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62화 (462/648)

462장: 죽음보다 더한 슬픔

이연정은 태자와 달리 피를 토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사실이 황당하고 꿈만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아도, 이연정은 이원이 이토록 잔인한 게 믿기지 않았다.

십수 년을 키운 자식인데! 친자식이 아니어도 친자식보다 더욱 아끼는 손자인데!

이연정은 두변이 은연중에 깨우쳐 주며 했던 말이 떠올라 더 괴로웠다.

‘이원 혼자에게 너무 많은 자원이 집중되어선 안 됩니다. 영설 공주께도 조금 나눠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연정은 그때 두변에게 양심도 없다고, 질투에 눈이 멀었고, 이원이 공로를 세우는 걸 시기한다고 호통쳤다.

그때 자신은 얼마나 노골적이었나! 얼마나 속이 좁았던가.

이연정은 심장 깊은 곳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지고, 온몸도 점차 차가워지면서 눈앞이 컴컴해졌다.

결국 이연정은 깊이 심호흡한 뒤, 태자를 찾아갔다.

“전하, 제가 요동에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태자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힘없이 손짓했다.

“가보게, 가봐.”

이연정은 아무도 데려가지 않고, 혼자서 말을 타고 경성을 떠나 요동으로 향했다.

그는 눈을 맞으면서 쉬지 않고 빙판길을 질주했다.

이연정은 추위도 느끼지 못하고, 주위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길을 재촉했다.

이연정이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오직 한가지였다.

왜!

이원에게 왜를 묻는 것.

산해관을 지나자, 아비규환인 난세의 광경이 펼쳐졌다.

요동 지역이 여진 제국과 대치한 지 꽤 오래된 터라, 관내만큼 백성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사는 백성들이 꽤 있었다.

대녕 제국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이 황급히 짐을 챙겨서 도망치고 있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땅 위로 가족들을 이끌고 울면서 집을 떠나는 백성들이 가득했다.

40만 대군을 잃은 대녕 제국은 피난 가는 백성들을 보호해줄 병력도 없었다.

오히려 도적이나 무뢰배들이 피난길에 오른 백성들을 상대로 강도질을 했고, 패잔병들이 약탈과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이곳은 인간계의 지옥이 될 것이었다.

‘죄업이다!

희대의 죄업이야. 이건 이원의 죄업이기도, 나의 죄업이기도 하다!’

이연정은 뒤늦게 밀려오는 끝없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연정은 겉으로는 포효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끊임없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는 미친 듯이 질주했다.

경성에서 심양까지 족히 2천 리가 넘었지만, 이연정은 이틀 만에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성 밖.

며칠 내내 내린 눈이 전장을 완전히 뒤덮었지만, 이연정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끔찍한 경관이었다.

10만 개의 잘린 머리로 쌓아 올린 산!

잘린 머리들은 매서운 요동 바람에 꽁꽁 얼어서 더욱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대녕 제국의 병장들이자, 제국 북방의 마지막 힘이었던 이들이 지금 흉물스럽게 얼어붙은 인두산이 되어버렸다.

심양의 성벽 위에는 새로운 용기(龍旗)가 걸려 있었고, 여진 제국은 이미 대금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큼지막하게 ‘금(金)’ 글자가 쓰인 용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게다가 화포 200대가 전부 성벽 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원이 투항하면서 대녕 제국의 화포 200대까지 전부 대금 제국에 바친 것이다.

‘이런 염치도 없는 놈! 천벌 받아 죽을 놈!’

이연정이 내력을 동원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원! 나오너라!”

대종사급 강자의 외침은 꼭 벼락과도 같았다.

하지만 성벽 너머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벽 위에 있던 여진 제국의 병사들은 이연정을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화살을 겨누었다.

“이원! 나오너라.”

“이원! 당장 나오지 못할까!”

이연정이 이원을 세 번씩이나 불렀을 때, 드디어 이원이 성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원은 여진 제국의 공작 복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여진족처럼 동전 하나 정도 굵기의 변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머리카락은 죄다 밀었다.

이원이 성벽 위에서 연로한 이연정을 내려다보는데,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연정 공공,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연정도 성벽 위에 서 있는 이원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익숙한 얼굴인가.

어렸을 때부터 키운 자식이자, 온갖 정성과 희망을 모두 쏟아부은 얼굴이었다. 이원은 이연정의 손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지금의 옷이며, 변발이며, 표정까지, 참으로 낯설기만 했다.

“왜지?”

이연정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왜요?”

이원이 되물었다.

“대녕 제국이 네게 하늘 같은 은혜를 베풀었거늘, 태자 전하께서 네게 태산과도 같은 은덕을 베푸셨는데, 그리고 내가 너를…….”

이연정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변절한 것이냐?”

이연정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유는 오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원이 내놓은 답이 아무리 황당하고 염치없더라도 그 답을 직접 들어야 했다.

이원이 만약 죽는 게 두려워서, 두변이 미워서라고 대답해도 그의 답을 인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금 제국의 이원 공작은 허울 좋은 변명도, 상투적인 말도 늘어놓지 않았다.

이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연정 공공, 우리 대금 황제 폐하께 필요한 환관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공공도 그만 배암투명(背暗投明: 어둠을 등지고 밝은 데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잘못된 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감.)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 분명히 공공을 대총관으로 임명해주실 겁니다. 우리 대금 제국 황제께서는 지혜롭고 용맹하셔서, 썩어 문드러진 대녕 제국처럼 환관이 정사를 다스리는 걸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이곳에는 동창이니 어마감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연정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으아아악!”

이연정이 고개를 치켜들고 포효하더니, 맹호처럼 맹렬한 기세로 성벽을 치고 올라갔다.

“금수보다도 못한 놈! 내 손으로 네놈을 죽여주마!”

이원이 화들짝 놀랐고, 성벽 위에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이연정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빽빽한 화살들은 이연정의 근처에 다가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십여 미터 높이의 성벽은 이연정을 막기엔 턱없이 낮았고, 그는 순식간에 성벽 위까지 올라갔다.

이연정이 체내의 현기 내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뒤, 이원을 향해 내리쳤다.

콰광!

화약이라도 폭발한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엄청난 충격파가 성벽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주위의 수십 명 병사가 허공으로 튕겨 나갔고, 화포 한 대가 뒤집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연정은 이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대신 이연정이 뒤로 튕겨 나가면서 피를 토했다.

성벽 위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여진 제국의 대한이었던, 곧 황제로 즉위할 대금 제국의 황제 금태극이었다. 그는 대종사 이연정이 온 힘을 쏟아 쏘아낸 장파를 막아냈다.

이연정은 피를 토하면서 날아갔지만, 금태극과 이원은 멀쩡했다. 금태극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놀랍게도 이연정조차 대적하지 못할 만큼 강력했다.

이연정은 성벽 아래 떨어지면서 또 한 번 피를 토해냈고, 이어 황급히 후퇴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이원을 죽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몹쓸 놈, 잊지 말거라. 우리 대녕 제국에는 아직 두변 후작이 있다는 것을! 네놈이 저지른 죄악은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연정이 격노하면서 소리쳤다.

“하하하, 이연정 공공. 이제야 두변을 찾으시는 겁니까. 지난번엔 안 그러셨잖아요. 행여나 두변이 공을 세울까 봐 요동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게 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의 몇만 대군까지 후방으로 배치했지요.”

이원이 웃으면서 말하자, 이연정은 죽기보다도 고통스러웠고, 자신의 그릇됐던 마음이 죽기보다 후회됐다.

이원이 이어서 말했다.

“우리 대금 제국에서 포로를 20만 명 포획했습니다. 원등 공작도, 난오 공작도 투항했고요. 대금 제국의 웅사(雄師)가 백만 명이나 있는데, 두변이 북쪽에서 가지고 있는 병력이 고작 5만이지요? 두변이 무슨 능력으로 이 국면을 뒤집을 수 있을까요?”

이원이 말한 웅사 백만은 당연히 듣기에 좋은 말일 뿐, 정말로 백만 병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50만 병력은 있으니, 명조 말 때의 만청 제국보다는 훨씬 더 강했다.

“이연정 공공, 돌아가서 두변에게 전해주십시오. 서남에서 공로를 좀 세웠다고 그렇게 잘난 척할 때가 아니라고요. 여여해와 우리 대금 제국의 황제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대염 왕국은 대금 제국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서남에 숨어서 소꿉놀이나 하든지, 아니면 요동으로 쳐들어와서 제게 목이 잘리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저는 두변의 머리를 잘라 대금 황제 폐하께 요강으로 바칠 것이고, 그자의 다리뼈로 폐하의 지팡이를 만들어 드리고, 그의 팔뼈는 황제 폐하께 붓대로 바치고, 그의 살을 도려내어 황제 폐하께서 키우시는 짐승에게 먹일 것입니다.”

이연정이 입가에 흘린 피를 닦아내고는 마지막으로 이원을 한 번 쳐다본 뒤, 경공을 이용해서 자리를 떠났다.

모든 사람이 금태극을 쳐다보는데, 금태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이연정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대녕 제국의 40만 대군이 전멸한 뒤, 대금 제국은 완전히 파죽지세로 며칠 만에 개주위, 해주위, 복주위, 금주위를 함락시켰다.

영설 공주는 심양 전장을 떠난 뒤, 잔군을 포섭해서 광녕성(廣寧城)으로 들어갔고, 곧바로 성 내 군대의 지휘권을 빼앗아서 대금 제국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선을 만들고자 했다.

완안영도와 이원은 25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지역의 최후 요충지인 광녕성으로 향했다.

영설 공주가 끌어모은 잔군과 광녕 주둔군, 그리고 몇천 기마병까지 합해서 총 6만 대군이 광녕성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쌍방의 병력 차이가 극심한 데다 영설 공주가 이끄는 병사들 대부분이 패전 후 모인 잔군인지라 사기가 워낙에 낮았다.

결국 광녕성은 고작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또 이틀이 지나자, 광녕 우위가 함락되었고, 또 이틀 뒤에는 광녕 중위까지 함락되었다.

이렇게, 대녕 제국은 요동 지역에 있던 마지막 요충지까지 완전히 함락되고 말았다.

이는 대녕 제국은 완전히 요동을 잃어버렸고, 대금 제국이 요동의 천리강산을 차지했음을 의미했다.

영설 공주는 1만 명의 잔군을 이끌고 계속해서 남하했다.

연산역(連山驛)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고, 영원위로 들어갔으나 이곳의 주둔군 대부분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도망친 후였다.

이영도와 이원의 25만 대군이 곧장 영설 공주의 뒤를 추격했고, 영원위도 몇 시진만에 함락되었다.

대금 제국의 군대는 완전히 파죽지세의 형국이었다.

영설 공주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후퇴하기가 어려워, 결국 마지막 방어선인 산해관으로 도망쳤다.

이곳은 요동과 경성의 유일한 가림막으로, 산해관까지 함락된다면 대금 제국의 대군은 곧바로 경성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다.

대녕 제국이 40만 대군을 전부 요동으로 보냈던 터라, 현재 경성에 남은 주둔군은 5만 명에 불과했다.

산해관에는 두변의 3만 대군이 있을 뿐이었다. 부홍빙이 이곳에서 절세 지하성의 무사 3만 명을 이끌고 있었다.

영설 공주가 이끄는 1만 명의 잔군 중, 그녀의 직속 부대는 몇백 기마병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두변의 제3군단 소속 병사들이었다.

요동이 전패했다는 것을 들은 부홍빙 장군은 즉시 지원군 2만 명을 북쪽으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광녕위 전투, 영원위 전투를 거친 뒤, 두변의 2만 대군은 1만 명 남짓 줄어들었다.

영설 공주는 대녕 제국의 장공주이기도 하지만, 두변의 부인이자 제3군단의 주모(主母)인 셈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3군단은 대녕 제국의 다른 잔군과 달리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설 공주와 1만여 병사들은 결국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지금 이들은 영원위 남부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서 대금 제국의 십여 만 대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