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장: 신식 화총
여담이 여여지의 말을 이었다.
“만약 주군께서 여진 제국을 없애신다면, 전국 병력을 총동원해서 제국 남부를 하루빨리 수복해야 합니다. 동방 연합 왕국이 강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막강한 함대는 육지로 올라올 수 없죠.
그러니까 동방 연합 왕국은 주군께서 여진 제국을 소멸하는 걸 전력으로 막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만약 여진 제국이 멸망한다면, 우리 서남은 동방 연합 왕국과 바로 대항 구도가 되겠지요. 정치적, 군사적, 해상, 그리고 육지, 뭐든 가리지 않고 전면적으로 대치할 겁니다. 아직 그때가 되진 않았지만, 저는 서남의 각 부에서 미리 고도의 대항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한다면, 동방 연합 왕국과 전면전을 펼칠 준비지요.
첫째, 북방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동방 연합 왕국과의 대항을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 주군께서 여진 제국을 멸망시킨다면, 그건 멸국의 공을 세우신 것입니다. 주군께서 이미 제게 소식을 전하셨는데, 먼저 황제께 사천, 호남 두 성을 달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전략이 이전의 여씨 대염 왕국과 일치하긴 합니다. 하지만 5성을 다 손에 쥐어야만 완벽한 방어 체계를 갖출 수 있고, 충분한 인구와 충분한 양식, 충분한 토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만반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경성에서 성지가 도착하면, 우리 군대, 우리 관리들은 제일 빠른 속도로 호남과 사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군대 확충 계획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여담이 부홍릉 장군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부홍릉 장군, 지금 확충한 신병이 얼마나 됩니까?”
“8만 7천 명입니다.”
기세 소성주의 부인 부홍릉이 대답했다.
여담이 기세 소성주와 이문회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는 예전의 전략대로 기존 부대가 신병을 이끄는 전략을 쓰고자 합니다. 제1군단, 제2군단에서 우수한 군관을 1천 명 뽑은 뒤, 8만 7천 신병과 함께 제5군단을 만들고, 계청주 대인께서 제5군단을 통솔하시는 겁니다.”
계청주는 선황이 봉했던 백색 부총병인 만큼 이번 최고층 회의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귀만 열려있을 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명검파에 잡혀간 뒤로, 청룡회가 와해했고, 남아 있던 제자들도 기세 소성주의 제3군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계청주가 제자들을 빼앗아 오겠다고 할 수도 없으니, 서남으로 돌아온 그는 실질적인 직무가 없는 허수아비 부총병이었다.
심지어 원래의 청룡회 건축물도 제3군단의 주둔지가 되었다.
망연자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는 서남에 오면서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그에게 신규 군단인 제5군단의 통솔을 맡으라는 것이다.
제5군단은 무려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계청주는 솜털이 삐쭉 서는 기분이 들었고, 온몸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사실 계청주는 관직에 대한 욕구가 엄청 큰 사람이었다.
천윤제가 그를 실권 참장에 임명하던 순간, 그는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열정이 치솟았고, 곧장 백색성에서 군대를 확충했다.
그때 그에게는 1만 명의 병사가 전부였지만, 그 병사들을 통솔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1만 명으로도 만족했던 그가, 이제는 10만 명을 이끌게 되었다.
계청주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황공하기까지 했다.
“그러긴 어렵지 않을까 싶소. 선황께서 나를 부총병으로 봉하시긴 했지만, 실제로 병사들을 거느린 시간은 몇 개월에 불과하고, 전장 한 번 나가보지 못했소이다. 무수히 많은 병서를 읽었지만, 결국엔 탁상공론에 불과하오. 갑자기 내게 그런 높은 지위를 줬다가, 내 부족함 때문에 주군께서 큰일을 그르칠까 봐 두렵소.”
계청주의 말에 여담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계 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5군단은 모두 신병이니, 전투시엔 독립적으로 어떤 구역을 맡진 않을 겁니다. 초기 1, 2년 동안은 다른 군단의 전투를 보조하는 역할이 주된 임무일 것입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무공 강자이시고, 병법을 익히 알고 계시고, 덕망이 높으신 분이니, 신병들을 이끌기에 최적의 수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전부 주군의 의지이십니다. 저나 이문회 대인께서는 장군께 이 직책을 드릴 권한이 없거든요.”
계청주가 흠칫 놀랐다.
그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주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집으로 돌아온 계청주는 아직도 흥분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계표표가 벌써 저녁상을 차려놓았다.
근래 계표표는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원래는 계표표가 두변의 최측근 호위였지만, 두변을 보호하지 못했을뿐더러, 나중에는 두변이 그녀를 보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치이후용(知恥而後勇: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자만이 더 분발하여 정진한다)이라 했다.
계표표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무도 수준을 미친 듯이 끌어올렸다.
계표표의 수련 효과는 무척 좋아서, 벌써 1계 종사에서 4계 종사까지 이르렀다.
계표표는 가장 충성스럽고 건장한 무사들을 골라 두변의 친위대를 직접 꾸렸고, 매일 절세 지하성의 깊은 곳에서 정석과 약물을 병용하며 수련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예 친위대였다.
정예 친위대는 두변을 항시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군의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기도 할 것이다.
계표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매일 피땀을 흘리며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혈관음도 매일 교룡호 전함에 올라, 새로운 지식을 미친 듯이 습득하는 데 몰두했다.
혈관음은 최단 시간 내에 철갑 전열함의 사용 방법과 전투 전략을 파악하고자 했다.
한 가지 성가신 점은 전열함의 선장인 리아나 군주가 혈관음을 좋아하게 되어서 하루가 멀다고 그녀에게 구애한다는 점이었다.
계표표는 원래 지금 시간엔 절세 지하성 깊은 곳에서 수련하고 있어야 하지만, 계청주가 돌아온 뒤로는 일단 업무를 내려놓고 부녀 상봉의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계표표는 아버지가 북명검파에서 1년 넘게 감금되고 돌아온 뒤, 스스로를 제외하고 모든 게 바뀌었다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던 계표표는 계청주가 애써 속상한 마음을 숨기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다.
계표표는 언제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던 아버지가 웅대한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움츠러드는 모습이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런데 오늘 집으로 돌아온 계청주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호흡이 가쁘기도 하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꼭 튕겨 오르는 용수철 같다고나 할까.
무슨 일이길래 아버지께서 이렇게 기뻐하실까.
“아버지,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주군께서 북방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면, 제가 바로 주군께 말할게요. 문무를 겸비한 대종사를 이렇게 둬선 안 된다고요.”
계표표가 계청주를 위로하면서 슬쩍 속내를 떠보았다.
계청주가 자리에 앉더니 주전자를 들어서 잔에 술을 따르다가 멈칫하더니 반 잔만 채웠다.
“네가 나설 필요 없다. 이미 정해졌단다. 주군께서 내게 신설된 제5군단 8만 여 명 병사를 거느리라는구나. 황공하고 불안한 마음에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이문회 대인과 기세 장군이 이미 정해진 일이라고 못을 박더구나.”
계청주가 술을 슬쩍 한 모금 마신 뒤,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바칠 수밖에. 북명검파에서 감금된 동안,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매일 예전에 읽었던 병서를 다시 되새기면서 완전히 이해했다. 비록 탁상공론이긴 하지만, 내가 병법과 책략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계표표는 계청주보다 더욱 기뻐하면서 속으로는 제 부친의 벼슬 욕심은 실로 대단하다고 웃었다.
“아, 술 마시는 건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술은 마시면 안 되겠다.”
계청주가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요 며칠 누가 계속 술로 마음을 달래신 건지.’
계표표가 다시 속으로 웃었다.
“자, 너도 바쁠 테니 매일 집에만 있지 말고 얼른 돌아가거라. 나는 군사 학원으로 가서 시찰도 좀 하고, 배울 것도 좀 배운 뒤에 곧장 군 주둔지로 가야겠다.”
계청주가 말했다.
그는 온몸에서 솟구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두변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는 걸 하루빨리 증명하고 싶었다.
이 순간부터 계청주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인물 두변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그의 마음속에는 총명하고 사람 볼 줄 아는 주군 두변만 남았다.
대금 제국의 성도.
대결전이 곧 시작될 것이다.
30만 대군이 심양성 방어선에 총집합했고, 요동에서 제일 큰 성은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대전을 준비했다.
동방 연합 왕국에서 5천 구 갑옷과 함께 화포를 두 차례나 보내줬다. 처음엔 100대, 그다음엔 130대를 보냈고, 각양각색의 포탄을 무려 몇만 발이나 보냈다. 실심 포탄, 산탄, 유탄, 그리고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하는 유산탄까지.
정리해보면, 심양성에는 지금 대구경 화포가 230대나 있었다.
동방 연합 왕국에서 물건 수송을 담당한 사람은 두변의 얄미운 여섯째 숙부 두쟁이었다.
이번에 그는 130대 화포와 수천 발 포탄뿐 아니라, 아주 특별한 군대를 이끌고 왔다.
이 특별한 군대의 군장 제복은 지금껏 본 그 어떤 갑옷과도 달랐다. 투구가 쇠로 만들어진 것 외에, 나머지 모든 게 다 천이었다.
두변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들이 현대 군장 제복을 입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진 모르지만, 신식 제복을 입은 병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쳐 보였다.
신식 군대의 무기는 화총이고, 무려 후장 수발총(後裝 燧發槍: 후미장전식 수석총)이었다.
이런 총은 종이 탄피를 쓰기에 총구에 화약을 넣을 필요도 없었고, 총구 안의 탄환을 긴 막대기로 쑤실 필요가 없었다.
동방 연합 왕국이 또 한 번 세계를 앞서고 있는 것이다.
심양성에 들어선 신식 화총 군대는 부대원이 1천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금태극이 간단한 군사 연습을 하면서 깨달았듯이, 신식 화총 부대 1천 명은 5배 이상의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사격 속도가 워낙 빠르기도 하고, 3단식 사격을 하니 사격이 끊이지 않았다.
화총은 정확도가 활보다 월등히 뛰어났고, 사격 가능 거리도 활보다 훨씬 더 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사자 두쟁이 말했다.
“우리는 두변 그 자식을 없애기 위해서 그놈의 스무 배, 서른 배의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놈을 죽이지 못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이건 소 죽이는 칼로 닭을 죽이는 수준이 아니라, 미사일로 멧돼지를 죽이는 수준이었다.
완전무장한 5천 명 마혈 무사, 230대 대구경 화포, 1천 명 신식 화총병, 30만 여진 대군, 그리고 견고한 심양성까지.
이 정도 규모라면 백만 군대도 거뜬히 깨부술 테니, 두변의 4만 대군은 금태극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금 금태극이 모은 힘은 두변의 열 배가 아니라 스무 배, 서른 배였다.
“두변, 이번에도 네놈이 죽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금태극은 두변을 잡기 위해 심양성에 촘촘한 망을 만들어둔 정도가 아니라, 두변만을 위한 지옥을 준비한 셈이었다.
이원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두변, 어서 오너라. 와서 네놈의 목숨을 내놓아야지. 이번에도 네놈이 살아남는다면, 그건 천도를 어기는 것이야.”
두쟁이 말했다.
“두 시진이면 됩니다. 전투 시간은 길어야 두 시진일 것이고, 두변의 전군은 전멸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