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장: 국왕을 구하라 三
사치로 가득한 이 성의 물가는 대녕 제국의 물가보다 열 배 이상 비싼 셈이었다.
리아나 군주가 말했다.
“실생활에서 당신 같은 동방인의 지위가 높진 않지만, 노예 값으로는 꽤 비싸게 쳐요. 당신처럼 곱게 생기고 키도 크고, 영어도 알아듣는 사내는 8백 금화까지 팔리니까요.”
8백 금화면 8천 은화로, 두변의 미모가 이 사치스러운 성에서 꽤 값어치가 나가는 셈이었다.
이 화려한 성에서는 또 한 가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많은 귀족과 부호의 뒤에 철인(鐵人)이 꼭 한 명씩 따라다녔다. 철인은, 정확히 말하면 온몸을 철갑옷으로 두른 무사였다.
철갑 무사들은 전부 키가 2미터가 넘었고, 두 눈을 제외하고는 온몸을 철갑으로 휘감고 있었다.
묵직한 철갑옷에서 위엄이 뿜어져 나왔고, 그들의 허리춤에는 만도와 거대한 쇠망치가 걸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전투력이 어마어마한 철갑 무사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철갑 무사들은 꼭 로봇처럼 정해진 보폭으로만 걸었고, 그 어떤 곳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기 주인만 주시했다.
주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침없이, 아무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두를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은 전부 곤륜노(崑崙奴: 피부색이 검은 흑인 노예를 부르는 말) 무사들이에요. 동방 연합 왕국의 자랑이죠. 동방 연합 왕국은 매년 찻잎, 비단, 자기, 악마의 열매, 곤륜노 무사를 전세계에 팔아서 천문학적인 숫자의 이익을 남기죠.”
리아나 군주의 말을 들은 두변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 전하란 자가 다른 지구의 중국을 대신해서 복수를 하는 건가? 아편을 서방 세계에까지 팔다니. 게다가 수출 무역의 몇 대 품목에 들 정도로 대량이라니.’
두변이 물었다.
“곤륜노 무사 한 명당 얼마나 하죠?”
“5백 금화에 한 명. 엄청난 사치품이죠. 서방 세계의 귀족과 부호에게는 하나의 증표이기도 해요. 뒤에 곤륜노 무사가 붙어 있나, 안 붙어 있나가 그 사람의 지위와 부를 나타내니까요.”
‘엄청나군. 여기선 경호원까지 사치품으로 쓰이다니.’
“동방 연합 왕국이 매년 서방 세계에 곤륜노 무사를 몇 명 정도 팝니까?”
“5천 명이요. 매년 5천 명이요. 예전에 왕위를 잃은 국왕이 있었는데, 동방 연합 왕국의 전하라는 자에게 1천 명 곤륜노 무사를 사려고 했는데, 그 국왕은 그 값을 치를 능력이 없었죠. 하지만 3분의 1의 가격으로, 그러니까 17만 금화로 1천 명 곤륜노 무사를 고용하고 왕위를 되찾았어요.”
두변이 깜짝 놀랐다.
곤륜노 무사는 육지에서는 최강 수준인 무사인데, 동방 연합 왕국은 이들을 상품으로 취급하면서 매년 5천 명 이상을 판매한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동방 연합 왕국에서는 이런 최강 무사를 매년 최소 몇만 명이나 생산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연합 왕국의 소군 전하는 무척 교활해서 곤륜노 무사의 가격을 부풀려서 엄청난 값에 판매하고 있고.
곤륜노 무사 한 명을 판매할 때마다, 곤륜노 무사 열 명을 키울 수 있는 금화를 벌어들이고, 서방 귀족과 부호의 돈으로 자신의 육군을 확장하고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라.
두변이 물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그 전하라는 자는 서방 세계의 귀빈입니까? 유경 왕성의 MVP예요? 그러니까 Most Valuable Player인가요?”
“아, 아니에요. 동방 연합 왕국의 그 신비한 전하는 한 번도 외부에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어요. 유경 왕성에 방문한 적도 없고요. 연합 왕국의 전하에게는 에인젤이라는 정인이 있는데, 정말 절세미인이에요. 이름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죠. 그녀의 미모를 보면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이고, 사내들이 그녀를 봤다 하면 제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걸음을 떼지 못해요. 에인젤은 동방 연합 왕국의 신비한 전하의 전권을 대표하죠. 그녀야말로 유경 왕성의 초대형 스타이고, 초특급 인물이죠.”
‘재밌군. 동방 연합 왕국의 그 소군이 자신의 정인에게 유경 왕성에 상주하라는 걸 보면, 에인젤이라는 사람은 단순히 그자의 정인일 뿐만 아니라, 동방 연합 왕국의 무역 대신이고 외교 대사인 셈이지.
동방 연합 왕국은 대녕 제국보다 훨씬 더 앞서갔어. 벌써 전 세계를 아울러보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
리아나 군주가 말했다.
“말하고 보니, 동방인은 동방 연합 왕국의 그 전하에게 감사해야겠네요. 그의 존재 덕분에 황인종의 신분 지위가 계속해서 상승하는 거니까요. 그가 아니었다면, 당신들의 지위는 가축과 다름없었으니까요. 고릴라들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
두변은 리아나 군주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고 물었다.
“동방 연합 왕국이 매년 유경 왕성과 거래하는 거래액은 대략 얼마 정도 됩니까?”
“진짜 액수는 비밀이라, 당신에게 얘기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숫자는 알려줄 수 있죠.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 전하는 매년 유경 왕성과의 거래에서 최소 1천 5백만 금화를 벌어간다고 하는군요.”
두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천 5백만 금화라면 1억 5천만 은화이고, 9천 6백만 백은이었다.
“한 가지 더 얘기해주자면, 실제 액수는 알려진 액수보다 훨씬 더 많아요.”
두변은 다시 경악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이 매년 벌어들이는 돈이 대녕 제국의 국세보다 몇 배나 더 많다니.
“신비한 줄리앙 선생, 동방 연합 왕국의 그 전하에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죠? 설마 그와 적이 되려는 건가요? 내 추측이 맞다면, 그 생각은 일찍 접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서방 세계의 국왕들이 동방 연합 왕국의 그 전하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요? 하느님의 사생아라고 불러요. 그 말은 우리의 성로마 황제 폐하의 입에서 나온 말이죠. 그래서 그 전하는 전 세계적으로 하느님의 사생아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의 정인이자, 절세미인인 에인젤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서방 세계의 아무 국가의 궁전을 드나들 수 있고, 자유롭게 성로마 연맹 제국의 황궁을 출입할 수 있어요.”
두변은 리아나 군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여기 공기가 참 안 좋네요.”
“그런 편이죠. 매춘부의 향수 냄새, 맛있는 음식 냄새, 술 냄새, 하수도 냄새, 노예나 분변의 악취까지 뒤섞여있으니까요. 여긴 초대형 성이에요. 이 냄새가 바로 유경 왕성의 자랑이에요.”
두변이 고개를 들자, 엄청나게 거대한 전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휘황찬란한 전당의 높이는 30미터가 넘었고, 화려하고 장엄했다.
“왕궁에 도착한 건가요?”
“아, 아니요. 이곳은 천국탑이에요. 유경 왕성의 무역 중심지이자, 유일하게 황궁보다 더 높은 건축물이에요. 천국탑은 유경 왕국이 금전과 무역의 지상주의라는 걸 뜻해요.”
두 사람은 30분을 더 걸은 뒤에야 유경 왕성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금 전 지나온 거리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도, 번화한 시장통도, 어지러운 등불과 술집도 사라졌다.
대신 주위에는 온통 냉엄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넓고 깨끗한 돌이 깔린 거리, 각양각색의 거대한 조각품, 질서정연하게 순찰하는 무사들.
이곳은 정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웅장하고 거대한 곳이었다.
리아나 군주가 두변을 데리고 유경 왕국의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은 몇백 미터 높이의 절벽을 깎아서 만든 곳으로, 공기 자체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모든 궁전의 색깔은 절벽 본연의 색깔이어서 무척 날카롭고 음산해 보였다.
유경 왕성의 반쪽은 돈 냄새와 술 냄새, 온갖 번영한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 외부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진정한 유경 왕성의 본질은 바로 이곳, 장엄하고 엄숙한 왕궁이었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려면 길고 긴 돌다리를 지나야만 했다.
돌다리 앞에서 두변은 몸 전체를 수색당했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게 확인된 뒤에야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궁 안.
두변은 왕궁의 규모를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왕궁 안은 겉모습처럼 화려한 대신 장엄하고 어딘가 거친 느낌이었다.
모든 가구는 원목으로 만들어서 무척 튼튼해 보일 뿐, 화려한 조각이 되어있거나 금으로 모서리를 칠하지 않았다.
벽도 절벽 본연의 색깔로, 불필요한 장식 같은 건 달려 있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것 또한 화려하고 푹신한 페르시아 융단이 아니라, 곰 가죽과 늑대 가죽이 깔려있었다.
대전 안에는 몇 개의 벽난로가 있는데, 벽난로마다 뜨거운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 안의 온도는 무척 낮았는데, 두변이 체감하기엔 영상 3도 정도일 듯했다.
두변은 곧 유경 왕국의 왕태자 콘스탄틴 2세를 만나게 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준수하고 체구가 장대한 젊은이로,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독수리처럼 매섭고 그윽한 눈동자, 올곧게 뻗은 콧대 덕분에 옥석으로 다듬은 정밀한 조각품 느낌이었다.
그는 냉혹하고, 점잖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신비한 동방인 줄리앙, 자네가 내 부친을 살릴 수 있다고 들었다.”
왕태자 콘스탄틴 2세가 옛 켈트어로 두변에게 말했다.
왕태자도 분명히 영어나 불어를 쓸 줄 알지만, 그 오만함과 고집스러움 때문에 아직도 옛 켈트어를 사용했다.
“그렇습니다. 왕태자 전하.”
두변도 켈트어로 대답했다. 그것도 옛 켈트어로.
물론 두변은 켈트어를 모르지만, 시스템이 말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다.
왕태자 콘스탄틴 2세가 말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밤에 또 다른 동방인이 왕궁으로 와서 부왕을 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도 부왕께 귀신이 붙었다고 말하더군. 자네가 생각하기엔 내가 누굴 믿어야 하나?”
경쟁자가 있었구나!
“제가 그 경쟁자를 한 번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왕태자 콘스탄틴이 대답했다.
“그는 아주 존귀한 인물이 데려온 사람이다. 그분은 우리 유경 왕국의 최고 귀빈이지. 우선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야만 한다. 하지만 자네의 신분으로는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이어서 왕태자가 직접 최고 귀빈에게 두변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지 의견을 물으러 다녀왔다.
“존귀한 귀빈께서는 낯선 이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분께서 데려온 대사를 만날 순 있다.”
잠시 뒤.
두변은 자신의 경쟁자를 만나게 되었다. 머리 전체가 새하얀 백발에 신선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와 수려한 외모에 자세도 꼿꼿했다.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그리고 수염 전체가 새하얗게 세서 그런지,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진정한 대사이고, 보자마자 우러러봐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표령(飄零) 도주요. 그대는 누구인가?”
노인이 물었다.
‘원수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저 사람이 소목지의 사존인 표령 도주라고?’
소목지는 두변이 아직까지도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어려운 인물이었다.
소목지는 계청주에게 독을 썼고, 육맥신검 비급을 훔쳐갔으며, 두변과 계청주를 손바닥 위에 놓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었다.
소목지의 사존 표령 도주에게는 의선(醫仙)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때 유경 왕국의 국왕을 구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표령 도주도 유경 국왕이 중독되거나 병에 걸린 게 아니라, 귀신이 붙었다는 걸 알아보았다.
‘역시 의선이라 그런지 능력이 대단하군. 저 사람을 누가 데려온 걸까? 아마 동방 연합 왕국 소군 전하의 정인이자, 서방 세계의 슈퍼스타이자, 유경 왕성의 탑 플레이어 에인젤이겠지.
에인젤이 유경 국왕을 살리는 대가로 뭘 요구했을까?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철갑전함이겠지.’
두변은 표령 도주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고 그가 자신감이 넘친다는 걸 눈치챘다.
왕태자 콘스탄틴 2세가 말했다.
“양측에서 모두 내 부친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했고, 원하는 대가도 똑같이 철갑전함 한 척이오. 내가 누구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표령 도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로섬게임을 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