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장: 피를 토한 금태극 一
황궁 안.
영종오 대종사가 황궁의 고수 백 명을 이끌고 황자 세 명을 보필하며 황궁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영덕제가 산해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영종오에게 말했다.
“서두르세요. 더 늦었다가는 때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이때, 환관 한 명이 잰걸음으로 황궁 안으로 들어왔고, 환관의 뒤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영설 공주의 친병이 따라왔다.
친병이 영덕제 앞으로 달려가더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두변 공작께서 긴급 군보를 보내셨습니다.”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버, 벌써 함락된 것이냐?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영설 공주의 친병이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산해관 대첩, 두변 공작께서 대승을 거두시고, 20만 적군을 무찌르셨습니다. 여진 제군이 대패했습니다.”
“뭐라?”
영덕제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쓰러질 뻔했다.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을 감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 심양 대전에서 패배했을 때, 영덕제는 아직 태자의 신분이었다. 심양전 패배 소식을 들었을 때도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산해관 대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반응은 똑같았다. 마치 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처럼, 신체의 균형 유지 장치가 잠시 꺼진 것처럼.
다행히도 영덕제는 피를 토하진 않았다.
이제 열한 살이 된 황장자가 말했다.
“부황, 그래도 우리가 서남으로 떠나야 합니까? 아신은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부황과 모후 옆에 있고 싶어요.”
“갈 필요 없다. 이곳에 남아도 된다.”
영덕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선조께서 우리를 보우해주시는구나. 진서 공작이 이리도 휘황찬란한 대승을 거두다니. 어서, 어서 이 소식을 제국 전체에 널리 퍼트리거라.”
영덕제는 황궁의 불당(佛堂)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 놀랍고 기쁜 소식을 얼른 황태후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선황이 붕어한 뒤, 태후는 매일 불당에서 염불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황태후는 매일 두변의 산해관 대전을 위해, 대녕 제국의 강산을 위해, 그녀의 아들이자 황제인 영덕을 위해, 딸 영설을 위해 염불을 외웠다.
불당 주위엔 인적이 드물었다.
영덕제는 걸음을 늦추고 숨을 고르면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아예 걸음을 멈추고, 흥분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두변이 이겼다라. 이번에도 승리를 거뒀군.’
영덕제가 두변의 승리를 기뻐하는 건 마땅했다. 두변 덕분에 대녕 제국은 망국할 일이 없고, 경성을 잃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덕제의 지금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영덕제를 포함한 그 누구도 두변이 이번 대전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누가 봐도 두변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덕제가 믿었던 대녕 제국의 40만 대군이 여진 제국의 20만 대군과 맞서 싸웠는데, 40만 대군이 전멸했지 않은가.
그런데 두변의 4만 군대가 여진 제국의 30만 대군을 이겼다?
사람들이 영덕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영덕제가 얼마나 무능하다고 생각할까?
아니, 사실 영덕제가 속으로는 두변이 지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는 망한 나라의 군주가 되고 싶진 않았다.
영덕제는 정말로 경성에서 사직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천하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사직을 결심했던 건데, 이젠 그 기회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산해관 대전은 대녕 제국의 생사를 결정하는 운명의 대전이었다.
두변이 이 대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건, 두변이 무너져가는 하늘을 들어 올린 것으로,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두변은 이미 공이 너무 높아 군주를 압도하는 수준까지 넘어섰다.
하지만 어쨌든 운명의 대전에서 이기긴 했으니, 우선은 대녕 제국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에 기뻐하기로 했다.
영덕제는 길게 한숨을 내뱉은 뒤, 한결 정리된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불당 앞에 도착한 영덕제가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모후. 산해관 대첩, 두변 공작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안에서 들려오던 목탁 소리가 멈췄다.
황태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했다.
“보살님이 보우하셨습니다. 하늘님이 보우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폐하, 들으셨습니까? 두변이 해냈습니다. 두변이 폐하께 맹세했던 것을 해냈습니다.”
경성의 백성들은 처음엔 산해관 대첩 소식을 믿지 않았다.
방계 세력도 마찬가지여서, 이 소식을 믿지 못하고는 도리어 더욱 신명나게 참신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가짜요. 다 가짜 소식이에요.”
“두변은 이미 죽었대요. 몸이 다섯 개로 절단났다니깐?”
“산해관 대첩? 말도 안 되는 소리!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한이 있어도 두변이 승리했을 리 있겠소? 이건 다 여진 제국의 음모요. 두변이 이미 이겼다는 소식을 퍼트려야 경성의 백성들이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옳지. 이건 다 음모지. 두변의 음모요. 여진 친왕이 투항한 두변에게 경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대요.”
하지만 방계의 밀정들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도,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었다.
영설 공주의 친병이 대첩 소식을 알린 뒤, 곧바로 여진 제국 병사들의 머리가 실린 마차가 한 대, 또 한 대 경성으로 들어왔다.
마차에 실린 머리는 전부 변발을 하고 있었고, 딱 봐도 여진족이라는 게 보였다. 마차 행렬은 끝도 없이 경성으로 들어왔고, 어림잡아도 최소 10만 개 정도는 되어 보였다.
“산해관 대첩에서 진서공께서 적군을 20만 명이나 죽이셨는데, 지금까지 운반해온 건 그 절반에 달하는 수급입니다. 공작 대인께서 백성들에게 이들의 머리를 구경도 시켜줄 겸, 경성에 있는 간자들이 유언비어를 만들고 난동을 피울까 봐 여진 제국 병사들의 머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경성에 있는 백성들은 마음 놓고 편히 지내시면 됩니다. 평소처럼 장사하고, 생산하고, 경영하고, 안락한 생활을 되찾으십시오. 유언비어는 일절 무시하시고요.
두변 공작께서 또 말씀하셨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공작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벌하여 여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경성의 백성들은 그제야 산해관 대첩이 승리했음을 믿게 되었다.
경성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뒤이어 대녕 제국의 북방에서도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변 대인, 공후만대!”
“두변 대인께서는 인간계에 내려오신 신이시다.”
“두변 공작 만세! 대녕 제국 만세!”
무수히 많은 백성이 환호했다.
경성은 연이어 며칠 동안 새해를 맞이하는 것처럼 성대하게 위대한 승리를 경축했다.
두변은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수확한 걸 확인하고 있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신식 전함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변은 전함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신식 전함은 돛을 쓰는 방식이지만, 전함 내부에서 나선장(螺旋槳: 배의 스크루. 비행기의 프로펠러)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 걸까?
이 신식 전함은 아직 반제품이거나 실패한 시험품일 뿐이겠지만, 나선장이 있다는 건, 동방 연합 왕국이 돛이 아닌 증기기관 동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방 연합 왕국은 이미 대규모로 증기기관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증기기관을 전함에 쓰지 않은 건, 동방 연합 왕국이 유경 왕국의 신비한 핵심 동력을 갈망했기 때문이고, 한 가지 더, 자신들의 기술력을 완전히 노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변은 동방 연합 왕국이 이미 증기기관의 철갑 전함을 개발해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전함에서 얻은 화포와 유탄을 보았을 때, 동방 연합 왕국은 이미 고미산(苦味酸: 피크린산) 폭약을 개발해냈고, 후당포(後膛炮: 뒤에서 장전하는 방식의 포탄)를 개발 중인 것으로 보였다.
후당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장에서 쓰였는데, 기밀성(氣密性: 공기나 가스 등의 기체가 통하지 않는 성질) 문제 때문에 아직도 전당포(前膛炮)를 많이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장통(長桶) 포탄이 보편화 되면, 아마 모든 포탄은 후당포식으로 바뀔 것이다.
장통 포탄을 쓰게 되면, 발포할 때마다 포구에 포탄을 쑤셔 넣지 않아도 되고, 장전 탄환 안에 탄약을 넣어 두고 연속으로 쓰면 되기 때문이다.
장통 포탄이 출현한다는 건, 머지않아 강선포(鋼線砲)가 개발될 거란 뜻이기도 했다.
다른 지구에서는 19세기 중반이 되고 나서야 대규모로 강선포를 사용했다.
강선 유탄포? 고미산 폭약?
두변은 이 두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 방진.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사람이지?
다른 지구의 무기 개발 속도보다 무려 100년이나 빠르잖아!
동방 연합 왕국이 강선 유탄포, 고미산 폭약을 개발해서 대규모로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이들은 이제 해상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적을 압살할 수 있다는 걸 뜻한다.
동방 연합 왕국은 다른 나라보다 족히 수십 년을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제 유경 왕국의 철갑 전함도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전함 두 대가 몇천 발의 포탄을 발사하고도 멀쩡하게 항구로 돌아오는 역사는 다시 없을 것이다.
강선 유탄포는 현존하는 다른 포탄보다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고 파괴력은 열 배는 더 강하다.
원래 전함 한 대가 감당할 수 있는 실심 포탄의 수는 몇백 발인데, 고미산 폭약으로 만들어진 유탄에 맞으면, 아마 열 발도 못 맞고 침몰할 것이다.
강선 유탄포, 증기기관 동력, 고미산 폭약.
이 세 개가 합해지면, 이 지구는 새로운 역사를 펼치게 될 것이다.
동방 연합 왕국의 소군은 이 세계의 패주가 되려는 모양이로구나!
동방 연합 왕국이 아직 증기기관 전함이나, 강선 유탄포, 고미산 폭약을 대량으로 생산하지 못하지만, 아마 이것들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중요 단계에 이르렀을 것이다.
만에 하나 동방 연합 왕국이 이 모든 걸 실전에 대량 투입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성화교 세계와 서방 세계는 전멸할 것이다.
물론 산해관 대전에서 두변이 얻은 건 많았다.
이번에 획득한 길쭉한 강선포 90대를 쳐다보던 두변이 물었다.
“우리의 12방 화포와 비교했을 때, 이 화포가 더 길긴 한데, 무게는 어떤가요?”
부홍빙이 대답했다.
“더 가볍습니다. 심지어 포신도 얇은 편이고, 신비한 금속을 대량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 길쭉한 장통 화포는 더 이상 12방 화포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포탄은 얼마나 있고?”
“335발 있습니다.”
부홍빙이 대답했다.
이 정도 숫자는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방검지가 이미 미친 듯이 발포한 걸 고려하면, 이 전함에 총 500발 포탄이 실려 왔을 것이다.
전함 하나에 포탄을 500발만 싣는 건 너무 적은 양이었다. 동방 연합 왕국이 아직 대규모 장착을 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동방 연합 왕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대하고, 앞서 있다. 북방의 전투를 얼른 마무리하고 서둘러 서남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들의 기술력을 따라잡지 못하면, 동방 연합 왕국이 칼을 갈고 우리에게 달려들 땐 정말 끝장날 것이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군대를 정비하라. 최단 기간 내에 여진 제국을 멸망시킨다!”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남경성.
전 내각 수보, 대녕 제국 방계 세력의 지도자 방탁이 악몽 같은 비보를 두 개나 연달아서 듣게 되었다.
첫 번째 소식은 두변의 산해관 대첩이었다.
수하가 들고 온 상자를 여는 순간, 아들의 머리통과 가랑이 밑의 그 물건이 들어 있었다.
아들은 죽기 직전의 공포가 여전히 느껴지기라도 하듯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머리가 잘려 있었다.
방탁은 제 아들의 생생한 얼굴과 잘린 남근을 쳐다보면서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다마곤, 완안영도는 등신들이냐?
무려 30만 대군이다. 30만 대군이 두변의 4만 대군을 못 이겨?
동방 연합 왕국의 신식 전함이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신식 화포도 엄청나다면서? 그런데 어째서 졌다는 것이냐!
두변 그놈이 우리를 어떻게 이겨. 그놈이 신선이냐? 그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제의 아들이라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