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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무제-463화 (463/648)

463장: 면목이 없어

며칠 동안 천 리 길을 달려온 영설 공주의 병사들은 연달아 네 번의 전투를 거친 터라, 식량도 바닥났고 체력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1만여 병사들은 바닥의 눈을 주워서 입에 넣기도 했다. 식량이 떨어진 지 벌써 이틀째였다.

하지만 1만여 병사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조용히 바닥에 앉아서 눈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원의 군대와 이영도의 군대가 영설 공주와 1만여 병사들을 몇 겹으로 에워쌌고, 6방짜리 화포 30대까지 끌고 왔다.

이제 대금 제국이 명령을 한 번만 내리면, 영설 공주와 제3군단 병사들은 한두 시진 내에 전멸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대녕 제국의 공주가 대녕 제국의 희대의 배신자 두 명에게 포위당했으니.

이원이 십여 명 고수의 호위를 받으며 대열에서 벗어났다.

“공주 전하! 투항하시지요. 어차피 두변도 환관이니, 두변과 혼인한 것도 거짓인 겁니다.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잖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투항하고 완안영도 친왕과 혼례를 올리면, 예전의 못다 한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여인이 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사내구실도 못 하는 두변과 함께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겁니다.

물론, 지금 완안영도 친왕 전하께서는 적복진이 이미 있으니, 공주 전하께서는 측복진이 되어야겠습니다.

고민할 시간을 두 시진 드리겠습니다. 두 시진이 지나면, 우린 화포와 화살을 일제히 쏘아서 공주 전하의 군대를 전멸시킬 것입니다.

공주 전하, 딱 두 시진입니다!”

영설 공주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대녕 제국에는 전사할 장공주만 있을 뿐, 투항할 장공주는 없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묵묵히 눈을 입속으로 쑤셔 넣는, 굶주림과 피곤이 극도에 달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전부 두변의 군대로, 산해관에서 주모인 자신을 구하러 온 지원군이었다.

영설 공주가 다시 말했다.

“대녕 제국에는 전사할 진서 후작 부인만 있을 뿐, 투항할 진서 후작 부인은 없다.”

영설 공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읊조렸다.

‘부군,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정말로 기뻐요. 듣자 하니 과연 사내다운 모습을 되찾았다고요.

하지만 정말 아쉽게 되었네요. 내가 당신을 위해 자식을 낳아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네요.’

같은 시각.

요동 지역 어느 해역의 심해.

거대한 문어 괴수가 모든 촉수를 펼치자, 두변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

두변이 포효하자 몸 안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엄청난 힘이 솟구쳤다.

멸룡결의 힘이었다.

동시에 해저 바닥에 균열이 생기더니, 해저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는 거센 파도와 해일이 휘몰아쳤다.

멸룡결, 즉 천지의 힘을 일으키는 항룡십팔장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심양전에서 처참한 패배를 겪고, 40만 대군이 전멸한 대녕 제국에는 하루가 멀다고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거의 이틀이나 사흘에 하나꼴로 성이 하나씩 함락되었고, 대금 제국과 산해관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경성의 백성들은 대녕 제국이 멸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잃었고, 평온함도 잃은 지 오래였다. 지금 경성에는 식량이 부족하지 않지만, 벌써 피난길에 오른 백성들이 수두룩했다.

만천하에 위엄을 떨치던 이원 장군이 배신했고, 건로의 병사들이 전부 짐승처럼 닥치는 대로 빼앗고, 보이는 대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

온 경성의 인심이 순식간에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궁 안.

내각과 문무백관도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악몽 같은 소식이 태자를 쓰러트리고 또 쓰러트렸지만, 태자는 하루 만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병상에서 일어났다.

태자는 용교의 옆의 의자에 앉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각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전하, 어서 지의를 내려주시옵소서! 진서후 두변 대인을 경성으로 들여서 황실을 호위하게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진서후 두변이 황실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태자는 입도 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죄기소(罪己詔)를 내리고 싶었지만, 황제가 아니니 죄기소를 내릴 권한도 없었다.

백관이 물러난 뒤, 태자는 이연정의 거처로 향했다.

하지만 이연정의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연정은 요동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조용했다. 단지 붉은 의복으로 갈아입은 뒤 종일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스스로에게 치욕감을 주고 있었다.

그가 여인의 붉은 옷을 입었다는 건, 더는 사내가 아니라는 뜻이며, 죽은 뒤에도 선조를 보러 갈 면목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그는 요동에서 돌아온 뒤부터는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태자는 다시 황제가 있는 양생재로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는 여전히 누워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고, 황후와 영종오 대종사가 옆에서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황후가 새빨개진 눈으로 태자를 흘깃 쳐다본 뒤, 곧장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태자, 나를 따라오너라.”

두 사람은 양생재 옆에 있던 작은 방으로 갔다.

“무릎을 꿇거라.”

황후의 단호한 말에 태자가 꼿꼿이 꿇어앉았다.

“내가 여인인지라, 정사에 한 번도 관여한 적도,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하지만 지난번에 두변이 경성에 왔을 때, 하룻밤도 머무르지 않고 급하게 떠났었지. 두변이 편히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이유가 무엇이냐? 나는 심궁에 있는 여인이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알아볼 필요도 없겠더구나. 알아보지 않아도 추측이 되니까.”

태자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두변이 공로를 너무 많이 세워서, 공고진주(功高震主: 공이 높아 군주를 불안하게 하다.)의 지경에 이를까 봐 그런 것이냐? 지난번 밀서의 일로 아직도 마음에 응어리가 남아서 두변이 요동 전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아예 요동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 거냐. 이원을 밀어줘서 두변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냐?”

“예.”

태자가 대답했다.

“제대로 된 능력이 있었다면, 이번 전투에서 승리라도 했어야지. 그런데 지금 이게 다 무엇이냐? 네가 밀어주던 이원이 배신을 했고, 대녕 제국의 마지막 40만 대군까지 잃어버렸다.”

태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신의 죄입니다. 모후, 부황을 대신하여 저를 폐하소서.”

황후가 눈썹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너를 폐하면 누가 제위에 오르고? 금수보다 못한 연왕을 제위에 앉히라는 말이냐? 네 부황께서는 아사할 상황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셨다. 그런데 뭐라? 너를 폐해 달라?”

태자가 바닥에 엎드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황후가 말했다.

“문무백관이 두변을 경성으로 불러들여서 황실을 지키게 하라고 하더구나. 네가 직접 두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두변에게 도움을 청하거라.”

“모후, 여진 대군이 산해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산해관이 뚫리면 수십만 대군이 곧장 경성으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두변의 대군은 서남에 있는데,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 두 달이 소요됩니다.”

태자의 말대로 확실히 이미 늦긴 했다.

여진 제국은 대녕 제국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고, 누구보다 빠르게 경성까지 치고 내려올 것이다.

황후가 말했다.

“산해관에는 두변의 군대가 있지 않으냐. 그래도 막지 못한다는 거냐?”

“막지 못할 겁니다. 부홍빙 장군이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데, 장군의 수중에 3만 병력밖에 없습니다. 여진 제국이 남하하기 시작한다면, 분명 40만 대군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올 겁니다. 간신 이원이 배신하면서 화포 200대까지 여진 제국에 넘어간 터라, 산해관은 기껏해야 사나흘 정도 버티다가 함락될 것입니다.”

“경성은? 그나마 경성은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성이지 않으냐.”

“경성에 있는 주둔군은 5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신병이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들에게 사기가 없습니다. 여진 제국의 병사들이 경성까지 치고 온다면, 경성도 열흘 이내에 함락될 것이고, 대부분의 병장과 관리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후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우리 대녕 제국이 이번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 것이구나.”

“아신의 잘못입니다. 아신의 죄입니다.”

태자가 미친 듯이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울부짖었다.

그때 황후가 갑자기 말했다.

“태자, 산해관을 잃게 된다면 곧장 서남으로 향하거라. 여진 대군이 경성을 함락시킨다면, 폐하께서는 군주로서 이곳에서 사직(社稷)하시는 것이니, 우리 영씨의 기개를 지키셨다고 할 수 있다. 너는 문무백관을 대동하지 말고 혼자서 서남으로 가거라. 두변은 착한 아이이니 태자를 잘 보호해줄 것이다. 네가 살아있는 한 대녕 제국은 망국이 아니다.”

태자가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신은 진서 후작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황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경성을 지키지 못하다니. 대녕 제국은 정말로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모자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통곡했다.

대금 제국(여진 제국)의 숙친왕(肅親王) 완안영도는 올해 마흔의 나이에도 여전히 얼굴이 수려했고 깔끔한 수염 덕분에 사람이 더욱 용맹하고 패기 넘쳐 보였다.

완안영도는 정말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완안영도는 이원과 함께 군영 내에서 불을 쬐면서 두 시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왕 전하,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이원의 갑작스런 물음에 완안영도가 대답했다

“내가 그해 왜 배신했는지 묻고 싶은 것이냐? 천윤 황제의 십수만 주력 대군을 전멸시키고, 8만 대군과 함께 여진 제국에 투항한 이유 말이다.”

“예, 그해 대녕 제국의 국면은 오늘날처럼 절망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등 공작의 압박을 겪긴 하셨지만, 완전히 궁지에 빠진 지경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께서는 전하께 하늘과도 같은 은혜를 베푸셨고, 영설 공주와의 혼례까지 약속해주었지 않습니까. 대녕 제국의 황제는 태자와 달리 누군가를 신임하면, 끝까지 믿고 잘 대해주잖습니까.”

이영도의 얼굴에 경련이 살짝 일 뿐, 그는 끝내 이원에게 투항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이영도는 자신의 본명이 완안영도이고, 애초에 그는 여진족 사람이라는 걸, 그는 금태극의 사촌 형제라는 걸, 적절한 시기에 여진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 돌아갔을 뿐, 누군가를 배신한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태극이 그를 숙친왕으로 책봉할 리가 있을까.

천윤 황제는 완안영도를 진심으로 잘 대해줬지만, 그는 자신의 사명을 배반할 수 없었다.

완안영도가 되물었다.

“이원 대인은 왜 배신했지?”

“그야 당연히 대금 황제 폐하의 용맹함과 신무함을 보고, 대금 황제 폐하야말로 진정한 천명의 주인이라 생각해서지요.”

이원은 여전히 이연정에게 했던 허튼소리로 대꾸하고 있었다.

두변이 이연정에게 이원을 몇 살 때 데려왔냐고 물었을 때, 이연정은 이원이 아홉 살 때라고 했었다.

당시 두변의 표정이 무척 복잡했는데, 그는 무언가를 알아챘던 것이다.

두변이 생각하기엔 이원이 스물일곱 살이 아니지만, 정확한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이연정은 이원의 이상한 점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다가, 이원이 배신한 뒤에야 옛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해 이연정이 이원을 데려올 때, 이원은 자신이 아홉 살이라고, 고아라고 말했었다. 당시에 이원의 키가 무척 작았고, 체형이 왜소했던 터라, 정말로 아홉 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이후에 보여진 총명함과 성숙함을 생각해보면, 아홉 살 어린아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이원을 너무 아낀 이연정은 그가 일찍이 지혜를 터득했고, 이대로 자라게 된다면 분명 큰 사람이 될 거라며 기뻐했다.

지금 보아하니, 이원은 배경이 무척 복잡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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