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56화 (456/648)

456장: 두변 대 소군

두변은 담요를 펼쳐서 예상 선자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몸을 가려줬다.

두변의 시선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몰려오는 함대를 향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인가? 진짜 어마어마하군.

꼭 대영제국이 생각나는 규모네. 나는 언제쯤 이런 함대를 가질 수 있을까?’

두변도 감탄하고 말았다.

동방 연합 왕국은 이 함대를 이용해서 인도양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인도양 연안에서 한 행성 크기의 식민지를 얻었다.

그리고 동방 연합 왕국은 이 함대 덕분에 유경 국왕이 자신을 음해한 사람이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 모른 척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함대 덕분에 소군의 정인 에인젤은 자유롭게 성로마 제국의 황궁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두변은 속으로 엄청나게 아쉬워하면서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저 함대가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두변의 시선이 선두에 서 있는 젊은 공자에게 향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소군 전하.

소군은 대녕 제국, 안남 왕국 등 동방의 거의 모든 땅을 흡수했고, 오주 대륙, 심지어 미주 대륙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아프리카 대륙에 광활한 식민지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가 흑인 곤륜노 무사들을 대거 양성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아프리카 식민지 때문이었다.

소군은 무척 나른한 듯 평온한 눈빛으로 절벽 위에 서 있는 두변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두변에게 2초 정도만 머물고는,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소군 전하에겐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급의 사람이라 두변을 평등하게 대하거나, 마주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절벽 위.

예상 선자가 바다를 뒤덮은 함대를 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두변이 말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요.”

예상 선자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가요. 북명검파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지고, 영원히 돌아오지 말아요.”

예상 선자가 두변의 손을 잡고 그가 북명검파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이미 왔는데, 뭐하러 또 떠나요.”

“당신 죽을 수도 있어요. 순진한 척 하지 마요.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요.”

예상 선자가 두변을 잡아끌면서 성큼성큼 걸었다.

하지만 몇천 미터도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의 앞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지만 엄청난 미인이 나타났다.

이 여인이야말로 북명검파의 제일 미인 아닐까?

갑자기 나타난 이 여인은 예상 선자보다 더 성숙했고, 그녀와 달리 풍아한 매력이 가득했다.

이 사람이 바로 기음음의 쌍둥이 자매, 북명 종주의 부인 기염염이었다.

기염염은 영도현보다 나이가 많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나이는 30대였다.

“자, 이제 때가 되었어요. 두변, 제21대 북명 종주에 계승하려는 거죠? 나를 따라와요.”

예상 선자는 기염염의 뒷모습을 보면서 점점 더 절망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기염염의 뒤를 따라 북명검파로 돌아갔다.

예상 선자가 두변에게 물었다.

“두변, 이 세상 사람들은 진짜로 신앙이나 신념이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을 묻는 거예요, 아니면 집단을 묻는 거예요?”

“집단이요.”

“없다고 생각해요. 성화교 군단이 나를 무척 믿지만, 대부분은 개인이지, 하나의 집단이 아니에요. 나는 지금의 성화교 세계가 더는 화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서방의 성로마 제국도 더는 신 따위를 믿지 않아요. 지금 세계가 믿는 건 오로지 힘밖에 없어요.”

“조금 전에 우리가 본 그 거대한 함대 같은 힘을 뜻하는 건가요?”

“맞아요.”

“그걸 알면서도 돌아온 이유가 뭐죠?”

“어차피 오늘이 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들이 날 찾아왔을 거예요.”

북명검파 신전 안.

여전히 거대하고 허름한 신전에서는 북명검파 장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장로회가 열릴 때마다 장로들은 주먹다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매번 의견 충돌이 심해서 살벌하게 말싸움을 하곤 했다.

지난번에는 예상 선자가 북명 선조의 예언 속 그 사람인 두변을 구하자는 결의를 올렸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의는 대부분 대장로들의 거절로 부결되었다. 마지막엔 북명 종주 영도현이 두변을 세계의 갈라진 균열로 던져버렸다.

그때 영도현은 이 기회에 두변을 아예 죽이려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정말로 북명 선조의 예언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명 선조의 예언은 진짜였고, 두변은 정말로 살아서 돌아왔다.

두변이 살아 돌아온 이상, 영도현은 더는 피하지 못하고 북명 선조의 예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직면해야만 했다.

북명검파의 대장로회 구성원이 전부 신묘에 모여서 유래에 없는 주제로 장로회를 시작했다. 이번 장로회 논의 안건은 딱 하나였다.

두변을 다음 종주인 제21대 북명 종주로 임명할 것인가, 절반 짜리 북명대법 두루마리를 두변에게 전수할 것인가.

신전 안에 수백 명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북명검파의 모든 대장로와 장로가 출석한 것이다. 심지어 북명검파의 13개 섬의 도주도 전부 출석했다.

대장로 사이에는 대은구도 도주 하진이 앉아 있었다.

북명검파에서 이런 대규모 장로회를 여는 건 수십 년만에 처음이었다.

두변은 신전의 중앙 공터로 천천히 걸어가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북명 종주 영도현이 높은 곳에 서서 말했다.

“더는 회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논의하고자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북명 선조의 예언에 관해서이지요.”

북명검파의 모든 대장로, 장로, 도주 등이 조용히 영도현의 말을 경청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다시피, 북명 종주께서 북명검파를 만드신 이유가 바로 세계의 갈라진 균열을 수호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계의 거대한 균열을 지키고, 끔찍한 마물들이 이 세계를 침략하는 걸 막기 위해서지요.

선조의 예언 중, 사명의 주인은 용린이 온몸을 뒤덮고 있어서 칼과 창이 들지 않는 몸이고, 지옥불을 견딜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명의 주인은 세계의 갈라진 균열에서 죽음의 신의 동굴을 거쳐 되돌아와, 기적의 중생을 해낼 것이라고요.”

모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이 흔들림은 두변이 대녕 제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장로, 장로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북명검파에 심상치 않은 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영도현이 중앙에 서있는 두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예언 속의 사명의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 사람, 두변입니다.”

대은구도 하진 등이 복잡한 표정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영도현이 말을 이었다.

“북명 선조께서 법지(法旨)를 내리셨지요. 사명의 주인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을 다음 종주로 임명하라고요. 그리고 바로 어제, 난 제12대 북명 종주 오애지의 정신 법지를 보게 되었고, 그분은 두변을 제21대 종주로 모시라는 법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두변, 제12대 북명 종주 오애지의 정신 법지를 다시 보여주시오.”

“알겠습니다.”

두변이 대답한 뒤 눈을 감았다.

신비한 불빛이 두변의 몸을 감싸더니, 그의 모습이 제12대 오애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북명검파 제20대 종주는 명령을 들으라. 두변은 북명 선조 예언 속의 사람, 사명의 주인이니, 두변을 다음 종주로 모실 것을 명한다.”

자리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이 오애지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오애지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초상화는 수없이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순간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정말로 이 법지를 따라야 하는 건가?’

‘이 법지를 따라야 하는 게 맞긴 하지. 북명 선조의 지의이기도 하고, 제12대 북명종주 오애지도 직접 법지를 내렸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이 법지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예언에 따르면, 사명의 주인은 북명검파를 종결시킬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만약 북명검파가 없어지면, 우리들의 권력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래선 안 되지.’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두변을 다음 종주로 임명하는 걸 반대하는 건 선조의 법지를 어기는 것이니, 사람들은 눈치만 보면서 누가 먼저 앞장 서주길 바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영도현을 향하고 있었다.

‘종주 폐하! 부디 선조의 지의에 항거해야 합니다. 무슨 이유든 꼭 반대하세요!

그 이유가 아무리 황당한 이유여도 우리는 폐하의 뜻을 따를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영도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북명검파 제20대 종주 영도현, 법지를 받들겠습니다.”

자리에 있던 대장로와 장로들은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진짜 두변을 다음 종주로 모시려고?

진짜로 북명 선조의 예언을 따르겠다고? 무슨 소리야. 종주, 못 본 사이에 바보가 된 거야?’

사람들이 웅성대면서 영도현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먼저 나서질 않았다.

영도현이 말했다.

“두변을 제21대 북명 종주로 임명할 것을…….”

영도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난 반대합니다.”

눈보다 더 새하얀 장포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 전하였다.

두변으로서는 처음으로 소군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영도현과 비슷하게 고아하고 탁월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내.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은 두변에 비하면 훨씬 더 비범해 보이는 자였다. 신전에든, 길가에든, 강가에든, 아니면 사막이든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내였다.

사내는 어딜 가든 몸에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을 것 같은 흰 장포를 입고 유유히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소군이 등장하자, 신전 안에 적막이 흘렀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소군에게 쏠렸고,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배경이 되고 말았다.

“방진(方塵)입니다!”

동방 연합 왕국 소군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더니, 북명 종주 영도현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영 종주, 종주가 말하는 북명 선조의 예언 속의 그 사명의 주인은 무슨 특징이 있다고 하셨지요?”

영도현이 말했다.

“온몸이 용린으로 뒤덮여 있다.”

영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군의 얼굴에 황금색 용린이 나타났다. 햇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더없이 고귀하고 위엄있어 보였다.

소군이 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자, 용린이 그의 팔에서부터 1촌씩 내려오더니 이내 손까지 뒤덮었다.

소군이 대검을 꺼내더니, 자신의 손목을 힘껏 내리쳤다. 대검을 내리치는 그 순간, 불꽃이 사방으로 튀더니 검이 쩍, 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소군 방진의 손목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동방 연합 왕국 소군 전하가 말했다.

“사명의 주인의 두 번째 특징이 무엇이지요?”

영도현이 대답했다.

“지옥불입니다.”

소군 방진이 손바닥을 펼쳤다.

화르륵.

새하얀 불꽃이 그의 손바닥에서 피어올랐다.

그가 지옥불을 피우는 속도는 두변보다 훨씬 더 빨랐다.

저 새하얀 지옥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두변의 지옥불과 그야말로 똑같았다.

소군 방진이 갈라진 대검 조각을 손바닥 위의 지옥불에 갖다 대자, 순간 검의 반토막이 아예 사라졌다.

“지옥불, 지옥불이 맞소. 저게 바로 지옥불이오!”

자리에 있던 대장로와 장로들이 흥분한 모습으로 외쳤다.

이때, 소군 방진의 시선이 두변에게 향했다.

“북명 선조께서 북명검파를 창립하신 건, 세계의 갈라진 균열을 수호하고, 마물들이 이 세계를 침투하는 걸 막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여러분의 앞에 서 있는 두변은 이 세계에 침투한 매마입니다. 이자의 매마의 기운은 몇백 리 밖에서도 느껴집니다.”

소군 방진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두변이 유경 왕성에서 페르시아의 일리안 왕자로 모습을 바꾸었던 게 오히려 가장 큰 허점이 되었습니다. 여봐라!”

소군 방진이 부르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수십 명 사람이 신전 중앙 공터로 몰려들더니 아주 짧은 시간 만에 거대한 진을 만들었다.

동방 연합 왕국 소군 방진이 수정 거울을 꺼내서 진의 중앙에 올려놓았다.

스릉!

태양빛 수정 거울을 비추자, 사람들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두변의 몸이 서서히 형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두변의 머리에는 악마의 뿔 두 개가 나타났고, 두변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이었다가 악마의 형상이었다가를 수차례 반복했다.

소군 방진이 말했다.

“진상이 밝혀졌군요.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군 방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변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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