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장: 주군은 신이다!
완안영도는 침묵했다. 그는 이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마디도 진실된 말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완안영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설 공주와 1만여 병사들은 피로가 극에 달했고, 먹은 것도 없다. 우리에게는 대군과 수십 개 화포가 있으니, 분명 적군을 전멸할 수 있겠지. 나는 영원성으로 돌아가서 산해관 전투를 준비하겠다. 이곳은 자네와 색라 공작에게 맡기마.”
대금 제국의 숙친왕 완안영도는 이 말을 남긴 뒤, 곧장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때 이원이 불렀다.
“숙친왕 전하, 영설 공주의 목숨을 살려두는 건 어떻습니까? 한때 전하의 홍안지기(紅顏知己: 남자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 친구)였으니까요.”
“천윤제가 내게 영설 공주와의 혼인을 내리려던 건 맞지만, 그녀는 나의 홍안지기가 아니고, 얼굴도 몇 번 본 적이 없다. 대녕 제국의 공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라.”
완안영도가 떠난 뒤, 키가 크고 마른 중년 사내가 이원을 찾아왔다.
이 사내는 대금 제국의 용맹스러운 일등 장수 색라 공작이었다.
색라 장군은 이원과 말을 섞지 않고, 탁자 위에 놓인 모래시계만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모래가 모두 흘러내리는 순간, 색라 공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설 공주와 1만 잔군을 전멸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영설 공주는 눈밭에 앉아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1만여 병사들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번에 두변이 요동 전투에 5만 병력을 지원했는데, 부홍빙이 주장군이고, 이릉이 부장군이었다. 2만 대군과 함께 북상하여 영설 공주를 지원하러 온 장군은 이릉이었다.
“공주 전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제가 형제들과 함께 길을 뚫어낼 테니, 공주 전하께서는 포위망을 벗어나서 두변 주군과 재회하십시오.”
이릉의 말에 영설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의형,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뒤를 끊어주는 병사들이 있었어요. 나를 위해서 희생하는 병사들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는 거죠. 그런데 또 나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이제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으면 해요. 죽을 거면 같이 죽어요. 나는 그렇게 귀한 존재가 아니에요. 대녕 제국이나 부군 두변에게도 나는 그만큼 중요하고 귀한 존재가 아니고.”
이릉은 공주 전하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서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영설 공주가 애걸하듯이 말했다.
“의형, 제발요. 나를 위한 희생은 하지 말아요. 죽을 거면 다 같이 죽어요.”
이릉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럼,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곧 약속한 두 시진이 지날 것이고, 적들이 바로 발포할 것입니다.”
영설 공주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발포할 시간을 주지 말고 우리가 먼저 공격해요.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장렬하게 죽어야죠.”
영설 공주가 투구를 머리에 썼고 이릉도 그녀를 따라 투구를 장착했다. 두 사람을 본 1만여 병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투구를 썼다.
영설 공주가 검을 뽑자, 이릉도, 1만여 병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우리의 사지가 찢긴다 해도, 선조들을 욕보이지 말아야 한다!”
영설 공주가 소리치고는, 선두에 서서 여진 제국의 10만 대군을 향해 돌진했다. 곧이어 이릉도 영설 공주의 뒤를 바짝 따랐고, 1만여 병사들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여진 제국의 10만 대군을 향해 달려갔다.
돌격 소리가 들리자, 이원과 대금 제국 색라 공작이 화들짝 놀랐다.
이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설마 영설 공주의 1만 잔군이 먼저 공격을 한 건가? 바위라도 쳐보려고? 미쳤군.”
이원과 색라 공작은 막사 밖으로 뛰쳐나와서 영설 공주과 그녀의 잔군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해가 뜬 뒤에 네놈들을 죽여주려고 했는데,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니 그 청을 들어줄 수밖에.”
이원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더니, 색라 공작를 향해 물었다.
“영설 공주는 선녀보다도 아름다우니, 생포해서 대금 제국의 황제 폐하께 바치는 게 어떻겠소?”
색라 공작이 단칼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숙친왕께서 저 여인을 죽이라고 하셨소.”
그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화살을 쏴라. 발포해라!”
슉, 슉, 슉, 슉!
쾅, 쾅, 쾅, 쾅!
영설 공주가 이끄는 1만 잔군과 대금 제국의 대군이 순식간에 한데 엉켰다.
이건 영설 공주와 잔군의 마지막 혈투이니, 대녕 제국 공주로서의 긍지와 영광을 아낌없이 드러낼 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해저 지진이 일면서 거친 해일이 솟구쳤다.
이 해역의 해저는 대지 균열이 일어났던 곳인지라, 이계의 에너지로 가득 차서 지대가 몹시 불안정했다.
두변이 지금 일부러 현기 내력을 낭비하려고 멸룡결을 시전한 건 아니었다.
멸룡결 비급 두루마리에 축적된 힘이 두변의 단전과 근맥을 완전히 개조한 뒤, 마지막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해저에 있던 두변은 해일이 몰아치는 해면을 뚫고 솟구쳐서는 육지로 올라와서 북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그는 군마도 없이 능파미보를 이용해서 빠르게 내달렸다.
두변이 입고 있던 옷은 전부 찢긴 탓에, 그는 지금 맨몸 위로 황금빛 용린이 뒤덮인 채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몸에 딱 맞는 황금색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두변은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려서 겨우 반 시진 만에 2백 리가 넘는 거리를 달려 한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해서 휘날리던 눈발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태양이 뜨면서 햇빛이 두변의 온몸을 내리쬐니, 그의 몸에서 황금 같은 빛이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산 아래의 광활한 평지 위에서는 영설 공주의 1만 잔군이 여진 제국의 십수만 대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녕 제국의 잔군은 용맹했지만, 이건 아주 절망적인 전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싸우다가 전군이 전멸할 게 분명했지만, 병사들은 장렬하게 전장에서 죽고 싶었다.
이때, 두변의 벼락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간적 이원! 일개 도둑 따위가 감히 나의 부인, 나의 군대를 해쳐?”
두변의 목소리는 용음호후처럼 전장 전체를 휘감았다.
절망적인 격전을 펼치고 있던 영설 공주가 저도 모르게 산봉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자신의 부군 두변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변했다.
제 부군이 이렇게 위풍당당하고, 이렇게 건장했었나?
게다가 햇빛을 받은 그의 몸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서, 꼭 황금대제가 환생한 것만 같았다.
이릉과 그의 제3군단 병사들도 두변을 보고 감격스러움이 몰려오고 피가 끓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오셨다!”
“주군께서 돌아오셨다!”
“주군 만세, 만세, 만세!”
이원과 색라 공작은 갑작스러운 병사들의 외침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하마터면 눈이 멀 뻔했다.
두변이 온몸을 황금빛으로 감싼 채 나타나자, 이원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두변이? 이곳에? 지금? 설마 저놈의 뒤로 천군만마가 따라오는 건가?’
이어서 두변이 무서운 기세로 산봉우리에서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원의 심장이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두변은 이미 너무도 많은 기적을 만들어냈기에, 그가 정말로 천군만마를 대동해서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두변의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변이 혼자서 산봉우리에서 뛰어 내려오는 걸 본 이원과 색라 공작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두변, 연극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혼자서 왕자의 귀환인 것처럼, 천군만마를 등에 지고 오는 것처럼 굴더니, 혼자서 뭘 해보겠다는 거야?
네놈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데, 네놈 혼자서 우리 천군만마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하하, 두변 의제! 죽는 것도 이렇게 경박하고 과하게 연출을 하다니, 정말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로군.”
이원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나의 의제 두변이 죽으러 왔구나.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여 드려야지. 1만 병사들은 두변을 공격하여라. 내 아끼는 동생 두변. 내가 1만 명이나 보내줬으니, 넌 죽어서도 명예로울 것이다.”
일순간, 1만의 여진 무사들이 방향을 돌려서 산에 있는 두변을 향해 달려갔다.
이원뿐만 아니라, 여진 병사들도 전부 두변을 미치광이 보듯, 웃음거리 보듯 쳐다보았다.
혼자서 천군만마를 상대하겠다고?
겉으로 보기엔 위풍당당해 보이겠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나.
하지만 이때, 누군가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바람 한 번 불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방에서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더욱 소름 돋는 건, 산 전체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먹구름이 더욱 짙게 몰리고 있었으며, 바람이 점점 더 거세졌다.
쿠오오오!
어디선가 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변의 온몸에서 황금 불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몸에서 나지막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빽빽하고 두껍게 모인 먹구름이 갑자기 거대한 용처럼 바뀌더니 거세게 불어오던 바람이 구풍(颶風: 허리케인)으로 바뀌었다.
두변이 산에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그의 뒤로는 천군만마 대신 쌓인 눈이 점점 거대해지면서 굴러 내려오고 있었다.
눈덩이가 점점 더 커지더니, 꼭 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괴수처럼 산 아래를 향해 돌진했다.
쿠구구궁.
두변은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두변이 서 있던 산의 해발은 1천 미터였는데, 눈덩이는 벌써 수백 미터가 넘는 높이까지 뭉쳐졌다.
두변 몸 안의 멸룡결 힘은 점점 더 강해지면서, 하늘에 있는 흑룡 같은 구풍이 더욱더 거세지고, 곧 산사태가 될 것만 같은 눈덩이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돌진, 돌진, 돌진.
두변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산 아래까지 뛰어 내려와서는 여진 제국 대군과 그대로 충돌했다.
“으아아아!”
두변이 용음을 내뱉으면서 멸룡결의 힘을 내뿜자,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하늘에 있던 흑룡은 구풍을 타고 여진 제국의 병사들을 향해 덮쳐왔다.
두변의 뒤를 따라 내려오던 하늘을 찌를 듯한 눈덩이도 거대한 괴수처럼 여진 제국 대군을 향해 쏟아졌다.
일순간, 여진 제국의 병사들은 구풍에 휘말려서 하늘로 치솟고, 소용돌이 속에서 사지가 찢겨나갔다.
거대한 눈사태는 무수히 많은 여진 제국 병사를 그대로 깔아뭉개버렸다.
만 명을 순식간에 죽인 경천의 일격이었다.
이게 바로 멸룡결이었다.
천지의 힘으로 하늘의 위세를 거스를 수 있는 무공!
이원과 색라 공작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영설 공주도 몸을 흠칫 떨었다.
‘내, 내 부군이 맞나? 갑자기 이렇게 놀랍게 변했다고?’
제3군단의 1만 병사는 더욱 열광하면서 자신이 두변의 병사라는 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우리들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어! 우리의 주군께서 신화를 써내려가고 계신 거야. 우리의 주군은 신이다. 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