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92화 (492/648)

492장: 왕이 된 두변

한때 여진 제국의 군왕이던 고이민은 여진족 내에서 별종 취급을 받아왔다.

그는 무공이 무척 뛰어나기도 했지만, 학문 수준은 더욱 높았다.

한때 여진족에서는 글을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오히려 그래야 용감하고 용맹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고이민은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대녕 제국의 각종 서적을 구해서 읽었다.

이런 이유로 고이민은 여진 귀족과 어울리지 못했고, 다마곤과 무공 수준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대한 노이적이 있을 때는 변두리 인물에 불과했다.

그러다 금태극이 대한이 된 뒤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성까지 50리가 남았을 때, 군대가 잠시 멈춰서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전 여진 제국의 군왕 고이민이 두변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주군, 반역을 일으키실 겁니까?”

두변은 어이가 없었다.

‘다짜고짜 무슨 반역? 내가? 대녕 제국을?

이놈 어디가 모자란 놈인가? 내가 너랑 친해?’

당시에 고이민이 2만 여진 대군과 함께 무릎을 꿇고 두변에게 투항했고, 그 뒤로 두변은 그를 찾지도, 고이민이 두변을 찾지도 않았다.

그런데 경성에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인사치레도 없이 대뜸 반역할 거냐고 물은 것이다.

“당연히 아니지.”

“왭니까?”

고이민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겐 더 원대한 목표가 있으니까.”

“무슨 목표요?”

“엄청 엄청 원대한 목표. 이 세계를 정복하는 건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아, 네.”

고이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품 안에서 <두변 문집>을 꺼냈다.

두변이 흠칫 놀랐다.

‘내가 언제 문집을 냈어?’

“주군, 여기 있는 모든 문장과 시조를 직접 쓰신 겁니까?”

고이민이 물었다.

“그래. 근데 왜?”

“아뇨. 그냥 좀 이상해서요. 문풍이 다 다르잖습니까. 하지만 글이 안 좋다는 건 아니에요. 아주 훌륭하죠. 이 문집을 거의 천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고이민은 그 말만 남기고 곧장 막사를 떠났다.

고이민이 두변의 추종자였을 줄이야.

고이민이 떠난 뒤, 두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마 온 천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두변이 반역을 일으키진 않을까? 천자를 협박하여 제후를 호령하지 않을까?

지금의 두변은 마땅한 포상을 줄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한 공로를 세워왔다.

다른 시대였다면, 황제는 오히려 그를 토사구팽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설령 황제가 그러고 싶다고 해도, 황제에겐 그럴 능력이 없어서 그럴 수가 없다.

두변은 이도진을 찾아가서 물었다.

“이도진,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내가 반역을 일으킬 것 같아요?”

이도진이 곧바로 가느다란 팔을 뻗어서 두변의 목을 두르고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당연히 그럴 일 없죠. 낭군이 어떻게 반역을 일으키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뭐하러 반역을 일으켜?”

이도진의 따듯한 입술이 두변의 입술에 닿았고, 두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질문하고 싶어서 온 거지,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도진은 이미 자신의 옷을 훌렁훌렁 벗고 있었다.

지난번에 두변이 사안이 긴급하니, 일단 신체적 교감은 나중에 하자고 했을 때 이도진이 명언을 하나 남겼었다.

‘이미 벗은 옷을 다시 입게 하는 법은 없어요.’

이 와중에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반역을 일으킬 거라고? 천자를 겁박해서 제후를 호령할 거라고? 다들 눈깔이 삐었군. 나 두변을 제대로 얕봤지.’

경성.

영덕제는 전무후무한 환영 규모로 두변을 맞이했다.

그는 황자 세 명, 문무백관과 함께 성 밖 30리까지 두변을 마중 나왔다. 황제를 호위하는 2천 어림군과 환영 행렬을 따라 나온 수천 명 경성의 백성도 함께였다.

사상 초유의 예우였다.

두변의 군대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토사구팽을 당할까?

문무백관은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는 두변 공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두변이 이렇게 큰 공로를 세웠으니 거들먹거리지 않을지 궁금해했다.

황제까지 100미터가 남았을 때, 두변이 말에서 내려오더니 빠른 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의 앞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삼고구배를 올리려 했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하지만 두변이 무릎을 꿇기도 전에, 영덕제가 두변의 팔을 붙잡고는 그가 무릎을 꿇지 못하도록 막았다.

영덕제가 두변을 향해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짐이 영씨 황족의 선조를 대신해서 두변 공작의 은혜에 감사드리오. 군신(群臣)들은 무릎을 꿇고 두변 공작의 구국지은에 감사하시오.”

황제 뒤에 있던 문무백관과 황자 세 명이 전부 두변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두변 공작께서 사직을 보좌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두변이 서둘러 답례하면서 황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창한 예우였다.

영덕제가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외쳤다.

“두변은 명을 받으라. 짐은 두변을 태자 태부(太傅)에 봉한다.”

두변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리옵니다.”

이어서 대환관이 앞으로 나와서 성지 하나를 펼쳤다.

“두변은 성지를 받들라. 황제가 명하노라. 두변을 진서왕으로 책봉한다.”

백 명이 넘는 환관이 각종 악기와 북을 치면서 풍악을 울렸다.

‘열토봉왕(裂土封王: 왕족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왕에 봉해짐)이라니?’

두변은 놀랐고, 문무백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두변을 왕에 봉하시다니?’

대녕 제국 건국 이래, 다른 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두변이 그런 선례를 깨트렸다.

영덕제가 문무백관과 아무런 상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영덕제가 이 일을 앞서 언질했다면, 모두가 일어서서 이 결정을 반대했을 것이다.

대신들은 두변을 왕에 봉해버리면, 이어서 벌어질 상황이 불 보듯 뻔하다고, 돌이킬 수 없다고 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만인 앞에서 성지를 읽어버렸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영덕제가 두변에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서왕, 성지를 받들라.”

“대녕 제국에선 성이 다른 자가 왕에 봉해진 적이 없습니다. 신은 감히 이 성지를 받들 수 없으니, 부디 폐하께서 명을 거둬주십시오.”

문무백관은 두변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영덕제가 말했다.

“짐의 말은 금구옥언이오. 어찌 짐에게 성지를 거두라는 청을 할 수 있소?”

두변이 재차 거절했다.

“신은 감히 이 성지를 받들 수 없습니다.”

영덕제가 대신들을 향해 외쳤다.

“군신들은 어서 무릎을 꿇지 않고 뭣들 하는가? 진서왕에게 예를 갖추어라.”

문무백관이 다시 한 번 두변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신, 진서왕 전하를 뵙습니다.”

영덕제가 말했다.

“진서왕, 만약 계속 성지를 받들지 않겠다면, 저 군신들은 일어날 수가 없소.”

“신, 도저히 이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군신이 무릎을 꿇었음에도 진서왕이 성지를 받들지 않으니, 짐이 직접 부탁할 수밖에 없군. 진서왕, 짐은 공이 너무 크면 포상을 내리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소. 애경(愛卿)이 하늘도 놀랄 만한 큰 공을 세웠는데, 인색한 포상을 내릴 수 없소. 비록 다른 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된 적은 없지만, 애경만큼 큰 공로를 세운 자도 없었잖소. 그러니 애경이 진서왕에 봉해지는 건 응당한 일이오.”

영덕제가 군신들의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예를 올렸다.

“애경, 부디 짐의 왕작(王爵) 포상을 받아주시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짐은 이대로 일어서지 않겠소.”

대신들은 깜짝 놀랐고, 두변의 마중을 구경하러 왔던 수천 백성도 깜짝 놀랐다.

‘영덕제 폐하께서 신하에게 이렇게나 예를 갖추시다니. 선황보다 더 하시는군.’

두변으로서는 왕의 작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더는 이 상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신,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두변이 큰절을 올렸고, 군신들과 수천 백성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진서왕 천세, 천세, 천천세.”

영덕제가 말했다.

“진서왕, 말에 오르시오. 짐이 애경을 위해 말을 끌고 경성으로 들어가겠소.”

두변이 허리를 숙이고 사양했다.

“폐하, 절대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마지막엔 서로 한발씩 양보해서 황제가 가마에 올라타고, 두변이 말을 타고 황제를 곁에서 호위하기로 했다.

군신 대열은 황제의 뒤를 따랐고, 어림군이 이들을 호위하면서 위풍당당하게 경성 안으로 들어갔다.

경성 안으로 들어가자, 두변은 더욱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황제가 수십만 백성에게 두변의 환영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터라, 백성들은 저잣거리, 골목, 집 앞, 창가에서 두변을 환영했다.

“두변 대인, 공후만대!.”

“대녕 제국 만세, 만세, 만만세.”

유래에 없는 엄청난 환영 의식이었다.

영덕제는 두변에게 대녕 제국 건국 이래 가장 큰 영광을 안겨주었다. 두변은 수백 년 만에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두변은 정말로 왕의 작위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공작에도 몇 등급이 있고, 공작 위라고 해도 국공이 있었다.

그런데 영덕제가 모든 단계를 뛰어넘고 만인 앞에서 그를 왕에 봉했고, 전무후무한 최고 예우와 영광을 안겨주었다.

양심 없는 말을 한마디 하자면, 두변은 이로 인해 황제와 협상할 때 수동적인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거창한 환영 의식이 끝나자, 두변은 황제와 함께 태묘로 가서 선조와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오후에는 선조의 황릉 앞에서 이원의 능지처참 처형을 진행했다.

이원의 처형을 시작할 때, 영덕제가 가장 먼저 직접 칼을 들고 그의 살을 도려냈다.

파렴치한 배신자가 드디어 제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원은 능지처참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처형 집행자들은 이원이 처형 도중에 죽지 못하게 쉴 새 없이 삼탕을 먹였고, 이원은 마지막 천 번째 칼질을 받은 뒤에야 죽을 수 있었다.

두변이 이연정의 무덤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어르신, 복수해드렸습니다.”

저녁에는 두 사람이 황궁으로 돌아와 태후마마를 뵈었고, 밤이 된 뒤에야 두 사람이 조용히 독대할 수 있었다.

황궁의 서재 안.

두변과 영덕제 두 사람은 화목하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어색함과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요동 대전이 끝났으니, 신은 요동 총독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두변이 먼저 기분 좋은 대화를 건넸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네. 애경이 보기엔 누가 그 자리를 맡으면 좋을 것 같소?”

“여진 제국이 멸망했고, 그 수천 리 강산이 대녕 제국의 강역(疆域)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요동 변진과 계주 변진을 계요 변진으로 합병했으면 합니다.”

만약 두 변진을 합하게 되면, 계요 변진은 대녕 제국의 제일 넓은 방어구역이 될 것이고, 군권의 요충지가 될 것이다.

“허락하오. 애경이 생각하기엔 계요 변진 총독의 적임자가 누구요?”

“신이 생각하기엔, 영설 공주께서 총독이 되셨으면 합니다. 부홍빙 장군이 산해관 총병을 담당하고, 이릉이 심양위 총병을 담당하고요.”

영덕제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거용관부터 산해관, 그리고 요동 전체의 군권이 모두 영설 공주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가 말했다.

“와나간국이 요즘에 힘이 빠지긴 했으나, 경계를 늦출 순 없소. 선화공 난오가 죽었으니, 짐은 선화 변진의 총독 자리를 오래 비워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짐은 선화 변진의 체계를 다시 세우고자 5만 병사를 모병하고자 하오. 애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 일은 폐하께서 건곤독단(乾坤獨斷: 혼자 의사결정을 할 뿐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없다.)하시면 됩니다.”

“짐은 여림후(汝林侯) 왕실지(王室之)를 선화 총독으로 임명하고자 하오. 애경의 생각은 어떻소?”

여림후 왕실지는 대녕 제국 훈귀 중 한 명이었다. 왕실지의 부친은 선화 총독직을 맡았었는데, 수십 년 전에 한 대전에서 크게 패배하고, 정치 싸움에서도 밀려났다. 그때부터 난오 공작이 선화 총독을 맡게 되었다.

황제가 몰락한 지 오래된 여림후를 다시 쓰게 된다면, 여림후 일가는 황제의 은혜에 무척 감사할 것이다.

“영명하신 결정입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나름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변이 계요 변진의 군정 대권을 가져갔고, 황제는 선화 변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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