모두 끝났다. 여담과 그의 아들 소보, 그리고 아내가 모두 식사를 마쳤다.
여담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내는 늘 그와 동시에 식사를 마쳤다. 여담보다 1초도 빠르지도, 1초도 늦지 않게 식사를 했다.
아내는 직접 그릇과 젓가락을 정리했고, 소보는 여담의 몸에 엎드려서 그와 잠시 놀았다.
아내가 탁자 위를 다 정리하더니 소보를 안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에 여담과 그 불청객만 남았다.
불청객이 여담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천보현 여림향(如林鄉)의 정장(亭長: 향촌鄕村의 장), 허인걸이 대인을 뵙습니다.”
여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생은 웬만해서는 두변을 위해 일하길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재의 공명만 있으면 서남에서는 쉽게 정장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말해라.”
허인걸이 대답했다.
“두변은 죽었습니다. 죽은 지 이미 한 달 정도가 되었고, 영설 공주의 동방 안에서 죽었습니다.”
여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