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67화 (467/648)

467장: 천윤제의 죽음

황궁 앞에서 말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내시들이 통보하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폐하, 꼭 버티셔야 합니다. 신이 왔습니다.’

‘부황, 꼭 버티세요. 제가 왔어요.’

두변과 영설 공주가 곧장 양성재에 들어갔다.

양성재 안, 황후와 태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병상에 누운 채 눈을 뜨고 있었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듯했다.

영종오 대종사가 황제의 몸에 쉬지 않고 현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두변과 영설 공주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폐하, 신 왔습니다. 신과 영설이 왔습니다.”

두변이 황제의 손을 잡았다.

황제가 퀭해진 두 눈으로 안간힘을 써서 두변과 영설 공주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야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던 것이냐. 두변, 그새 이렇게 키가 컸어?”

영설 공주가 황제의 손을 잡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부황, 두변이 진정한 사내가 되었어요. 제 배 속에 이미 작은 생명이 자리 잡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열 달 뒤엔 부황께서 할아버지가 되실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손자를 꼭 보셔야죠.”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손녀를 보아도 좋지.”

황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행복해 보여서 이 아비는 참 기쁘고 마음이 놓이는구나. 여인에게 큰 행복 중 하나가 바로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찾는 것이겠지.”

황제가 영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모두 물러나고 두변만 남거라.”

황후, 태자, 영설 공주, 영종오 대종사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다가 방에서 물러난 뒤,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두변과 황제 둘만 남았다.

“신법은 어떠하냐?”

“아주 좋습니다. 서남이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모했고, 모든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산해관은 지킬 수 있겠느냐?”

황제가 또 물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소중했다.

“산해관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우린 경성도 잃지 않을 것이고, 대녕 제국도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변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건 두변의 맹세였다.

조금 전엔 경성의 백성들을 향한 맹세였고, 이번엔 황제를 위한 맹세였다.

“그래. 그래.”

황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말했다.

“내가 이제 말을 할 테니 잘 듣거라.”

두변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를 보필할 수 있으면 보필하고, 그럴 수 없다면 네가 그 자리를 대신하거라.”

두변은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두변 앞에서 거짓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유비는 죽기 전, 제갈량에게 자신의 자식을 탁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내 아들을 보필할 수 있다면 보필하고, 그에게 황제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면 승상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려주시오.’

유비의 말이 본의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천윤제는 진심이었다.

“나라가 더 중요하고, 만민이 더 중요하다.”

황제가 두변의 손을 움켜쥐면서 말을 이었다.

두변이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폐하께서 신에게 베푸신 은혜는 태산과도 같고, 신에게 베푸신 정은 부자와도 같습니다. 신은 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컨대, 영생영세 대녕 제국의 강산을 찬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보 같긴. 기억하거라. 나라가 더 중요하고, 만민이 더 중요하다. 나라를 더 중시하고, 만민을 더 중시해라.”

“짐의 외손자, 외손녀를…….”

황제가 중얼거리는데 그 목소리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더 흐려지더니, 두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도 점점 힘이 빠졌다.

“나라가 더 중하고, 만민이 더 중하니라.”

어느 순간, 황제의 중얼거림이 멈추고, 두변의 손을 완전히 놓았다.

황제의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그의 생명의 촛불이 꺼졌다.

대녕 제국 천윤 24년 2월 13일. 천윤 황제 붕어. 향년 52세.

두변은 황제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황제와 마주했던 매 순간, 황제의 다정한 말들, 그리고 황제의 따뜻한 눈빛이 떠올랐다.

천윤제는 두변에게 듣기 싫은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고, 그를 의심하는 말, 또는 그에게 거짓된 말을 한 적 없다.

황제가 죽는 그 순간, 두변의 눈물도 멈췄다.

두변은 야위었지만 평온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신이 맹세컨대, 산해관도, 경성도 함락되지 않을 것이고, 대녕 제국도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변은 황제의 손을 천천히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연 두변은 영설과 황후, 그리고 태자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가셨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영설 공주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혼절하려는 황후를 재빨리 부축했다.

태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였다가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이미 너무 많이 울어서 더 나올 눈물도 없어 보였던 황후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황후는 거칠게 제 손으로 눈을 비비더니 영설에게 말했다.

“나는 울지 않는다. 네 부황께서는 드디어 해탈하신 것이다. 제위에 오르신 뒤로 단 하루도 편히 지내시지를 못했는데, 드디어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신 것이다.”

황후가 자신을 위로하듯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세 사람은 양생재에 들어가서 황제의 사후를 정리했다.

두변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정처 없이 황궁 안을 걸어 다녔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이연정의 거처 앞에 서 있었다.

거처의 문을 열자마자 이곳의 쇠락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이곳을 냉랭하게 방치한 게 아니라, 이연정이 요동에서 돌아온 뒤로 완전히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방문을 여는 순간 두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노인이 가부좌를 튼 자세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연정이었다.

두변이 그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숨을 거둔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몸은 아직 따스했다.

이연정은 요동에서 돌아온 뒤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 지키기로 맹세했던 황제가 살아있었기에 감히 죽지 못했다.

조금 전 드디어 황제가 숨을 거두자, 이연정도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이연정의 시신 앞에 혈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두변, 이 할아비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다시 볼 면목이 없구나.

내게 죄가 있어서 선조들 뵐 면목도, 선황을 뵐 면목도 없다. 내 시신을 불태운 뒤에, 유골을 뒷간에 버려서 내 더러운 이름이 천추에 남게 해다오.

두변, 나를 대신해서 짐승만도 못한 이원 그놈을 죽여다오.’

이연정은 지금도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뜬 눈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이연정의 눈을 자세히 쳐다보던 두변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연정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죽기 전에 이미 눈이 멀어 있었다.

울어서 눈이 먼 게 아니라, 스스로 안구에 피를 쏠리게 해서 자신의 시신경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자신이 눈뜬장님이었음을 스스로 벌한 것이다.

두변은 이연정의 두 눈을 감겨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의조부, 전 조부를 탓한 적 없습니다. 제가 꼭 조부의 바람대로 이원 그 자식을 죽이겠습니다. 제가 산해관을, 경성을 꼭 지켜내서, 대녕 제국이 멸망하지 않도록 막겠습니다. 의조부를 폐하 곁에 안장해드릴 테니, 지하에서도 폐하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두변이 이연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의조부, 편히 가십시오.”

황궁이 온통 창백한 백색이었다.

대신, 환관, 시위, 궁녀들이 모두 흰색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신 등,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선제 천윤의 영구를 앞에 두고, 문무백관이 태자를 향해 일제히 절을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태자가 대녕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선제의 안장이 끝나면,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치르고 새로운 연호를 정할 것이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뒤, 첫 번째 성지가 내려왔다.

“황제가 명하노라. 두변을 진서 공작, 임시 요동 총독으로 임명한다.”

이로써 두변은 대녕 제국 현존 최고 작위를 받게 되었고, 진남공 송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변은 진서와 요동 두 변진의 총독을 겸직하게 되었다. 물론, 두변이 요동 총독 자리에 오래 머무르진 못할 것이다. 북방의 전투가 끝나는 대로 요동 총독직을 사임할 생각이었다.

두변은 자신이 요동 총독직에서 물러날 때,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바로 그의 부인, 영설이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지만, 이쯤이면 예법이 뭔 대수일까.

이어서 새로운 황제가 내린 두 번째 성지는 바로 죄기조(罪己詔)였다.

황제는 세상 사람에게 요동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 건 자신의 탓이라고 선포하며, 자신의 대죄 10조를 열거했다.

그가 말한 죄 중, 가장 중요한 죄가 바로 간특한 이원을 중용한 것이었다.

새로운 황제는 두변과 문무백관 앞에서 1천 자가 넘는 죄기조를 읽었고, 내일 바로 이 죄기조를 천하에 알리겠다고 말했다.

서재 안.

새로운 황제와 두변이 독대했다.

“두변, 여진 제국이 자네의 열 배 병력을 가지고 있소. 내 잘못 때문에 이원이 배신하면서 화포 200대까지 여진 제국의 손에 들어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산해관을 지켜낼 수 있겠소?”

“지킬 수 있습니다.”

두변의 말에 황제가 흠칫 놀랐다.

그는 두변이 ‘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할 줄 알았지, 단도직입적으로 가능하다고 대답할 줄 몰랐다.

그는 두변이 어떻게 이렇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으로 열 배에 달하는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걸까.

황제는 이제는 이원이 여진 제국을 이겼던 전적이 전부 거짓이고 음모였다는 걸 알았다.

여진 제국 군대의 전투력은 여여해의 대염 왕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데, 두변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 제국의 수십만 대군을 이긴다는 건,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 어려운 일 아닌가.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만약 지키지 못할 것 같다면, 모든 걸 희생해가면서 끝까지 지킬 것 없네. 자네가 영설, 모후, 그리고 내 아들을 데리고 서남으로 가게. 나도 군주로서 이곳에 남아 사직하면 되네.”

“신, 지킬 수 있습니다.”

두변이 다시 단호하게 대답한 뒤, 곧바로 작별을 고했다.

“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선제의 영을 지켜야 합니다.”

두변이 곧바로 예를 올리고 몸을 돌리자, 황제가 뒤에서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변,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네.”

두변이 걸음을 떼면서 말했다.

“신 또한 진심입니다.”

그날 밤.

두변은 몇 시진 동안 영당에 꿇어앉아서 천윤제의 영을 기렸고, 이후에는 이연정을 위해서 몇 시진 영구를 지켰다.

동이 틀 무렵, 두변은 정식으로 새 황제와 영설 공주, 태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여진 제국의 수십만 대군이 집결하고 있고, 산해관 전투가 곧 발발할 시간이었다.

경성에 남아서 선제와 이연정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싶었지만, 나라가 제일이라는 일념에 서둘러 길에 올랐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때, 두변은 국운 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야생마를 타고 서둘러 산해관으로 향했다.

두변이 황궁 궁문을 나서자, 황궁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수만 명의 사람이 보였다.

수만 명, 아니, 더 많은 백성들이 황궁 앞으로 몰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상복이 있는 사람들은 상복을, 상복을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석회로 자신의 옷을 하얗게 칠하고 선황의 영을 기렸다.

상복 차림의 백성 몇만 명이 모이자, 황궁 앞은 눈이 내린 것 같은 장관이 펼쳐졌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묵묵히 눈물을 흘리며 선제를 기렸다.

천윤제가 영명한 군주는 아니었다지만, 그가 없었다면 방계 세력이 경성을 봉쇄할 때, 20만, 30만, 심지어 더 많은 백성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경성의 백만 백성은 천윤제가 자신들에게 베풀었던 모든 온정을 기억하고, 그의 인자함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두변은 말에서 내려서는, 선황을 애도하는 백성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몇만 백성이 일제히 두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두변은 이 많은 백성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산해관, 경성은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기필코 이번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고, 대녕 제국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여러분을 위한 저의 맹세입니다.’

두변은 다시 말 등으로 몸을 날리고서 서둘러 갈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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