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60화 (460/648)

460장: 투항

같은 시각.

쾅, 쾅, 쾅, 쾅.

대녕 제국의 군대 영지에서 천지를 뒤흔들 폭발이 일어났다.

깜깜한 밤에 울려 퍼지는 폭발음은 더없이 무서웠고, 땅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화약고가 폭발했다.

이건 이영도의 작품이었다.

쾅, 쾅, 쾅, 쾅.

화약고에서 시작된 폭발은 병사들이 쉬는 막사 안까지 이어졌고, 무수히 많은 대녕 제국 병사가 무방비 상태로 폭발에 희생되었다.

병사들의 잘린 팔다리, 머리가 사방에 나뒹굴고 잔해가 볏짚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대녕 제국의 군대가 일순간 아비규환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연쇄 폭발은 사람뿐만 아니라 말들도 놀라게 해서, 2만 필에 가까운 군마가 마구간을 뛰쳐나가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마구 짓밟고 달아났다.

폭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또 한 번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하늘로 솟아오른 거대한 불덩이가 칠흑 같던 밤하늘을 하얗게 물들였다.

이번에는 대녕 제국 군대 식량 창고가 폭발했다.

몇십 리 밖에서도 식량 창고가 폭발하는 게 보일 정도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40만 대군의 보급품이니, 식량 창고에는 10만 석이 넘는 군량과 마초가 비축되어 있었다. 식량 창고는 본래 모두 중군이 지킬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을 뿐만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 심지어 땅을 파서 식량 창고를 만들었었다.

그런데 배신자 이원 때문에 모든 식량 창고와 화약고가 정확하게 폭발해 버린 것이다.

매서운 불길이 십만 석에 달하는 군량을 집어삼켰다.

“정말 화려한 장관이로군.”

막사 안에 있던 이원은 창가의 휘장을 살짝 들어 올려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엄청난 불길을 바라보았다.

“이 몸이 바로 이 장관을 만들었지! 하하하하!”

대녕 제국 군영은 아비규환, 혼비백산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이때, 철커덕 소리가 들리더니 심양성의 성문 4곳이 동시에 활짝 열리고, 여진 제국의 몇만 기마병이 대녕 제국 군영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기마병의 뒤로는 10만 보병이 따라오고 있었다. 총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 지구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 야맹증이 심해서 고대에는 야전(夜戰)에 능하지 않고, 급습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여진 제국의 무사들은 다른 지구의 후금 시대와 달리 야맹증이 없었다. 일찌감치 바다를 끼고 살게 되면서 고래 고기를 일년 내내 먹은 덕에 시력이 무척이나 좋았다.

게다가 바닥에 새하얗게 눈이 깔리고 거대한 불길이 반사되어서 전장은 낮만큼 환하진 않지만, 전투를 하기엔 충분히 밝았다.

“죽여라. 죽여!”

“대녕 제국을 멸국하자!”

여진 제국의 몇만 기마병이 맹렬한 기세로 대녕 제국 군영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이 거대한 연극을 위해서 보름씩이나 대녕 제국의 비위를 맞춰준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대녕 제국의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남았다.

여진 제국의 병사들은 오랜 인고 끝에 온 해방을 만끽이라도 하듯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대녕 제국의 군영은 일순간 인간계의 지옥이 되어버렸다.

영설 공주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으로, 첫 폭발음이 터지는 순간부터 직속 부대를 이끌고 군영의 질서를 유지하러 나섰다.

영설 공주는 따로 이원의 막사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밖에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이원과 원등 공작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알리러 가지 않은 것이다.

뒤이어 식량 창고가 폭발했을 때, 영설 공주는 부대를 이끌고 불을 끄러 달려갔다. 하지만 금세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식량 창고가 한 곳만 폭발한 게 아니라, 식량 창고가 있는 위치 일곱 곳 전부가 정확하게, 동시에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여진 제국의 군대가 곧바로 들이닥쳤다.

대부분 병사들은 통솔자가 없어 우왕좌왕하는 와중이었고, 막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폭발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영설 공주가 직속 부대를 이끌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병사들을 악착같이 규합해서 여진 제국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반 시진 정도 격전이 이루어진 후, 영설 공주의 대군은 참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대녕 제국의 몇십만 대군은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고, 영설 공주 혼자서 이 국면을 되돌리기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너무 많은 병사가 죽었고, 너무 많은 병사가 도망쳤다.

영설 공주는 실핏줄이 터진 새빨간 눈으로 지옥 같은 전장을 바라보았다.

완전한 패배였다.

영설 공주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무려 40만 대군인데, 이렇게 끝이 난다고? 대녕 제국 마지막 주력이요, 제국 북방의 마지막 희망인데!’

영설 공주는 전투하는 내내 원등 공작, 난오 공작, 그리고 이원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공주 전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얼른 빈틈을 노려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요양성으로 퇴각해야 합니다.”

영설 공주의 참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가자.”

영설 공주는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는 1만 잔병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여진 제국이 완전한 포위진을 만들지 못한 틈을 타서 서둘러 철수해야 했다. 영설 공주가 퇴각하는 걸 뒤늦게 알아챈 여진 제국은 즉시 기마병 부대를 보내서 영설 공주의 뒤를 쫓게 했다.

여진 제국의 정예 기마병은 너무도 빨랐고, 게다가 요동 지역의 추운 날씨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거의 일상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영설 공주의 잔군 부대는 금세 여진 제국의 기마병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공주 전하를 위해 뒤를 끊어라.”

참장이 큰소리로 외치자, 1만여 보병이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방어진을 치고 여진 기마병과 대적할 준비를 취했다.

영설 공주는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아서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서 병사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고자 했다.

“공주 전하! 가야 합니다.”

영설 공주 옆에 있던 시녀가 영설 공주의 행동을 눈치채고 곧바로 영설 공주의 말에 올라탔다. 영설 공주의 곁에는 늘 십여 명의 시녀가 있는데, 그중 몇 명은 무공 고수였다.

시녀 하나가 영설 공주의 손에서 말고삐를 낚아채고는 그녀가 병사들과 함께 죽으러 가려는 걸 막았다.

“날 놔줘. 돌아가게 해줘. 내가 주장이라고. 내가 이렇게 내 부대를 버릴 수 없어.”

영설 공주가 소리쳤지만 시녀가 울부짖으면서 소리쳤다.

“공주 전하, 저들의 희생이 헛되게 하시면 안 됩니다.”

결국 영설 공주와 남은 병사들은 1만 보병을 남겨둔 채 질주했다.

여진 제국의 몇천 기마병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1만 보병을 향해 돌진했고, 보병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맞서 싸웠다.

두 군대가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했지만, 보병 병사들은 기마병의 말굽에 밟혀 죽거나 창에 찔리면서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영설 공주는 제 오장육부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 부대는 영설 공주가 2년 동안 키운 직속 부대이고, 그녀가 처음으로 직접 키워낸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뒤를 끊어주면서, 여진 제국 기마병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영설 공주는 괴로움에 가득한 외침과 함께 피를 뿜었다.

다음날 해가 떴다.

심양성 밖의 대전은 이미 끝난 상태이지만, 어젯밤에 시작된 거센 불길은 아직도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심지어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짙은 연기가 전장을 뒤덮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땅은 붉은 피와 시체, 그리고 재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도처에 대녕 제군 병사들의 시체였고, 그들의 피로 이루어진 핏물이 강물이 되어 수십 리에 달했다.

전장의 한쪽에는 병사들이 빽빽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젯밤 대전에서, 대녕 제국은 사상자가 전체의 3할이 넘었고, 도망친 자가 2할, 그리고 나머지 절반 가까이의 병사들이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투항했다.

투항한 사람들의 머릿수가 워낙 많아서 정확히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건장하기 이를 데 없는 여진 무사 한 명이 커다란 군마를 타고 천천히 심양성을 빠져나왔다.

그는 다른 여진 무사와 체격적으로는 달라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입은 갑옷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사내가 바로 여진 제국의 대한(大汗) 금태극이었다.

한창 나이인 금태극은 여진 제국의 무적 통수권자일 뿐만 아니라, 절대 무공 강자이며 대종사급 강자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는 대녕 제국의 희대의 배신자 이영도였다.

지금 그의 이름은 완안영도로, 여진 제국 대한의 매부이자, 여진 제국의 친왕이었다.

이원이 여진 제국 대한 금태극 앞으로 걸어가서는 무릎을 꿇었다.

“신, 이원. 대한 폐하를 뵙습니다.”

여진 제국 대한 금태극이 말에서 내리더니 직접 이원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고생했네, 장군.”

금태극은 유창하게 대녕 제국 말을 구사했다.

그가 친근하게 이원을 껴안으면서 말을 이었다.

“여진 제국이 오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전부 장군 덕분이네. 나 금태극은 하늘에 대고 맹세컨대 장군의 은혜를 꼭 기억하겠네.”

금태극이 이원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 이리 오게. 우리 오늘 의형제를 맺음세.”

이원이 화들짝 놀라면서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감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금태극이 이원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하노라. 나 여진 제국 금태극은 이원과 의형제를 맺겠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를 바라며, 영생영세 형제의 정의를 져버리지 않겠다.”

이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금태극을 바라보았다.

여진 제국의 국군이며, 진정한 일대 웅주가 자신과 의형제를 맺다니.

금태극은 천윤 황제에 비하면 절대적인 패왕으로, 대녕 제국을 인정사정없이 깔아뭉갤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일대 웅주가 왜 자신과 의형제를 맺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원 장군은 나와 의형제를 맺기 싫소?”

금태극이 웃으면서 묻자, 이원이 곧바로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렸다.

“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합니다. 저 이원은 대한 폐하와 의형제를 맺겠습니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를 바라며, 영생영세 형제의 정의를 져버리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이원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소인의 성을 완안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윤허해주셨으면 합니다.”

여진 제국 대한 금태극이 이원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의형제이니, 당연히 금씨여야지. 금원은 명을 들라. 내가 너를 여진 제국 평서 공작으로 봉하겠노라.”

대한 금태극은 과연 대범한 사람이라 그런지, 곧바로 이원을 공작으로 책봉했다.

이원이 눈밭 위에 이마를 대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이원의 말에 뒤에 있던 완안영도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살아남을 줄 아는 자로군. 대한에게 황제라니.’

여진 제국 대한 금태극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아직은 이르지.”

‘그렇다고 황제가 되는 날이 그리 멀지도 않았지.’

금태극은 대녕 제국의 마지막 주력을 없앤 뒤, 곧바로 심양을 성도로 명명하여 국도로 지정하고, 여진 제국을 대금 제국으로 나라의 이름을 바꾼 뒤에 정식으로 황제가 될 생각이었다.

이원의 뒤에 있던 원등 공작과 난오 공작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어제 이원은 대녕 제국의 거의 모든 장군을 몰살했지만, 이 두 공작만 살려두었다.

이곳에 무릎을 꿇고 있는 대녕 제국의 포로 병사들을 항복시키려면, 두 공작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금태극이 걸음을 재촉하듯 다가가서 두 사람을 일으켰다.

원등 공작과 난오 공작은 해독약을 복용한 터라 의식은 있었지만, 몸이 아직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두 분, 일어나시오. 이렇게 추운 날에 무릎을 꿇고 있으면 무릎이 다 상하지 않겠소. 내가 거칠고 무식한 사람이긴 하나,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간절하오. 두 선배가 나와 함께 대업을 도모해보지 않겠소? 두 분이 공을 세우고 업적을 만든다면, 훗날 두 분을 꼭 왕으로 봉해드리겠소.”

원등 공작과 난오 공작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만약 이원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더 완강하게 반항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대녕 제국의 북방을 일으켜 세운 기둥이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훈귀 가문인지라, 이대로 투항해버리면 체면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여진 제국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두 사람의 눈엔 그저 야만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원이 먼저 배신하고 투항해버리니, 모든 게 다 달라졌다.

만약 두 사람이 투항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수십만 대군은 이대로 남에게, 특히 이원에게 넘겨질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군대를 지키기 위해서 투항해야만 했다.

원등 공작이 치욕스러움을 꾹 참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 투항하겠습니다.”

이어서 선화 공작 난오도 머리를 조아리면서 절을 올렸다.

“신, 투항하겠습니다.”

금태극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선배의 도움이 있다면, 나의 대금은 중원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겠소. 내가 원등을 정남 공작, 난오를 평동 공작에 봉하겠소.”

그렇게 이원, 원등, 난오 세 사람은 여진 제국에 투항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대녕 제국의 20만 대군은 전부 여진 제국 대한 금태극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녕 제국의 북방 주력 대군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이로써 대녕 제국은 심양부터 산해관까지의 길이 막는 병사 하나 없이 완전히 뚫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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