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장: 이연정의 절망
경성 황궁 안.
태자는 금색 왕포를 두른 채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궁전의 지붕 위로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태자는 손을 뻗어서 눈꽃을 손바닥에 받으면서 눈이 녹는 걸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 상서로운 눈은 풍년의 징조입니다. 눈이 이리 내리는 것을 보니, 올해는 곡식의 수확이 넉넉하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대녕 제국이 드디어 한고비를 넘었구나.”
옆에 있던 환관의 말에 태자가 말했다.
태자는 사실 마음이 무척 조급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심양 전투가 이미 시작된 지 19일이나 지났으니 곧 결말이 나고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지. 며칠 이내로 곧 소식이 도착할 거야.’
“태자 전하, 금방일 겁니다. 전하께서는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틈을 타서 요동 전장 이원에게 작위를 하사하셨잖습니까. 전하의 봉작은 설중송탄과도 같으니 이원 대인이 더욱 열심히 전투에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소인이 들은 것인데, 이원 장군이 보름 만에 여진이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연달아 10연승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심양만 남았으니, 그 도적놈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원 대인께 봉작을 내리셔서 수십만 대군의 사기도 고조되었겠지요. 어쩌면 이원 대인이 여진 대군을 처참히 짓밟고 심양성을 이미 수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태자가 신중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태자도 환관과 같은 생각이었고, 이미 대승을 알리는 낭보가 경성으로 오고 있다고 믿었다.
환관이 쉬지 않고 아첨했다.
“전하께서는 역시 혜안을 가지셨습니다. 이원 장군이 천재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셨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이원 장군이 나서는 전투마다 대승을 거두고 있잖습니까. 이는 모두 태자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두변을 발탁했고, 태자 전하께서는 이원을 발탁하셨습니다.
하지만 금태극을 여여해와 동일 선상에 두고 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여해가 만들겠다던 대염 왕국은 아이들 장난질에 불과하죠. 두변 후작이 그런 터무니없는 왕국을 멸국했다고 치켜세우는데, 두변이 운이 좋았던 거지 않겠습니까. 멸국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원 대인이 건로를 멸하는 공로 정도는 되어야지요.”
하지만 태자가 정색하며 말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하지 말거라. 두변 후작도 우리 대녕 제국의 동량지재다. 또 그런 말을 했다가는 곤장형에 처할 것이다.”
대환관이 태자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저 소인이 보기에 두변 후작이 태자 전하께 공경스럽지 못한 것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 태도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끓었습니다. 이원 장군은 태자 전하께 얼마나 깊은 충심을 보입니까? 두변 후작보다 능력도 좋으면서 겸손하기까지 하니, 진정한 영재 아닙니까. 소인은 태자 전하께서 대녕 제국을 중흥으로 이끄실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허, 그만하라 하였다.”
태자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화내는 척을 하면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태자는 벌써 자신이 대녕 제국의 중흥을 이루는 한 장면을 이미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금방이지. 요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이리로 오고 있겠지.’
태자는 두변이 요동 대전의 희보를 듣게 되었을 때, 이원이 멸국의 대공을 세우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무슨 표정을 지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대환관이 말한 것처럼, 이원은 두변보다 훨씬 더 겸손했다.
‘두변, 과인은 네놈 없이도 여여해보다 더욱 강한 여진 제국을 멸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무공이 뛰어난 환관 하나가 마당 안으로 빠르게 뛰어들어왔다.
“태자 전하! 태자 전하! 요동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지급(至急) 전보입니다!”
태자의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구나!
이원, 역시 과인을 실망시키지 않았구나. 한 달도 안 되어서 심양성을 수복했구나. 대녕 제국과 여진 제국의 국운을 건 전투인데, 한 달 만에 대승을 거뒀구나. 이원, 역시 훌륭하다!’
태자가 다급하게 급보를 건네받았는데, 급보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잔뜩 묻어있었다.
태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게 뭐 하는 거지? 대승 희보에 피를 묻히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태자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천천히 급보를 펼쳤다.
급보의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이원, 배신. 요동 궤멸. 40만 대군 전멸.’
순간, 태자의 머리가 핑 돌았다.
태자가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지?’
태자가 다시 눈을 부릅뜨고 급보 내용을 읽었지만,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게 틀림없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태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태자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면서 멀쩡히 서 있기도 힘들었다.
“말도 안 된다. 이건 가짜다. 이원이 어찌 배신해! 이건 가짜라고!”
순간 태자의 심장을 누가 쥐어짜는 것처럼 극심하게 아파왔다.
푸악!
태자가 갑자기 새빨간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태자 전하! 태자 전하!”
대환관이 태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황급히 부축했다.
대환관의 두피가 저릿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태자 전하께서 피까지 토하신 거지?’
푸악!
태자가 또 울컥 피를 토해냈다.
새하얗던 눈밭이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두 번이나 피를 토한 태자는 오히려 피를 토하고 나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해! 이원이 투항할 가능성이 전혀 없잖아? 승리가 코앞인데, 이원이 인생의 정점에 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투항할 리 없잖아!
여진 제국의 음모가 틀림없어!
이간계야. 여진 제국의 이간계가 분명해!’
태자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여봐라. 동창 고수를 심양으로 보내서 그쪽의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환관 하나가 즉시 움직였다.
굳이 심양성에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태자는 알았을까.
국운을 건 대전이다 보니, 이 전투에 쏟아부은 은자, 식량, 백성이 엄청나게 많았다.
경성에서 요동까지 보급품을 옮기는 사람조차 수천, 수만 명으로, 이들은 매일같이 그 길을 달려갔다.
한 시진 뒤, 두 번째 전보가 도착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전보의 내용이 점점 더 상세해졌고, 이게 사실이라는 쐐기를 박을 전보까지 도착했다.
영설 공주의 직속 무사가 불철주야 달려서 경성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피를 뒤집어쓴 무사가 절망에 잠긴 눈빛으로 태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말투에는 비통함이 가득 묻어났다.
“5일 전, 경성 칙사가 대영에 들어와 이원을 요동 부총독, 요양 자작으로 책봉했습니다. 같은 날, 여진 금태극이 사자를 보내 아군에게 휴전하고 화의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곧 심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전이 끝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이원은 천은에 감사한다는 이유로 전군의 중고급 장군을 전부 모아 연회를 열었습니다.
연회에선 대부분 장군이 이원을 추켜세우고, 두변 후작을 험담했습니다. 영설 공주께서는 불편함을 느끼시고 일찍 자리를 떠나셨고요.
연회가 한창일 때, 이원이 장군들의 술을 독주로 바꾸었고, 두 공작과 백여 명 장군을 전부 중독시켰습니다. 두 공작 외에 나머지 장군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요.
이원은 심복을 시켜서 10만 근 화약을 군영 내 중요 지점 십수 곳에 설치했습니다. 이원의 화약이 터진 곳은 병사들이 밀집한 곳, 군마 마구간이 밀집된 곳, 그리고 식량 창고 일곱 곳이었습니다.
화약은 정확한 지점에서 폭발하였으며, 무수히 많은 아군 병사가 즉사하였습니다. 놀란 군마가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군영과 병사를 짓밟았고, 군영 곳곳이 불에 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식량 창고가 불에 타서 불길이 더욱 거세졌고, 거센 불길이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이때, 심양성 내에 있던 여진 제국 대군이 아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고, 지휘관을 잃은 아군의 수십만 대군은 손쓸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영설 공주께서 3, 4만 대군을 이끌고 적군과 반 시진 정도 격전을 치르다가 포위망이 만들어지기 전에 퇴각하셨습니다. 여진 제국의 기마병이 공주 전하의 부대를 빠르게 추격해온 탓에, 1만 보병이 목숨을 희생하여 뒤를 끊었고, 영설 공주께서는 수천 기마병과 함께 간신히 남쪽으로 퇴각하셨습니다.
이원은 아주 일찍부터 은밀하게 여진 제국에 투항했을 겁니다. 여진 제국이 요동 전장에서 줄곧 이원을 협조했기 때문이죠. 이원이 군대를 이끌고 요양성을 수복했고, 요양부터 심양까지 총 세 번의 대전을 치렀는데, 이원이 전장에 나설 때마다 대승을 거뒀습니다. 심양전 때도 이원이 위풍당당하게 여진 대군을 격퇴했고요. 이 모든 게 음모였습니다. 이원의 신분과 영예를 드높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원이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를 차지할 테고, 그래야만 40만 대군을 한 번에 전멸시킬 수 있으니까요.”
모든 게 다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태자의 환상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모든 게 다 거짓이었고, 이원은 일찍이 여진 제국에 투항했으며, 그의 휘황찬란한 전력도 전부 거짓이었다니!
이원과 여진 제국이 대녕 제국의 멸망을 위해 엄청난 음모를 꾀한 것이라니!
이 음모를 전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바로 태자, 자신이었다!
40만 대군이 전멸하게 된 이유 중 절반은 태자 자신 때문이다!
태자는 이미 피를 더 토해내기도 힘들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귀에선 이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머리는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로 멍해졌다.
누군가가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자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군이 심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여진 제국을 멸족한 영예를 누리며 제국의 중흥을 이루리라 꿈꾸었다.
그랬던 태자가 단번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원! 이원!
태자는 더 이상 이를 부득 갈 힘도 없었다.
‘내가 네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수천 포병에 화포 200대까지 전부 다 내어줬는데!
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자작으로, 요동 부총독으로 봉해줬는데!
두변 후작을 내려치고 폄훼도 서슴지 않으면서 너를 추켜세워줬는데!
내가 네게 베푼 은혜가 하늘보다 높거늘, 어찌!’
이원의 배신은 태자의 따귀를 올려치는 수준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수로 그의 얼굴을 찍어 내리고, 오장육부를 도려내고 있었다.
정말로 오장육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간 사람은 이연정이었다.
태자가 이원의 능력을 높게 산 건 맞지만, 사적인 감정이 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연정이 이원을 대하는 감정은 그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고, 의자 이문회보다도 더욱 애틋했다. 아홉 살부터 스무 살까지, 이원을 십수 년 동안 직접 키웠으니까.
이원의 성장을 위해서 그를 변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이연정은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원에게 내어주었다.
여진 제국과 국운을 건 대전을 치른다고 했을 때, 태자는 자신의 군대를 이원에게 주었고, 이연정도 시위군의 정예를 이원에게 주었다.
심지어 태자는 영설 공주 산하의 1만 5천 대군까지 이원에게 주었다.
이연정에게 이원은 피 섞인 친손자는 아니지만, 친손자보다 더 친손자 같은 존재였다.
이연정은 두변을 이원만큼 아낀다고, 두변과 이원은 그의 손등, 손바닥 같은 존재라고 말한 적 있다. 이연정도 그 말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애가 더욱 심해지곤 한다. 이연정이 자신의 모든 희망, 그리고 자원을 건 이원을 두변과 동일시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두변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걸 본 이연정은 이원이 뒤처지지 않도록 그를 더욱 열심히 밀어줬다. 이원이 두변을 이길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연정의 모든 노력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연정은 모든 자원을 투자해서 희대의 배신자, 배은망덕한 늑대를 키워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