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장: 종주의 부인
이원은 밑에 새까맣게 깔린 마혈 무사들의 기세에 압도되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갑옷이 도착했는데, 튼튼하고 깨끗한 곤륜노 갑옷은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것으로 절세 지하성 갑옷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깡, 깡, 깡, 깡.
한 무사가 검을 들고 마혈 무사의 갑옷에 대고 수차례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갑옷 위에는 아주 얕게 흠이 나는 게 전부였다.
마액 등으로 개조된 마혈 무사들은 전투력이 이미 일 당 십의 수준이었지만, 이 갑옷을 입은 뒤에는 더 놀라운 전투력을 과시할 것이다.
이런 마혈 무사가 족히 5천 명이나 있으니!
완전무장한 마혈 무사가 광장을 가득 메운 광경은 흡사 10만 대군이 모인 것만 같았다.
이원이 말했다.
“경축드리옵니다, 폐하. 두변은 지금쯤 승리에 눈이 멀어서 폐하께 이런 막강한 마혈 군단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도 못할 겁니다. 동방 연합 왕국이 지원해준 화포 100대까지 더해졌으니, 이번 전투는 싸우기도 전에 결말이 정해진 겁니다.”
원등 공작도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경축드리옵니다, 폐하. 두변 그놈은 필시 죽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천하를 호령하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고, 대녕 제국의 멸망 또한 머지않았습니다.”
투항한 난오 공작도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경축드리옵니다, 폐하. 심양전은 두변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놈의 전군이 전멸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금태극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두변. 네 운명을 결정할 순간이, 대금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순간이 드디어 왔구나!’
야심한 새벽.
두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불 안에 나체의 여인이 숨어 있는데 그 매혹적인 향이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이 여인은 마성의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매끈하고, 매혹적이고, 풍만하고, 완벽한 곡선을 가진 여인.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내 몸을 마음껏 탐해요.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줄 테니까.”
여인이 간지럽게 귓속말을 해왔다. 그녀의 입에서 뱉어나오는 모든 숨은 꼭 춘약처럼 강렬했다.
“나는 내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게 다예요. 내 남편 영도현은 이 일을 모를 거예요. 나도 절세 지하성의 사람이니 사실상 서른 좀 넘은 나이죠. 하지만 나는 이도진보다 젊고, 예상보다 아름다우니, 당신에게 신선경을 보여줄게요. 예상은 원래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인데, 당신이 예상을 회임시켰잖아요. 그러니 당신은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예요.”
두변이 북명 종주 부인 기염염을 처음 본 것은, 북명검파에서 예상과 혼례를 올린 이튿날이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미에 대한 세계관이 뒤흔들린 정도였다.
기음음은 왕년의 천하제일 미인이었는데, 북명 종주의 부인 기염염은 기음음과 쌍둥이 자매였다. 그만큼 기염염은 북명 제일 미인이라 할 만했다.
예상과 기염염을 용모로만 보았을 땐 같은 급이겠지만, 요염한 정취와 분위기는 기염염이 압도적이었다.
요염하고 성숙한 그녀에게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유혹이 가득했다.
예상 선자가 북명 종주 영도현의 의녀이자 제자라고들 하는데, 그녀의 진정한 사부는 기염염이었다. 예상이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가르친 사람은 기염염이었다.
기염염이 좀더 어렸을 때, 북명검파 내에서는 백화(百花) 선자라고도 불렸다. 예상 선자의 주위에서는 항상 꽃들이 만개한 꽃내음이 나고는 하는데, 이런 향은 백화 선자 기염염에게서 전승된 듯했다.
기염염이 이도진보다 젊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염염은 절세 지하성의 여인인지라, 현실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고 기껏해야 서른 한두 살 정도 돼 보였다.
하지만 이 여인이 가진 독보적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분위기는 서른 정도의 여인이 결코 풍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여인이 자신의 이불 속에 있다?
두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음모다. 이건 음모야. 이 모든 건 다 정신 환각이 틀림없어.’
이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나?
북명검파와 격렬한 투쟁을 끝냈고, 그 투쟁에서 깔끔하게 이겼다. 게다가 북명검파의 명문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북명검파는 분명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오성 방어진을 복구하려고 했겠지만, 모든 게 다 헛수고라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염염이 직접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두변이 생각하는 기염염의 목적은 간단했다.
정신술로 두변을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로 만들던가, 그를 납치해서 오성 방어진을 복구하게 하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두변의 몸속에 어떤 끔찍한 것을 심어두고 두변과 거래를 하려는 것이거나.
어쨌든 두변의 머릿속에는 이 모든 게 다 정신 환각이고 음모였다.
“기염염 부인, 괜한 수고 하지 마시지요.”
두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두변은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느낌은 꼭 문어 괴수의 신경 독소에 쏘였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두변 자신은 백독불침의 몸이 되었는데, 어째서 입이 마비된 걸까?
두변은 곧바로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두변보다 정신 수준이 한참 더 높은 기염염이 정신력을 이용해서 두변을 조종하는 것이다.
예전에 두변이 견사 대사의 동굴에 들어갔을 때나, 천기도주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신력으로 그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두변 머릿속의 꿈속 시스템이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꼭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온몸의 감각은 더욱 민감해졌다.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절대로 그런 거 아니에요.”
여인이 말했다.
여인의 목소리는 사내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매혹적이었고, 그녀가 내뱉는 숨은 꼭 미주를 마시는 것처럼 사람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이 두변에게 닿았고, 이윽고 그녀의 작은 혀가 두변의 귀를 핥았다.
잠시 뒤, 거사가 이뤄졌다.
두변은 여인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 상황은 두변이 상상했던 각본과는 사뭇 달랐다.
이 모든 게 정신 환각이어야 하는데, 음모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게 다 실제로 일어났다.
두변은 살면서 이토록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짜릿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지난밤은 마치 예상 선자, 영설 공주, 이도진 세 사람을 합할 정도로 강렬했다. 어쨌든 영혼이 가출했다 들어올 정도의 환상적인 밤이었다.
사실 양기를 되찾은 이후로는 이런 일로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고, 마음만 먹으면 세 사람이 동시에 덮친다고 해도 끄떡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엔 처참히 패배했고, 마지막에는 혼절해버렸다.
꿈속 시스템은 그가 혼절하는 걸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두변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뜰 무렵이었다.
이불 속에 있던 선녀 같은 여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만의 특유한 향도 거짓말처럼 없어졌고, 꼭 그녀가 나타난 적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게 다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두변의 몸에 남은 감각이 어젯밤은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두변의 몸 곳곳에 있는 신경이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꼭 어제 너무 많은 술을 마셔서 정신이 혼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변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시스템, 어젯밤엔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젯밤에? 무슨 일? 난 모르는데?’
꿈속 시스템이 대답했다.
뭔가 이상해. 뭔가 이상하다고. 내가 귀신을 본 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변은 어제 침상에 누운 뒤로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몸매를 느낄 수만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었지,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진 못한 셈이었다.
사실 그 여인은 자신이 북명 종주 기염염이라고 했지만, 진짜 기염염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두변이 아는 것이라곤 그 여인이 엄청 예뻤고, 마성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뿐.
이건 두변의 시력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정신력이 극도로 강해서 두변의 시야를 기이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두변은 자신을 탐하는 여인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막상 그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다.
정말로 꿈을 꿨다고 할 수밖에.
그때 이도진이 두 손을 열심히 비비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여우 모피로 만든 두봉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이도진은 어젯밤에 당직이었던 터라, 밤새 차가운 눈길 속에서 순찰한 후였다. 벌써 4월이 되었지만, 요동 지역에는 아직도 눈이 내렸고, 기온이 무척 낮았다.
“낭군, 너무 추워요.”
이도진이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얇은 비단 속옷만 남긴 채 두변의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이도진은 두변의 몸을 껴안더니, 이불 속에서 남은 옷을 벗어서 침상 옆으로 던졌다.
“낭군, 지금 일어나지 말고 나랑 딱 반 시진만 같이 더 자 줘요.”
이도진이 애교를 부리면서 말했다.
“나, 행복해요.”
이도진이 뺨을 두변의 가슴에 비비면서 말을 이었다.
“북명검파에서 1년 넘게 감금되어있는 동안, 당신의 품에서 잠드는 게 너무 그리웠어요. 매일 아침 당신의 품에서 깨어나는 상상도 매일 하고요.”
두변이 이도진의 머리에 다정하게 입맞춤했다.
“아 참, 누님의 형제인 이도전은 내 신하가 되었어요.”
“그 사람 얘기하지 말아요. 난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도진이 두변의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말했다.
두변은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
이도진이 이렇게 말하는 건, 이도전과 연을 끊어서가 아니라 두변이 자신의 나이를 연상하는 게 싫어서이리라.
“내가 지금 누님이랑 같이 있으면, 누님이 내 여동생 같아요.”
두변이 일부러 이도진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도진은 금세 쌔근거리면서 두변의 품에서 잠들었다.
서남, 진서 공작부.
이문회는 하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황제와 이연정이 죽은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그는 상복을 1년 내내 입을 작정이었다.
황제와 이연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문회는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렸고, 이레를 앓아누운 뒤에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경성으로 가서 황제 폐하와 의부 이연정의 장례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자기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서남의 내정을 내팽개칠 수 없었다.
이문회는 이곳에서 내정의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진평, 홍하회 회주 여여지, 여여해의 아내 여황 등이 예비 후계자들이었다.
두변에게는 출중한 인재가 많았다.
예를 들면, 절세 지하성의 관리들은 무척 전문적이고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해서 지금은 서남 3성의 하부 조직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1년 전, 서남에 일련의 학원을 개설했다.
정치 학원, 군사 학원, 제련 학원, 연금 학원 등,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벌써 2, 3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고등 인재가 아직 부족해서 여씨 가문에 많은 의지를 해야 했다.
“주군의 대군이 이미 심양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북방의 전쟁도 곧 끝나겠군요. 우리에겐 발전할 수 있는 평화적인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제 개인적인 군사 직감으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할 것 같습니다. 동방 연합 왕국은 주군께서 대녕 제국 전체를 장악하길 원치 않을 테니까요.”
홍하회주 여여지가 자료들을 나눠주면서 말을 이었다.
“동방 연합 왕국이 매년 세계 무역에서 얻는 이익이 2억 냥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거래액이고, 불법 거래는 계산되지 않은 금액이에요.
대녕 제국의 남방의 몇 성에서 생산하는 포목, 자기, 찻잎, 비단, 칠기 등이 매년 동방 연합 왕국에 9천만 이상의 순수익을 안겨줍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철기, 보석, 찬석(다이아몬드), 귈련은 대규모로 대녕 제국의 남부에 판매되고 있고, 매년 3천만 이상을 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방 연합 왕국이 대녕 제국 남방에서 매년 벌어들이는 은자가 1억 냥이 넘는다는 거죠. 대녕 제국은 이미 동방 연합 왕국의 최대 상품 생산지이자 판매지예요. 주군의 관점에 따르면, 대녕 제국 남부는 이미 동방 연합 왕국의 식민지가 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