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장: 아무렴 상관없지 二
내각 대신 왕건속은 청관(淸官)이라고 할 자로, 방계가 조당을 장악하는 걸 보고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조용히 글공부나 하던 자였다.
왕건속은 한림원 출신으로, 나중엔 순찰어사, 그 뒤로는 독찰원, 마지막엔 우도어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왕건속은 평생이 말로 싸우던 사람인지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여론을 선동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게 가장 큰 장기였다. 평생 지방 주관으로 지내본 적이 없던 터라, 총독이 된 지금도 어사에서 쓰던 그 수법대로 민심을 선동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왕건속은 제대로 된 봉강대리가 아닌 것이다.
그에 반해서, 진평은 근거도 있고 논리도 있고 글공부도 했고 일 처리도 똑 부러지게 하는 귀한 인재라 할 만했다.
심지어 진평은 내각 대신 왕건속 앞에서도 기세에서나 논리에서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왕건속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서, 논리가 아닌 감정적으로만, 분위기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했다.
경성에서 왜 이런 사람을 호광 총독을 시켰을까?
터무니없는 탁상공론에 주둥이로만 일하는, 게다가 유치하고 아집까지 있는 사람을 왜?
이 세상에 장양명처럼 청렴하면서도 지혜롭고, 배포가 큰 사람은 정말 드문 것인가.
“죄인 진평이 조정 명관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죄인의 죄질이 중하여, 즉시 참수형에 처한다!”
호광 총독 왕건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명판을 바닥에 냅다 던졌다.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꼭 자신이 포청천이 된 기분이었다.
“총독 대인께서 영명하십니다!”
“역시 총독 대인께서 영명하십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때 이문회가 후당(後堂)에서 걸어 나오더니 진평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자.”
이어서 이문회가 호광 총독 왕건속을 향해 말했다.
“건속 공, 사실을 무시할 정도로 당쟁이 그렇게 중요하오? 진평이 이미 말했잖소. 오주 지부와 지현 세 명은 진평이 죽인 게 아니라, 방계 첩자의 짓이라고. 왜 그 사건은 제대로 조사조차 해보지 않는 것이오? 진평은 내가 데려가겠소. 직접 경성에 상주서를 올려서 폐하와 태자 전하께 이 사건을 심리하고 조사할 칙사를 보내 달라고 말씀드리겠소.”
호광 총독 왕건속이 이문회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문회 공, 괜히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당신이 충성을 바치는 곳은 조정이고, 황제 폐하이지, 두변 개인이 아니오. 그리고 두변은 이미 죽었소.”
왕건속이 손짓하면서 말했다.
“여봐라. 어서 진평의 목을 쳐라. 반역 대죄는 형부의 검토가 필요 없다. 당장 죄인을 참수형에 처하라!”
“알겠습니다.”
수십 명의 무사가 참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진평을 끌고 가려고 했다.
콰광!
그때 호광 총독부의 대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부서지고, 두변이 수백 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총독부 안으로 쳐들어왔다.
두변이 대문을 넘은 뒤 가장 먼저 쳐다본 사람은 진평도 아니고 호광 총독 왕건속도 아닌, 자신의 의부 이문회였다.
두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문회가 동의했기 때문에 호광 총독 왕건속과 경성의 관리들이 서남으로 유입될 수 있었다. 게다가 경성 관리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쟁에서 두변 후작부의 관리들이 몇 번이고 양보했었다.
하지만 상대는 날이 갈수록 정도가 더욱 심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이문회는 진서 후작부와 진서 총독부를 계속 진정시키고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여씨나 방씨 세력에 대해선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했지만, 황제 직속의 관리들을 대상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문회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선을 다해서 쌍방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걸 막는 것뿐이었다.
물론, 이문회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서남에 난국이 펼쳐질 건 예정된 일이었다.
두변은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진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평은 감격스럽고 흥분한 나머지,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몸을 떨면서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진평은 진심으로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두변의 시선이 호광 총독 왕건속을 향했다.
그는 대단히 청렴한 관리이자 한때 이름을 날렸던 신하였으나 방계에 수차례 반발한 탓에 고향으로 쫓겨났다.
방계 세력이 완전히 경성 조당에서 물러난 뒤, 예전에 방계 세력에 의해 쫓겨났던 대신들이 모두 조당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새로운 내각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내각에는 유명한 청관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관은, 특히 도찰원의 어사 청관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귀신들조차 미워하는 부류라고나 할까.
이 사람들의 특징은 말싸움을 잘하고, 허세가 섞인 말로 고담준론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나는 탐관오리도 아니고 고상한 품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든 내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 간신이다!’
이게 바로 이 부류의 주된 가치관이었다.
티가 날 정도로 당동벌이(黨同伐異: 같은 파끼리는 한 패가 되고 다른 파는 배척하다.)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을 죽을 지경으로 몰아세우는 데 능했다.
이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직 목적과 결과만을 중시했다. 목적과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말 무슨 수단과 방법이든 다 쓰는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난 청관이니까, 내가 한 말이 다 맞다!’
이문회는 두변을 보자마자 뛸 듯이 기뻤고, 일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그는 한동안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었던 터라, 죽은 줄만 알았던 두변이 살아 돌아오니 기뻐서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호광 총독 왕건속은 화들짝 놀라서는 자신의 두 눈을 믿지 못했다.
그가 성난 목소리로 두변을 향해 호통쳤다.
“두변 후작, 감히 병사들을 이끌고 총독 관아를 쳐들어온 겐가? 자네는 조정 대신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고려한 적 있는가? 조정을, 폐하를 한 번이라도 안중에 둔 적이 있느냔 말이다!”
언관 출신의 사람은 어쩜 입을 열 때마다 누군가를 대역 죄인으로 만들어 버릴까.
두변이 담담하게 말했다.
“총독 대인, 제가 말을 타고 총독부에 쳐들어온 게 불경한 짓이라면, 대인께서 입을 열 때마다 제가 간신이라고, 악인이라고, 제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조정 대신의 체면을 지키는 일입니까?”
왕건속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자네는 그런 짓을 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말조차 하면 안 된다는 뜻인가? 방민지구, 심우방천(防民之口, 甚于防川: 국민이 비판하는 것을 막는 피해는 하천을 막아 생기는 수재보다 더 엄중하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겐가?”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 말이 되는 걸 갖다 붙여라! 네가 욕하면 옳고, 내가 욕하는 건 대역무도한 거냐?’
두변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
“진평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진평이 오주 지부 등을 살해한 사건은 제가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본독이 이미 조사를 끝냈고, 참수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네. 두변 후작, 서남은 법외 지대도 아니고, 자네의 독립 왕국도 아니야. 왕자라도 법을 범하면, 백성과 같은 죄로 다스린다는 말은 알고 있겠지? 자네의 심복 진평이 조정 관리를 처참하게 살해했단 말일세. 설마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을 감싸려는 건 아니겠지?”
“제가 이미 말했습니다. 진평이 조정 명관을 죽인 사건은 철저히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광 총독부는 남녕부나 장사부에 있어도 되니, 대인께서 장사부로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변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왕건속은 청관이기도 하고, 이문회의 십수 년 지기 친구이자 황제의 신내각 구성원이니까. 그러니 왕건속에게 호남 행성 하나를 내어주려 한 것이다.
“하하하, 나는 호광 총독이니, 호남에 있고 싶으면 호남에 있고, 광서에 있고 싶으면 광서에 있을 것이니, 두변 후작이 친히 가르침을 주지 않아도 되네. 자네의 진서 변진 군무에 내가 손을 대지 않는 것처럼, 자네도 내 일에 관여하지 말게.”
위대한 사명을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어디 쉽게 이곳을 떠나란 말이냐!
그는 스스로 제국 중흥의 기둥이 되기로 맹세했고, 제국을 위해 서남 전체를 되찾고, 강대한 서남을 만들기로 맹세했다.
이 사명을 완성하게 된다면, 나 왕건속은 천고유명(千古留名)이요, 유방백세(流芳百世: 꽃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하다.)를 하는 것이다!
두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사람은 성질머리가 아주 더럽고 고집까지 세군. 하지만 이 사람을 건드리면 경성의 체면을 짓밟는 것이고, 어쩌면 황제의 체면까지 무시하는 게 되겠지. 갈등이 더욱 심해져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고.’
“진평을 데려가라.”
두변이 수하에게 명령했다.
‘나중에 군대를 보내서 이 사람들을 내쫓자. 내가 저 늙은 영감탱이랑 말싸움이나 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두변이 예상했던 것처럼 무례하거나 완강하게 나오지 않는 걸 본 왕건속은 크게 기뻐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왕건속은 두변이 경성과 갈등이 더욱 심해지는 걸 원치 않고, 결렬되는 건 더더욱 원치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도찰원에서는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한지라, 왕건속은 지금이 바로 자신이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왕건속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변의 기세를 꺾고, 진평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두변을 확실히 이기고, 광서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왕건속은 자신에겐 조정 대의의 명분이 있으니, 오늘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변을 완전히 찍어 누르리라 다짐했다.
그는 진평이 정말로 오주 지부와 지현 등을 죽였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정치가는 오직 결과에만 집중하지, 과정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감히 누가?”
왜소한 체격인 총독 왕건속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평 앞을 가로막고 호통쳤다.
“지금 감히 누가 진평을 데려가려고 하는가? 두변 후작, 지금 반역을 일으키려는 겐가?”
왕건속은 지금 자신이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절개가 굳다고 믿었다.
“마을 분들, 서생들.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서 조정의 법도를 지킬 때가 왔소. 천하의 정의를 지킬 때가 바로 지금이오. 여러분은 일개 군벌이 무고한 조정 명관을 죽인 죄인을 마음대로 데려가도록 둘 것이오?”
수십 명 젊은 서생과 몇백 명 막료가 왕건속의 연설에 피가 끓는 듯했다.
게다가 두변이 총독 앞에서 쩔쩔맨다고 생각했는지, 왕건속처럼 오늘이 바로 두변의 위세를 꺾을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때, 수십 명 서생, 몇백 명 막료, 그리고 두변을 죽도록 싫어하는 장사꾼, 구경을 좋아하는 한량까지 합세해서 호광 총독 왕건속의 뒤에 섰다.
“두변 후작, 보이시오? 천하의 정의는 우리 편이오. 진평을 데려가려면, 우리의 시신을 밟고 지나가야 할 것이오!”
왕건속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자신이 도찰원에서 써먹던 감정 호소 전략이 이곳에서도 통했다는 점이 몹시 통쾌했다.
하지만 오삼석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문회도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졌다.
“왕건속, 그러지 말고…….”
왕건속은 이문회의 말을 끊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순무 오석삼 대인! 군벌의 위세에 굴복하는 것이오? 나 왕건속은 당신처럼 줏대가 없지 않소. 천하에는 정도가 있고, 나의 마음속에는 굳센 정절이 있소. 나 왕건속이 두려울 게 뭐 있냔 말이오.
두변 후작, 강제로 진평을 데려간다는 건, 조정의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오. 반역을 일으키겠다면 내 시신을 밟고 지나가시오!”
두변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티끌만 한 인내심마저 바닥내는군. 도찰원의 어사들은 다 당신처럼 바보인 겁니까?”
두변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판을 먼저 깬 건 당신들입니다. 나도 딱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시신을 밟고 지나가라고요? 아무렴 상관없지요.”
두변이 명령했다.
“돌격하라. 앞을 막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수백 명 철갑 기마병이 돌격했다.
일순간, 대당 밖에 서 있던 몇백 명 서생, 관원 막료들, 장사꾼들, 한량들이 말에 치이거나 말굽에 밟혀서 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말굽에 짓밟혀서 몸이 으스러졌다.
“으악.”
“아악.”
처량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대당 밖은 일순간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