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43화 (443/648)

443장: 엄청난 운

하지만 결정적으로 혈관음이 절망에 빠지게 된 건, 사랑하는 그 사람 두변의 죽음 때문이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두변이 죽었다고 말했다. 혈관음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도 두변은 깜깜무소식이었다.

두변의 의부 이문회에게 두변의 행적을 물은 적 있었다. 그때 이문회는 두변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위험한 곳으로 갔다고 말했다.

그래도 혈관음은 두변이 분명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두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혈관음의 마음은 암흑 같은 절망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대로 간다면, 이번 대해전에서 혈관음과 안남 왕국의 부대는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

“방주! 어서 서두르세요.”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방주! 절대로 포로가 되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혈관음이 고개를 들어보자, 완씨 반왕의 전함이 이미 침몰하고 있는 그녀의 전함을 포위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그녀를 생포하고자 했다. 혈관음의 미모에 관한 얘기는 안남 왕국의 남북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다.

완씨 반왕도 혈관음을 탐내서 그녀를 생포하려는 것일까.

혈관음은 동방 연합 왕국의 전함을 바라보았다.

‘포화구가 20개도 안 되는 경순양함, 저 전함 하나가 나와 안남 왕국의 부대를 전멸시키다니.

포화 전함이 그렇게 강한 건가? 상대를 패배시키다 못해 절망에 빠트리게 할 만큼?’

혈관음은 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

그녀 옆에 있던 심복 무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방주! 어서 가셔야 합니다. 붙잡혀선 안 됩니다!”

혈관음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검을 뽑아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붙잡힐 일 없으니까.”

혈관음이 동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사랑 두변, 지하 세계에서 만나요.”

이때, 완씨 반왕의 전함을 지휘하던 우두머리가 혈관음이 자결하려는 걸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년이 자결하게 둬선 안 돼! 어서 발포해라. 발포해. 저년을 죽여버려!”

바로 이때.

콰과과광!

하늘과 땅이 뒤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바다를 집어삼켰다.

얼마나 많은 포화가 한꺼번에 발사된 건지, 정말 사람의 고막이 뚫릴 정도의 굉음이었다.

교룡 깃발을 꽂은 무척 거대한 전함이 엄청난 속도로 연기 속을 뚫고 사람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세상에나!

포화구가 100개가 넘는 초대형 전열함인데, 속도가 이렇게나 빠르다고?

완씨 반왕은 동방 연합왕국이 준 경순양함에 왕권호(王權號)라는 이름을 붙였다. 왕권호의 선장은 이 해군 부대의 최고 통솔자이자, 완씨 반왕의 동생이자, 완씨 왕조의 정해(靖海) 공작 완천석이었다.

완천석은 혈관음을 오래전부터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진남공 송결이 대군을 이끌고 안남 왕국으로 들어간 지 벌써 1년 반이 지난 상태인데, 그 1년 반 동안 정해 공작 완천석의 최대 적수는 혈관음이었다.

혈관음의 혈교방이 대외적으로는 불법 무역을 하는 함대였지만, 실상은 진남공 송결의 개인 함대이자 돈줄이었다.

송결이 안남 왕국에 들어가자, 혈관음은 연합 해군의 2인자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혈관음은 혈교방과 안남 왕국의 해군을 이끌고 무수히 많은 습격을 성공했고, 안전하게 물자를 운송했다.

송결과 여창 국왕의 연합군이 연달아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혈관음의 공로 덕이 컸다.

혈관음은 완천석과 해전을 많이 치렀었는데, 완천석은 가까운 거리에서 혈과음의 매력적인 몸매와 늠름한 자태를 볼 수 있었다.

완천석은 혈관음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패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혈관음의 해적식 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그녀를 이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완천석은 혈관음이 자신을 이길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더욱 가슴속 깊이 박혔고 그녀를 더욱 갖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완씨 반왕이 반란군 세력으로서 처음부터 유능한 수군을 가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북쪽의 여창 국왕과 혈관음의 연합군이나, 남쪽의 완씨 반왕의 수군이나 사실상 갖춰진 해군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동방 연합 왕국이 선물해준 왕권호 경순양함 하나로 눈 깜빡할 사이에 판이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무참히 패배하기만 하던 완천석이 이번엔 깔끔한 대승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적의 전함이 잇따라 불에 타고 침몰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완천석은 속이 시원하고 통쾌했다.

마지막으로 혈관음이 탄 전함까지 폭파되어서 점점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걸 보고 있었다. 정해 공작 완천석은 적수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적적해지기만 했다.

혈관음을 생포하려면 혈관음과 여창 국왕의 함대를 근거리 포위해야 했지만, 그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혈관음을 생포해서 자신의 첩으로 들이려던 완천석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혈관음이 검을 들고 자결하려는 것처럼 보이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하지만 즐거움의 끝엔 항상 슬픈 일이 있다는 말이 있던가!

엄청나게 거대한 철갑전함이 완천석을 향해 빠르게 돌진하는데, 포화 소리가 하늘을 울릴 정도였다.

혈관음의 검이 그녀의 목에 닿는 순간이었다. 이때, 혈관음의 귓가에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음 누이, 당신이에요?”

이 목소리가 익숙한 이유는 밤이고 낮이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꿈속에서도 이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현실 속에서도 가끔 이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다.

처음엔 혈관음이 두변이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에 빠진 그녀는 환청에 환각까지 보게 된 것이다.

언제는 두변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 앞에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언제는 두변이 칠규(七竅)에서 피를 쏟은 적도 있었다.

그녀는 두변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하루에도 수십 번 듣곤 했다.

이 목소리가 낯선 이유는,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가 두변의 것이긴 한데 뭔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목소리에는 남성적인 매력이 가득했고 강인하고 힘이 있었다.

혈관음은 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자신이 또 환청을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변! 지하에서 나를 부르는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이 외롭지 않게, 당신 옆을 지키러 금방 갈게.”

혈관음이 작게 읊조린 뒤 검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혈관음, 손에 쥔 검을 내려놔요. 당신의 남자가 돌아왔다고요.”

두변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바다 위를 가르고 혈관음의 귓가에 들려왔다.

비록 먼 거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용음호소(龍吟虎嘯)처럼 선명하고 강력했다. 뒤이어 엄청나게 거대한 전함이 자욱한 연기를 뚫고 혈관음의 시야에 들어왔다.

보는 사람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크기인 전함에 철갑이 둘러 있었고, 포화구는 꼭 고슴도치처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려있었다.

심지어 이 전함은 속도도 무척이나 빨랐다.

‘지옥에서 솟아오른 전함인가?’

혈관음은 동방 연합 왕국의 대형 전열함을 처음 봤을 때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놀랍고 두려웠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대형 전열함이 바다에 있을 땐 혈관음과 여창 국왕의 해군은 아예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혈관음의 눈앞에 나타난 이 전함은 그때보다도 더 두렵고 전율적이었다.

정해 공작 완천석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 무슨 전함이 이렇게 무식하게 커?’

완천석은 왕권호 순양함을 손에 넣은 뒤부터 어깨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거대한 전함에 비하면, 자신의 왕권호 순양함은 꼭 호랑이나 사자 앞에 선 고양이나 강아지 같달까.

두변은 해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이번 전투는 리아나 군주가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아나 군주는 무슨 전술을 펼치기보다는 다짜고짜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덕분에 교룡호 전열함은 십여 척의 완씨 반왕의 전함에 포위되었다.

십여 척의 각양각색의 전함이 두변의 교룡호를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투석기, 대형 강노, 불화살까지 동원해서 교룡호를 공격했다.

멀리서 보면 꼭 십여 마리 생쥐가 호랑이 한 마리를 둘러싸고 돌멩이를 던지는 것 같았다.

리아나 군주는 이들의 공격을 무시하고는 우두머리가 있는 왕권호 순양함을 향해 돌진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완씨 쪽은 절망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완씨 쪽 전함에서 투석기로 쏘아낸 돌덩이가 교룡호의 철갑 위를 명중했는데, 돌덩이가 철판과 부딪히면서 엄청난 소리만 내고는 거의 핥은 듯한 흔적만 한 줄 남기고 바닷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전함에 실은 투석기는 육지에서 쓰는 투석기보다 훨씬 더 작기에, 투석기에 실리는 돌덩이도 훨씬 더 작았다. 반면에 교룡호는 튼튼한 철갑전함이라서, 돌덩이 하나가 철판에 부딪히는 건 솜방망이 주먹질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형 강노가 교룡호의 철갑전함에 부딪히는 건 꼭 철갑전함에 간지러움을 태우는 수준이었다.

적군의 해전 방식은 상대의 전함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바닷속으로 뛰어든 뒤 육탄전을 벌이는, 비교적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두변의 교룡호는 너무 거대하고, 높이가 너무 높고, 속도가 너무 빨랐다.

십몇 톤에 불과한 소형 전함들이 교룡호에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교룡호에 깔려서 흔적도 없이 침몰할 게 분명했다.

교룡호에 간신히 가까이 다가간 전함의 선원들이 교룡호에 갈고리를 걸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 건물 몇 층 높이나 되는 전함에 올라타라고? 갈고리 줄이 닿기라도 해야지!”

선원 몇 명이 포화구에 간신히 갈고리를 걸고 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3미터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끔찍한 일제사격 소리가 들려왔다.

갑판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아나 군주의 병사들이 철갑전함을 기어오르던 완씨 반왕의 선원들을 그렇게 손쉽게 죽여버렸다.

두변은 드디어 리아나 군주가 왜 거의 지휘를 하지 않는지 알아챘다.

애초에 철갑전함의 해전은 특별한 지휘 없이, 다짜고짜 돌격해서 박아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 이 해전에서 두변에게 유일하게 아주 조금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왕권호 순양함뿐이었다. 하지만 순양함도 연식이 오래되기도 했고, 포화구의 직경이 다 작은 터라, 유효 사격 거리가 3, 4백 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니 두변의 철갑전함이 완씨 반왕의 함대 전체를 때려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교룡호는 처음에 사람들의 시야에 나타날 때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서 일제히 발포한 뒤로는 한 번도 발포하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면서 왕권호 순양함을 향해 돌진할 뿐이었다.

완씨 반왕 정해 공작 완천석도 답도 없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닌지라, 돌진해오는 교룡호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권호는 평범한 돛 전함이어서 아무리 빨라도 속도가 13절을 넘지 못했다. 반면에 두변의 교룡호는 동력 핵심이 가동된 터라, 속도가 19절이나 달했다.

완천석은 독 안에 든 쥐였다.

1천 미터 가까이, 8백 미터 가까이, 5백 미터 가까이.

교룡호는 왕권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서 측면에 달린 총 55개의 포화구를 왕권호를 향해 조준했다.

원천석은 돛을 최대한 펼쳐서 전속력으로 도망쳤지만, 철갑전함이 선체를 옆으로 돌려서 쫓아오는데도 왕권호보다 속도가 빨랐다.

“좌측 포화, 일제 조준!”

“발포!”

콰과과과광.

직경이 넓은 55개의 포화구에서 일제히 포화가 발사됐다.

일반적으로 해전에서는 포화의 일제사격이 육지에서의 일제사격보다 명중률이 떨어진다. 해상 포격은 각도와 거리 계산을 몇 차례에 걸쳐서 해야 명중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첫 해상 포격은 99퍼센트의 포화가 바다에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아주 이례적이게 엄청난 운이 따르는 경우가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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