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35화 (435/648)

435장: 국왕을 구하라 二

리아나 군주의 옆에 있던 그녀의 연인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묻어났다.

리아나 군주의 연인은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불꽃을 닮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더욱 두변의 시선을 빼앗았다.

이때, 리아나 군주가 만도를 뽑아 들고는 아름다운 연인의 목을 향해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리아나 군주가 자신을 죽일 거란 걸 예상이나 했을까.

“내 사랑, 미안해. 이건 유경 왕국의 최고 기밀이라 절대로 밖으로 누설돼선 안 돼.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은 누구든 죽게 돼 있어.”

리아나 군주가 눈물을 머금은 채 연인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연인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지면서 가느다란 손끝으로 군주의 뺨을 어루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연인의 손은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이내 힘없이 툭 떨어지면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바로 다음 순간, 리아나 군주가 두변의 목을 향해 만도를 휘둘렀다.

깡!

하지만 그녀의 만도가 쩍하고 갈라져 버렸다.

두변의 목에서 갑자기 금빛이 반짝이더니, 황금색 용의 비늘이 그의 목을 감쌌다.

두변이 태연스레 말했다.

“군주 전하의 만도는 너무 평범하군요. 대녕 제국에 가시게 되면, 제가 꼭 진정한 보검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

리아나 군주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칼과 창이 안 드는 몸이라니!’

“그럼 이제, 거래 얘기를 한 번 해볼까요?”

냉정함을 되찾은 리아나 군주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서 다시 고고한 태도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말해보시죠. 동방 대녕 제국에서 온 줄리앙 선생.”

“내가 당신들의 국왕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철갑전함을 하나 받고자 합니다. 철갑전함과 전함을 운행하는 모든 선원과 포화수까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요. 태양이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 한,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우리의 철갑전함은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거든요. 그건 절대로 거래할 수 없는 품목이라고요.”

“국왕의 생명으로도 맞바꿀 수 없는 겁니까? 만약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당신들의 콘스탄틴 국왕은 죽고 말 겁니다. 그럼 철갑전함의 핵심 기밀도 그대로 지옥으로 사라지겠죠. 당신들이 가진 모든 철갑전함이 폐기될 것이고, 결국엔 유경 왕국이 멸망할 겁니다.”

두변이 냉소를 보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군주 전하, 철갑전함 한 척으로 당신들 국가의 운명을 맞바꿀 수 있는데, 이 거래에서 누가 밑지는 장사입니까? 당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래 아닌가요?”

“동방인 줄리앙, 당신이 설령 동방의 점술사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당신이 우리 국왕을 살릴 수 있다고 믿죠? 우리는 이미 수많은 술사, 의원, 연금사, 정신사, 점술사, 신비사를 동원해서 국왕을 살리고자 했어요. 동방 연합 왕국에서 모셔왔던 사람만 해도 다섯 명이 넘는다고요. 그런데 전부 다 실패했죠. 이토록 젊은 동방인인 당신이 우리 국왕을 살릴 수 있다고 어떻게 믿죠?”

두변은 리아나 군주의 말이 조금은 서글펐다.

리아나 군주는 동방 세계에 관해서 말할 땐 항상 동방 연합 왕국만 얘기하지 대녕 제국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동방 연합 왕국이 동방의 패주라고 여겨지고, 대녕 제국은 꼭 19세기 말의 만청(滿淸) 제국처럼 부패하고, 우매하고, 낙후된 곳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두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국왕을 살릴 순 없겠죠. 국왕께서 앓는 건 병도 아니고, 무언가에 중독된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국왕의 몸 안에는 지옥에서 온 악마가 기생하고 있습니다.”

리아나 군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줄리앙 선생, 지금 농담을 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야기를 지어내기라도 하려고요? 이 세상에 지옥이라는 게 있나요? 대지균열이 일어난 깊은 땅굴 속에 기이한 생물이 살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것들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요.”

서방 세계 과학 문명이 발전하면서 지옥이니 악마 같은 것들은 전부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것들, 창피한 거짓말로 치부되었고, 아무도 지옥이니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황당한 동방인 줄리앙 선생, 당장 짐을 싸서 파리로 가야겠네요. 그런 천진난만하고 황당무계한 소설은 파리에서 잘 팔리거든요. 당신은 분명히 대작가가 되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거예요. 지금처럼 내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두변이 냉소를 지었다.

“그래요? 내가 보여드릴 장면이 하나 있는데, 똑똑히 보시죠.”

두변이 리아나 군주 연인의 시신 옆에 웅크려 앉아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이렇게 목숨을 잃다니, 정말 아깝군요. 조금 전에 발견한 건데 이 여인이 죽기 전에 군주께 남긴 유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남기기도 전에 죽어버렸죠. 참 아쉽지 않습니까?”

두변의 두 눈이 초록색 불꽃으로 바뀌더니 그의 손바닥에서 기이한 불빛이 피어올랐다.

두변이 기이한 불빛이 피어오른 손바닥을 붉은 머리 미인의 이마에 가져갔다.

“죽은 자여, 부디 천천히 가거라. 하지 못한 유언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겨주고.”

두변의 목소리가 세계의 갈라진 균열에 있던 매마의 괴이한 목소리로 변했다.

두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실 안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미 죽었던 리아나 군주의 연인이 갑자기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여인의 두 눈은 살아있을 때처럼 반짝거리지 않았고, 귀혼의 창백한 눈자위만 보였다.

이어서 여인은 눈을 뜬 채로 리아나 군주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나의 사랑, 내 튤립이 죽지 않게 잘 돌봐줘요.”

이 얼마나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광경인가.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말까지 할 수 있다니.

리아나 군주는 순간 동방인 줄리앙이 인간이 아닌 귀신이 아닌가 의심했다.

두변이 어설픈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죽은 사람이 잠깐 동안 눈을 뜨고 말을 할 수 있게 하다니.

사람이 죽을 때는 영혼이 소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두변은 흩어지는 영혼을 다시 시신 안에 들여보내서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할 말을 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

그가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매마 덕분이었다.

매마는 유일한 악마 생물로, 이계와 지옥, 그리고 두변이 사는 세계, 총 3개의 공간을 오갈 수 있는 생물이다. 그런 매마의 기운이 두변의 몸속에 있기에 여러 가지 신출귀몰한 능력을 갖게 된 셈이었다.

리아나 군주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은 인간이야? 아님 귀신이야? 아니면 뭐지?”

두변이 웃으면서 말했다.

“존경하는 리아나 군주. 이제 내가 당신의 국왕을 구할 수 있다는 걸 믿겠습니까? 그리고 나야말로 당신의 국왕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어서 길을 안내해주시죠. 국왕께서는 죽기까지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내 사랑, 걱정하지 마. 내가 당신의 튤립을 잘 돌봐줄 테니까.”

리아나 군주가 여인을 향해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붉은 머리 여인은 스르르 눈을 감으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두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아나 군주를 바라보았다.

리아나 군주는 조용히 선실 구석으로 가서 웅크려 앉아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리아나 군주가 웅크려 앉자, 허리와 엉덩이의 곡선이 과장될 정도로 부각됐고, 딱 달라붙은 바지가 탄탄한 허벅지 때문에 터질 것만 같았다.

‘역시 서양 여자는 서양 여자로군.’

리아나 군주가 두변에게 은색 가면과 검은 망토를 건네주었다.

“줄리앙 선생, 이걸 입어요.”

두변은 가면과 검은 망토를 둘렀다. 그러고 나니 그의 모습이 마치 밤에 찾아온 흡혈귀 같기도, 어떤 호화로운 연회에 참가하는 귀족 같기도 했다.

“신비한 줄리앙, 당신의 실력에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10년 동안 찾았던 많은 술사도 당신만큼 화려한 연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왕 폐하를 살리지 못했고 전부 죽임을 당했어요.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요.”

리아나 군주의 말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폐하를 살리지 못하면 국가 기밀을 위해서 처형을 하는군요.”

“맞아요. 사실상 이미 절대 기밀이 아니게 되었죠.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왕실 구성원뿐만이 아니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왕실 구성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국왕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이 세상에 바람이 새지 않는 벽이란 게 존재할까.

그러니 영원한 절대 기밀 같은 건 없었다.

“국왕을 살리는 동안, 대사제 몇 명이 방 밖에서 당신을 포위하고 있을 겁니다. 만에 하나 실패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 자리에서 처형될 것이고, 유언조차 남길 수 없어요. 줄리앙 선생, 그래도 나와 함께 국왕 폐하를 살리러 갈 겁니까?”

리아나 군주가 진지하게 물었다.

“당연하죠. 길을 안내해주시죠.”

두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리아나 군주가 두변을 데리고 전함에서 내린 뒤, 다른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경 왕성으로 향했다.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도 성 곳곳에 사람이 넘쳐났고, 길가에 등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백인, 흑인, 황인종 등 다양한 인종이 있었고, 길가에서 다양한 언어로 손님을 호객하는 여인들도 보였다.

“유경 왕국 전체 인구가 30만이고, 그중 10만이 이 왕성에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왕성의 인구가 30만인데, 그중 10만 명이 유경 왕국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외부 사람이에요. 전세계의 음모자, 도망자, 그리고 성화교나 성로마 연맹이 수배하는 범인들까지 이곳에 있어요.”

리아나 군주가 설명에 두변이 물었다.

“이곳은 법외지지(法外之地)인 셈인가요?”

“바깥 세계의 법외지지죠. 이곳에서는 유경 왕국의 율법만 잘 지키고, 이곳에서 세금을 납부하고 돈을 잘 쓰면 유경 왕국의 철갑전함이 당신의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되어줍니다. 그 어떤 세력이나 국가도 당신을 잡아갈 수 없어요. 신비한 줄리앙, 만약 언젠가 당신이 동방에서 하는 사업이 실패하면 우리 유경 왕성으로 도망 와도 돼요. 아, 대신 돈을 충분히 챙겨야 해요. 돈만 있으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거든요.”

이곳은 실로 천국이었다. 짧은 거리 하나를 지나는 동안, 두변은 벌써 호객하는 미녀 백 명을 본 것 같았다.

미녀들은 인종이 다양했고, 모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길에서 파는 각양각색의 맛있어 보이는 요리에도 시선이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대녕 제국의 고유저(烤乳猪: 새끼돼지 바비큐), 사황 왕국의 웅장(熊掌: 곰발바닥), 동영 제국의 회, 대영 제국의 전통 파이까지.

그리고 두변은 이 짧은 거리를 걸어오면서 족히 백 가지가 넘는 미주(美酒)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이 성에서는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최상급의 술을 마시며, 매일 아름다운 여인과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돈만 있다면 말이다.

두변이 물었다.

“군주 전하, 만약 내가 이 거리에서 어떤 여인과 밤을 보내고 싶다면, 보통 얼마 정도가 필요합니까?”

“은화 다섯.”

리아나 군주가 대답했다.

두변이 정말로 누군가와 밤을 보내기 위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 이곳의 물가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물은 것이었다.

은화 다섯이면, 성화교의 정예 고용병의 한 달 치 군비이고, 대녕 제국 병사들의 4개월 치 군비였다.

그 가격은 계림성의 스무 배이고, 대녕 제국 경성의 열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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