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장: 미안하지만,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던 다마곤 친왕, 완안영도, 이원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라서 두피가 저릿해졌다.
‘두변 저놈이 어디서 저런 괴물들을 구해온 거지?’
‘이수잖아?’
‘두변이 어디서 저렇게 충성스러운 이수 군단을 구한 거야?’
이원은 눈이 시뻘게져서 두변을 질투했다.
다마곤 친왕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파르르 떨었다.
‘설마 패배하는 건가?’
‘말도 안 돼. 내가 저 간악한 두변 놈에게 진다고?’
‘처음부터 마랑 군단을 내놓지 않은 이유가, 내 대군을 일망타진하려고?’
다마곤 친왕, 완안영도는 산해관에 발이 묶인 수십만 대군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성벽에 몰려있는 여진 병사들은 퇴각하고 싶어도 퇴각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원은 절망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두변은 분명히 졌는데? 어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역전된 거지? 설마 저놈이 또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건가? 왜? 어째서 하늘은 저놈의 편만 드는 거지?’
이원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이었다.
산해관 인근 바다 위.
거대한 군함 한 척이 산해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데, 군함에는 동방 연합 왕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 군함은 다른 동방 연합 왕국의 군함과 달리 함체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고, 화포와 포탄이 기존 것과 사뭇 달랐다.
이건 동방 연합 왕국의 최신식 전투 군함이었다.
방탁의 아들 방검지가 갑판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군께서는 역시 선견지명이시군. 산해관 전투에 이변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두변 저놈이 정말로 황금대제의 비밀 군단을 찾아냈을 줄이야.
두변, 네놈은 지금 북명검파의 추살을 피해서, 산해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것 같아서, 또 한 번 기적을 써낼 것 같아서, 대녕 제국의 구원자가 될 것 같아서 득의양양하지?
개 같은 꿈 깨시지. 소군 전하께서 이미 네놈의 변수를 알아채셔서, 아직 실험 중인 이 최신형 전함으로 네놈을 죽이라고 명하셨지. 넌 끝장이다. 네놈도, 네 군대도, 산해관도 전부 끝장이라고.”
군함이 산해관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천 미터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방검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발포하라!”
콰과광쾅!
수십 대의 함포가 일제히 발포되었고, 수십 발 포탄이 산해관을 향해 날아갔다.
포탄은 땅에 닿는 즉시 폭발했다.
콰과과광.
천지가 뒤흔들릴 정도의 폭발음이 산해관의 하늘을 찢었다.
‘폭발하는 포탄이라니. 개화탄인가? 위력이 저렇게 강력한 개화탄이라고? 동방 연합 왕국의 군사 기술이 또 세계를 선도하는 건가?’
두변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발포하라. 산해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려!”
방검지가 또다시 외쳤다.
또 한 번의 발포, 그리고 또 한 번의 경천동지할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두변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여진 대군이 패배를 앞두고 있을 때, 동방 연합 왕국이 이렇게 강력한 군함을 내세워서 자신을 공격하러 올 줄 몰랐다.
계속 이렇게 포격을 당했다가는 산해관의 성벽이 위태로워진다!
“발포하라.”
방검지가 소리쳤다.
함포가 쉴 새 없이 산해관을 향해 날아갔다.
“두변, 이대로 영원히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라. 동방 연합 왕국의 새로운 포탄 앞에선 네놈은 버러지에 불과해. 산해관은 쑥대밭이 될 것이고, 네놈의 군대도 전멸할 것이다!”
방검지가 소리쳤다.
그런데 이때, 바다 깊은 곳, 대지 균열이 일어난 곳에서 잠을 자고 있던 문어 괴수가 굉음에 놀라서 눈을 떴다.
문어 괴수는 불안함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바로 이 해역의 패주인데, 거대한 무언가가 허락도 없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문어 괴수는 무단 침범한 무언가가 죽기를 자처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몸을 움직이던 문어 괴수는 자신의 주인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걸 느끼고는, 곧바로 몸을 거대하게 부풀렸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 몸집의 문어 괴수가 동방 연합 왕국의 군함, 그리고 두변이 있는 곳을 향해 미친 속도로 헤엄쳐왔다.
개화탄은 유탄(榴彈) 중 하나로, 다른 지구 역사에서 유탄은 꽤 일찍 등장하게 되는데, 실제로 대규모 전투에서 쓰이게 된 건 17세기 말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수유탄 시대를 열었을 무렵부터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아직 17세기 초였다.
두변이 이 세계에 온 뒤, 북유럽의 유경 왕국에서 돌아오는 여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녕 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철갑군함에는 유경 왕국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래서 요새나 항구에 잠시 정박할 때마다 귀빈 대접을 받았고, 각지에 있는 각양각색의 화포, 함포, 요새포, 이동 화포 등을 보게 되었다.
그 많은 화포와 포탄 중에 유탄은 없었다.
그런데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에서 유탄의 일종인 개화탄을 쏘다니.
동방 연합 왕국은 전 세계의 무기 역사를 새로 쓰고, 한계를 돌파하고 있었다.
한계를 돌파한 사람은 아쉽게도 두변의 가장 큰 적으로,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여진 제국의 화포는 개화탄이 아니어서 공성전을 치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탄을 쓰게 된다면, 전쟁의 역사도 새로이 쓰이게 되는 것이다.
소군은 이 세계의 전쟁 방식을 아예 바꿀 작정인 듯했다.
쿠구구궁.
동방 연합 왕국의 전함은 쉴 새 없이 유탄을 발포했고, 한 번 발포할 때마다 경천동지할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다 인근의 산해관 성벽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성벽이 아직 부서지진 않았지만 큼지막하게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일방적으로 포격을 당한다면, 성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개화탄은 병사들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데, 포탄이 한 번 터질 때마다 십여 명의 병사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방검지가 산해관을 내다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두변의 군대가 강한 건 맞지만, 우리의 신규 포탄 앞에서는 힘없이 쓰러지는 고목 같구나. 하하하.
두변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우리 강대한 동방 연합 왕국에선 춤추는 광대일 뿐이다.
두변! 우리의 위력이 이게 다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더 놀라운 걸 보여줄 테니.
지옥 개화탄으로 바꿔라!”
방검지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함포의 포탄을 갈아 끼웠다.
콰과광쾅!
수십 대 화포가 일제히 발포되었다.
발포된 포탄이 천 미터 너머의 산해관 성벽 너머, 성벽 위, 그리고 성벽 아래에 떨어졌다.
콰과과과광!
맹렬하게 쏟아지는 포탄 덕택에 산해관의 지면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포탄이 터지면서 무수히 많은 탄환이 폭풍우처럼 꽃을 피웠고, 포탄이 떨어지는 사방 십여 미터 이내는 전부 죽음의 지대가 되었다.
유산탄은 전장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병기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유산탄은 폭발하는 산탄이고, 일반적인 산탄보다 더욱 멀리 날아갈 수 있고, 폭발하기 때문에 살상력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두변의 병사들은 전부 완전무장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탄에 맞아서 한 무더기씩 쓰러졌다.
바다 인근의 산해관 성벽은 연이은 포탄 공격에 더 견디지 못하고 아예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여진 제국 다마곤 친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소리쳤다.
“바다 쪽 성벽을 공격하라.”
수많은 여진 병사가 구멍이 난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두변의 군대도 서둘러 구멍 난 성벽을 메우려고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두변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분명히 이길 수 있는 전투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등장한 동방 연합 왕국 전함의 포탄 공격 탓에 산해관의 방어선이 깨져버리다니!
이대로 둬선 안 돼. 이렇게 계속 함포를 쏘게 둬선 안 돼!
두변은 속출하는 사상자들을 바라보면서 눈을 부릅떴다.
개화탄만으로 성벽을 부수는 건 한계가 있지만, 이대로 계속 포격 당했다가는 바다 인근의 성벽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진 병사들은 성벽 안으로 득달처럼 밀려 들어올 것이다.
팔조! 조금만 더 빨리 와줘!
두변은 속으로 문어 괴수를 애타게 불렀다.
지금 그 어떤 말로도 방검지가 느끼는 통쾌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두변이 눈꼴사나웠다.
광서 오주부의 연화사 시회에서 두변이 자신의 콧대를 꺾었던 것은 차치하더라도, 서남에서 부상하더니 황당하게도 제국의 후작, 공작이 되지 않았나.
게다가 방검지가 두변을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영설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방검지 자신이야말로 대녕 제국의 혜성이며, 영설 공주는 자신만의 독점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당의 주구 두변, 내가 네놈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포탄의 맛이 어떠하냐? 네가 예전에 위풍당당할 수 있었던 건, 우리 동방 연합 왕국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지. 우리가 나서면, 네놈은 죽은 개보다도 못한 놈이 된다.”
방검지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명령했다.
“계속해서 발포하라. 두변 저놈과 저놈의 군대를 모조리 죽여버려.”
콰과과과광!
수십 대 함포가 또 한 번 일제히 발포되었다.
바로 이때.
철썩, 쾅.
바다 위로 엄청난 파도가 용솟음치면서 거대한 전함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급습이다. 급습이다!”
동방 연합 왕국의 지휘관이 큰소리로 외치자, 전함의 경종 소리가 울렸다.
방검지가 화들짝 놀랐다.
‘적이 어딨어? 왜 난 안 보이는 거야?’
우우우웅.
해수면을 뚫고 바닷속에서 끔찍한 포효가 치솟았다. 이어서 끔찍한 장면이 바다 위에서 펼쳐졌다.
거대한 촉수 하나가 바다 위로 치솟더니 거대한 전함을 단번에 휘감았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문어 괴수가 나타났는데, 모든 촉수에는 이빨이 잔뜩 난 입과 동그란 눈알이 잔뜩 달려있었다.
촤아악.
촉수 하나가 군함의 갑판 위를 쓸어버리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의 몸이 순식간에 으깨져 버렸다.
우지끈.
갑판 위에 설치되어 있던 돛대와 돛이 한 번에 뜯겨 나갔다.
전함은 높이가 굉장히 높은 거대 전함이라서 병사들 대부분은 선실 안에 있었다.
콰직.
문어 괴수의 촉수가 이번엔 갑판 위를 세게 내리쳤다.
갑판 위에 순식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문어 괴수가 촉수를 갑판 아래로 밀어 넣어서 닥치는 대로 휘저었다.
“끄아악.”
“으아아아.”
동방 연합 왕국 병사들의 참혹한 신음이 바다 위에 울려 퍼졌다.
수군이 된 지 몇 년이 된 병사들이지만 이런 광경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이고, 저런 괴수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저 문어 괴수는 촉수를 전부 다 펼치지 않았는데도 전함보다 훨씬 더 크잖아!’
전함 위는 일순간 아비규환이 되었지만, 병사들은 도망치고 싶어도 바다 외에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 사이 문어 괴수는 촉수에 난 수많은 입으로 병사들을 으적으적 집어삼켰다.
방계 고수 십여 명이 문어 괴수의 촉수 하나와 대치했다.
샥, 샥, 서걱.
고수들이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들의 검은 문어 괴수의 촉수를 자를 수 있었지만, 고작해야 1척의 깊이였다. 촉수 하나만 해도 지름이 몇 미터인데 가당키나 할까.
문어 괴수 팔조는 눈 깜빡할 사이에 전함에 있던 수군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마지막으로 문어 괴수의 눈이 방검지를 응시했다. 방계의 기린아 방검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런 수십 쌍의 눈과 마주치게 된다면, 누구든 모골이 송연해지고 등골에 땀줄기가 흐를 것이다.
“문어 괴수! 우리는 이곳이 네 해역인 줄 모르고 침범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떠나겠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 내 배후에는 북명검파와 동방 연합 왕국이 있다. 동방 세계의 패주들이지. 우리를 살려서 보내준다면, 네가 우리 전함을 망가트린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동방 연합 왕국과 북명검파가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문어 괴수는 수많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검지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우리를 살려서 보내주기만 하면, 내가 엄청난 보답을 해주마. 아, 1천 근이 넘는 정석을 줄게. 너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 말이다.”
문어 괴수가 정신력으로 화답했다.
“첫째, 내 영지는 이곳이 아니다. 내 영지는 이곳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둘째, 너희가 내 영지에 침범했다고 해도, 너희를 살려서 보내줄 수 있었다.
셋째, 내가 너희를 처치하는 건, 너희가 내 주인의 적이기 때문이다.”
문어 괴수는 오래 산 만큼 지능이 있는 이수였다.
방검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문어 괴수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냐?”
“황금대제다.”
“황금대제? 황금대제는 이미 300년 전에 죽었는데?”
“아니, 황금대제께서 돌아오셨다. 이번 생은 두변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하셨지.”
방검지는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에라이 X발!”
방검지는 하늘의 불공평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 천도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 왜? 왜 하필 또 그놈입니까.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은 왜 다 두변이 갖는 거냐고요. 이렇게 강한 문어 괴수도 두변을 주인으로 섬긴다고요?’
방검지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문어 괴수, 두변을 포기해라. 네가 두변의 전투 괴수가 될 필요가 뭐냐. 우리가 더 많은 걸 줄 수 있다.”
문어 괴수가 당당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