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장: 눈뜬장님
“안 돼. 안 돼!”
광서 순무 오삼석이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오삼석은 사상이 완고하지 않은 서생인지라, 완전히 사대부 쪽의 편만 들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서남의 신법에 대해서 의심하고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나중에는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며 신법을 차츰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서남에 대해서 완전히 안심한 건 아니었다.
오삼석은 호광 총독 왕건속의 행보를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삼석은 왕건속보다 계급이 많이 낮았고, 경력도 많이 부족했다.
오삼석이 장양명처럼 수천만인오왕의(雖千萬人吾往矣: 천만인이 자신의 앞을 막아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기세. - <맹자> 공손추公孫丑) 기세가 있지만, 깨어 있긴 해도 전통적인 문인에 가까워서 과감하게 두변의 뜻을 완전히 따르진 않았다.
왕건속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진평 사건에서 할 수 있는 몫도 거의 없어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입장인 상태였다.
하지만 두변이 이토록 인내심이 없는 사람일 줄이야.
대낮에 대살육을 벌이다니.
자리에 있던 몇백 명 막료, 서생, 장사꾼까지 가리지 않고 참혹하게 죽이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광 총독 왕건속에게 강경하게 대항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날 줄 알았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살신(殺神)이 되어버리다니!
무기 하나 가지지 않은 천 명의 사람이 수백 명 기마병에게 처참히 짓밟혀서 총독부가 아비규환이 되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마디가 부러진 사람들은 즉사하지 않고 고통스럽게 악을 쓰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호광 총독 왕건속도 경악했다. 그의 언관 경력을 통틀어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왕건속은 지금껏 살면서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황제, 방씨 세력, 두회까지 질타했다.
그가 조정에서 쫓겨났던 건 방씨를 질타해서였지만, 그렇다고 방씨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다.
두변 저것이 미친놈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러날 기색을 보이더니, 곧바로 이렇게 눈이 돌아서 살인을 저지른다고?
이렇게 변덕스러울 수가 있다고?
왕건속은 두변의 인내심이란 것이 선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인내심의 선을 넘으면, 두변은 곧바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였다.
두변이 말을 타고 진평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리고는 호광 총독 왕건속을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왕 총독, 당신은 학문도, 품덕도, 능력도 형편없군. 하지만 폐하의 신하이니 폐하께 충성은 하겠지. 그래서 당신에게 체면을 지키면서 자리에서 내려올 기회를 준 것이다.”
“그딴 것 필요 없다!”
왕건속이 격노하면서 소리쳤다.
두변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제일 실망하게 한 건, 당쟁을 위해서 명백한 진상을 덮은 것이다. 진평이 정말로 오주 지부 등을 죽였을까? 당신도 마음속으론 뭐가 진상인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진평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서 위세를 얻으려고, 내가 가장 아끼는 심복을 죽여서 기세를 세우려고 진실을 덮은 거지. 아닌가?”
왕건속이 냉소했다.
“이 난신적자야, 내가 폐하를 도와 광서를 되찾고자 하는 게 뭐가 잘못됐다는 것이냐?”
“당신들이 광서의 권력을 되찾고, 역사를 역행해서 사대부와 부호들을 제자리에 앉히고, 마음대로 전횡을 일삼으면서 다시 토지 겸병을 하고, 공방과 공장을 기상천외하지만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서 전부 망가트리려는 것 아닌가?”
왕건속이 완고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네놈이 만든 그 공방, 공장들은 천화(天和)를 망가뜨리고, 네놈의 신법은 정도를 뒤엎는 것이다. 네놈이 한 짓들은 애초부터 용납될 수 없는 짓들이야!”
두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뜬장님이었군. 우물 안 개구리였어. 대녕 제국에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어.”
왕건속이 콧방귀를 뀌면서 화를 냈다.
“하하, 두변 후작. 내가 무엇 때문에 조정에서 쫓겨났는데? 난 방계와 대적해서 쫓겨난 것이다. 내가 방계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때, 네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아마 그땐 태생이 고자여서 두부에 처박혀서 유유자적하고 있었겠지?”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전투가 아니라 입방아를 찧는 거였겠지. 공허한 담론은 나라를 망치기만 하지. 방계가 왜 당신을 죽이지 않고, 장양명 순무를 죽였을까? 장양명 순무는 제국을 위한 진정한 충신이지만, 당신은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해서거든.”
왕건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생을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모르나? 엄당 주제에 나를 그렇게 말하다니. 두변, 이 난신적자야. 나중에 나를 죽일 배짱이 있다면 나를 죽여라. 안 그러면 내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네놈을 죽일 테니까.”
“방계와의 대전이 눈앞에 있고, 여진 제국과 치를 운명의 대전이 코앞에 있는데도 나를 쓰러트리겠다고?”
왕건속이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를 질렀다.
“넌 난신적자일 뿐이니까. 방계 세력보다 대녕 제국에 기생하면서 충신 연기를 하는 네놈이 더 나쁜 놈이지. 배짱이 있으면 날 죽여봐라. 날 죽여 보라고.”
“올해 연세가 칠순이 넘었지? 한조(漢朝) 때, 신하가 황제에게 삿대질하면서 욕해도 황제는 그 신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니, 내가 지금 당신을 죽이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지?”
두변이 고민하는 척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만약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나도 당신을 죽이지 않고 당신을 권력 없는 허수아비로 살려두면서 내 도량을 보여줬겠지.”
일순, 두변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난 당신 같은 멍청이를 살려둘 생각이 없단 말이지. 누구든 감히 신법을 제지하고 훼손한다면, 오로지 죽음뿐이다.”
두변이 철갑을 두른 채찍을 왕건속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촤락!
왕건속의 늑골이 부러지면서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왕건속은 조금 전처럼 고집스럽게 두변을 욕하지 못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진짜 날 죽이려는 건가? 설마 경성과 척을 지는 게 두렵지도 않은 거야? 정말로 난신적자가 되려고?’
촤락, 촤락, 촤락!
두변이 철갑 채찍을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30초 뒤, 왕건속이 죽었다.
죽기 직전 왕건속의 눈에는 오직 두려움과 애걸만 남아 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광서 순무 오삼석은 온몸이 떨리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얼굴색이 창백해진 오삼석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두변 후작, 이게 방계 세력이 자네와 경성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음모라는 걸 알면서, 왜 그 음모에 걸려드는 것이오? 왜 아군만 고통스럽고, 적군만 통쾌한 짓을 하냔 말이오.”
두변이 대답했다.
“오 대인, 대인께서는 왕건속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됐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아무리 왕 총독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해도, 그를 죽이면 어떡하오? 아무리 그래도 폐하의 노신인데, 자네의 이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봤소?”
“그럼, 왕건속이 진평을 죽이고 서남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압니다. 정치는 구차스럽고 타협을 해야 한다는 걸요. 하지만 백성이 망멸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구차할 겁니까? 그리고 대인께선 왕건속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왜 제지하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태도를 보이신 겁니까? 왕건속이 서남의 호황을 망가트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왜 말리지 않으신 겁니까?”
광서 순무 오삼석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변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관모를 벗으면서 말했다.
“두변 후작은 참으로 위풍당당하시오. 본관이 무능하여 후작과 같은 길을 갈 수 없겠소.”
“마음대로 하시지요. 광서 순무를 하기 싫으면 떠나세요.”
두변이 냉랭하게 말했다.
오삼석이 분개하면서 관모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독부를 떠났다.
두변이 명령했다.
“여봐라. 호광 총독이 데려온 수백 명 관리를 전부 잡아들여라. 만약 그들 중 백성을 사랑하고, 정신이 깨어 있는 관리가 있다면, 한동안 학습을 시켜서 신법에 대해서 잘 배우게 해라. 고집스럽고, 생각이 닫혀 있고, 신법에 반하는 사람이지만, 나쁜 짓을 한 적 없는 관리들은 서남에서 내쫓고.”
마지막으로 두변이 살기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만약 신법에 반대하고, 뇌물을 받거나 법을 어기거나, 일부러 신법의 발전을 저해한 사람이 있다면, 모조리 죽여버려라.”
“알겠습니다.”
수백 명 무사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무사들은 곧바로 총독부를 떠나 두변의 군령을 전하기 위해 군영으로 돌아갔다.
반 시진 뒤, 수천 명 대군이 군영을 나섰고, 천 명이 넘는 여경사 무사가 관아에서 나와, 광서 행성 전체를 수색하며 체포를 시작했다.
두변의 군령 하나로 인해 서남 전체가 들썩였다.
서재 안.
두변과 이문회가 단둘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변, 내가 왕건속이 관리들을 데리고 서남에 오는 걸 막지 않은 걸 탓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문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의부, 저는 의부를 탓하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께 충성하시는 분이니, 폐하의 성지를 거역할 수 없으셨겠지요.”
이문회가 할 말을 잃은 듯 또 두변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두변, 너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이문회는 두변에게 ‘서남을 정말 네 독립 왕국으로 만들 셈이냐, 정말로 황제의 뜻을 거역하고 자립하려는 것이냐’ 하는 말을 묻지 않았지만, 어떤 생각을 하냐는 말에 이 뜻이 전부 담겨 있었다.
두변이 되물었다.
“의부, 제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신법의 효과는 어떻습니까?”
“아주 좋지. 정말 놀랍더구나.”
“의부, 저는 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황제에 충성을 다합니다. 사실 저는 동방 연합 왕국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들이 동방 세계를 세계의 정상으로 이끌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동방 연합 왕국이 동방 세계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게 제가 물러나는 게 맞지 않나 하고요.”
이문회가 가만히 두변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렇겐 안 되겠더라고요. 동방 연합 왕국에는 너무도 많은 음모가 있고, 그들은 대녕 제국의 제위를 얻기 위해서 여진 제국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제국의 북방 전체가 다른 민족에게 짓밟히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우리의 이익을 대표할 수 없어요. 동방 연합 왕국은 동방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고, 우리의 절대 적수입니다.
우리의 적은 무척 강합니다. 정말 정말 강하다고요. 제가 어떤 정치적 거래나 정치적 합의를 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요. 저는 이 나라, 우리 백성에 충성하는 게 우선이고, 그다음에 충성하는 사람이 황제 폐하입니다. 그 누구도 신법을 망가트릴 수 없고, 그 누구도 서남이 강대해지는 발걸음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이문회는 계속해서 말없이 두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는 폐하께서 이런 성지를 내리셨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저와 폐하 사이에 묵약이 있는데, 절대로 폐하께서 서남에 조정의 관리를 보내셨을 리가 없단 말입니다. 도대체 경성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